지금까지 돈을 모으지 못한 이유를 찾아보았다.

[마흔이 서글퍼지지 않도록] 아마도 그럴만 해서

검토 완료

남희한(raintouch)등록 2021.01.22 10:33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이유를 찾기 위해 고민을 시작했다. ⓒ 남희한

 

월급이 많지 않았다.

대학생이 되고부터 혼자 생활했다. 빈곤했다. 빛나지 않는 수저로 태어나 먼 타지에서 생활하던 고학생이 넉넉할 리 없었다. 그래서 때를 기다렸다. 돈 벌 수 있는 날을. 타서 재가 돼 버릴 것 같이 뜨거웠던 청춘을 학교라는 커다란 냉장고 안에서 식히며, 어서 손질되길 기다리는 식재료 마냥 꽤 긴 기간을 그렇게 기다렸다.

그러다 시력이 좋지 않은 요리사의 손에 이끌려 지금의 회사에 입사했다. 그리고 나름 신선한 맛을 내는 육수를 뽑히며 돈을 벌었다. 신입사원. 그 생기 넘치는 이름만으로도 회사는 돈을 쥐어줬다. 미안한 마음에 모두를 위해 땀 흘려 춤을 췄고 노래도 했다. 월급이 아깝지 않다는 듯한 선배들의 흐뭇한 표정을 보면서 한껏 뿌듯해했다. 뿌듯함은 오버로 번지기 일수였고 가끔 피와 눈물 찔끔을 내어주고 멍과 아픔, 그리고 월급 찔끔을 받았다.

찔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딱 버틸 수 있는 만큼의 돈을 벌었다. 나의 춤과 노래를 냉정하게 돌아볼 수 있는 지극히 현실적인 평가이기도 했다.

대출이와 절친이었다.

많지 않은 돈이지만, 벌면 돈이 쌓일 줄만 알았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 옛날 당겨 쓴 돈들이 기다렸다는 듯 제자리를 찾아 돌아갔다. 회귀본능인가? 언제나 돈은 우리은행으로 들어와 우리은행의 결제대금으로 빠져나갔다. 뭔가 이상했지만 별 수 없었다. 신용이라는 탄탄한 끈으로 이어진 은행과 나는 그렇게 서로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 없이 당겨 쓰고 밀어 넣기를 반복했다.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면서 0으로 수렴해가는 통장을 보며, 밀당을 잘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내가 잘 끌려다닌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기가 좋지 않았다.

취업만 되면 금방 부자가 될 줄 알았던 나는 불안했다. 이대로면 평생 0점 조절만 하는 저울이 될 것 같았다. 대책이 필요했다. 내 마음을 아는지 때마침 재테크 열풍이 불기 시작했고 나는 재테크 책 몇 권을 읽고 주식을 시작했다. 인생의 첫 재테크. 그것은 짜릿했다. 파아란 주가 지수의 끝없는 추락. 덩달아 파랗게 질려가는 나의 얼굴. 그렇게 2008년 금융위기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짜릿함을 선사했다. 당시 샀던 주식이 우리은행이었던 것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생각도 없던 결혼을 했다.

정신없이 육수를 뽑히고 빨리던 어느 날, 신선함이 반감되었는지 더 진한 육수를 원한 회사는 나를 머나먼 미국 땅으로 보냈다. 학자금 대출을 겨우겨우 상환한 입사한 지 3년이 될 때였다. 보내기 전, 회사는 내 인생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결혼이 그것이다. 결혼 생각이 전무했던 내게 나가면 외로우니 결혼을 하라고 종용했다. 당시 팀장이 파견 이야기보다 나의 결혼 계획을 먼저 물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술자리에서 결혼의 유익함을 역설하고 빠른 결혼의 장점들을 나열했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아무튼 나는 귀가 하염없이 얇으므로 종용당했다. 덕분에 쥐꼬리만큼 쌓였던 돈은 미국 정착을 위해, 결혼을 위해 싹싹 긁혀 또 어딘가로 흘러갔다. 

환경이 계속 변했다.

정신없는 미국 생활이었다. 매일이 살아남기 위한 전쟁이었다. 그냥 늘 줄만 알았던 영어 실력은 좀체 늘지 않았고 나를 상대하는 미국인들에겐 본의 아니게 고구마를 먹이는 나날이었다. 하루는 호박 고구마, 하루는 밤 고구마. 다양한 답답함을 맛보게 하며 근근이 지냈다. 돈 따위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살아남아야 했으므로.

그러는 동안에도 월급은 여전히 많지 않았고 회사에서 보내주는 생활비는 월급과 함께 제자리를 착실히 찾아갔다. 거기다 부족한 생활비를 한국에서 끌어올 때면 환전과 송금만으로도 돈이 줄어드는 마법을 경험했다. 언제나 돈은 부족했고 얼마 뒤 돌아갈 한국에서의 생활을 걱정해야 했다. 

