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엄마 딸 딸

이완의 자세

검토 완료

성태영(yonbora)등록 2021.02.08 14:40
  책을 선물하는 것은 꽤 이기적인 행동이다. 이 책을 꼭 읽어주세요, 저와 공감해 주시지요, 언제라도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어요... 이런 속내를 훤히 드러내는 노골적인 선물이다. 그래서 갈수록 책 선물을 자제하게 되고 해야 한다면 고르는 기준은 까다로워진다. 거침없이 읽어나갈 수 있는 책, 두 번 이상 읽고 싶은 책이어야 한다. 상대방의 휴식 시간을 빼앗고도 미안하지 않을 만큼 재미있거나 유익해야 한다. 나의 책보는 안목이 까발려지고, 선물하는 동시에 더 비싼 시간을 요구하는 책 선물, 확신이 서지 않으면 차라리 핸드크림을 사는 것이 낫다.

  김유담 작가의 두 번째 책이 나왔다. 『이완의 자세』, 어깨가 쪼그라들 때나 생각나던 이완이라는 단어를 제목으로 접하니 한결 평화롭다. 작가에게 신동엽문학상을 안겨준 『탬버린』의 기억이 좋아 망설이지 않았다. 표지가 예쁘다. 대중목욕탕의 