아등바등하는 생활이 익숙해질 때쯤 한국으로 돌아오며, 1년 2개월의 시간은 (미국에) 정착하고 (한국에) 정착하는데만 쓰기에도 부족한 시간임을, 우리은행 주식이 반토막 나는데 충분한 시간임을 알게 됐다.

반복된 출산을 감행했다.

그 이후로, 돈은 내 것이 된 적이 없다. 결혼과 출산, 출산, 출산, 출산. 잘 못쓴 거 아니다. 어떤 연유였는지 가물거리는 이유로 우리는 덮어놓고 낳기 시작했다. 덕분에 아내의 배는 7년간 불러 있었고 우리의 시간은 그 기간 멈춰있었다. 매일 반복되는 우유 먹이기와 기저귀 갈기, 이유식 먹이기는 마치 시간이 멈춰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시간의 흐름은 멈췄지만 지출의 흐름은 멈추지 않았다. 아내와 네 아이의 지극히 단출한 생활만으로도 은행은 +(플러스) 계좌를 용납하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국가에서 상을 줘야 한다는 데 금전적인 면만 보면 어째 혼이 나고 있는 느낌이다. 내가 무엇을 그리도 잘못하였나.... 덮어 놓고 낳다 보면 거지 꼴을 못 면한다던 옛 공익 문구가 왜 지금에야 떠오르는 건가....

모든 게 핑계일 뿐,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자. 지금 내게 돈이 없는 이유를    찾아보았다. 이제 대책을 생각해보자. 회사를 바꾼다? 나는 여전히 신입사원의 능력밖에 없다. 마흔 줄의 신입사원?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 대출을 없앤다? 안된다. 그때보다 더 끈끈해져 버렸다. 이젠 대출이가 없으면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이미 내 인생의 근간을 차지해 버렸다. 결혼을 취소한다? 뭔가 출산까지 취소될 것 같은 느낌이지만 아내 손에 내 명도 취소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것도 아닌 것 같다.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난 어쩔 수 없이 돈을 모으지 못했고 별 수 없이 이대로 지내야 한다. 합리화도 빠르고 포기도 빠른 나. 살면서 가능 잘하게 된 것 중 하나가 '인정'하는 게 돼 버린 듯해 씁쓸하지만, 이내 마음은 편해진다. 나란 인간. 참...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하나 확실하게 '인정'하게 된 것이 있다. 소기의 성과라고 해야 할지 또 다른 합리화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너무 명확해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Fact를 찾아 버렸다. 나는 그간 정말 처절하게 돈을 갈구했던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없으면 어쩔 수 없지. 뭐."

항상 돈이 필요했고 돈 만들 궁리를 했지만 가계부를 쓰거나 만원 단위의 재정상태를 점검했던 적이 없다. 교통비가 아까워 환승을 위해 달렸지만 매일 나 다니며 지인들과의 술자리에 빠지지 않았고 지금은 끊었지만 예쁜 연기를 보고 싶어 담배도 주기적으로 사서 폈다.

김밥천국의 모든 메뉴를 좋아했고 그런 외식도 즐거워하는 여인과 결혼했다. 그리 크지 않은 집이 아이들로 북적대는 막연한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버리고, 돈을 더 벌어보려 이것저것 하면서도 그를 통해 번 것들은 좋다고 썼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즐거워했고 돈이 궁하면 그냥 반만 즐겼다.

결국, 나는 돈이 없어 불평하고 돈의 뒤꽁무니를 쫓으면서도 그리 매달리는 사람이 아니었던 거다. 지금도 안방을 제외하곤 은행 소유인 집에서 여전히 제로에 수렴하는 통장을 들여다보며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하늘 높은지 모르고 치솟는 서울 집값을 보며 부럽기보단 지방은 싸서 다행이라고 안도하는 걸 보면, 나름 나를 제대로 분석한 것 같다. 결국 나는 돈이 없을만한 사람이었던 거다.

그냥저냥 살아가는데 그리 많은 돈이 필요하진 않았다. 삶의 수준이 높지 않은 탓도 있지만 경험에 비춰보면 남과 비교하거나 갖지 못한 것에 대해 고민할 때나 돈이 아쉬웠다. 여전히 돈을 더 벌려고 노력은 한다. 하지만 김밥을 앞에 두고도 환하게 웃어 주는 사람을 보며 고급 레스토랑에 데리고 가지 못해 속상해하는 일은 더 이상하지 않는다. 그러고보면 확실히 나는 운이 좋다. 돈이 없어도 나를 좋아해 준 많은 이들 덕분에 이렇게 우격다짐으로라도 평안을 얻을 수 있으니 말이다.

잠깐. 
혹시 내게 돈이 없는 이유가 이 좋은 사람들 때문인가?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다고 하더니. 아... 아무래도 이번 생에 돈으로 부자가 돼보긴 확실히 그른 것 같다. (웃음)
덧붙이는 글 개인 브런치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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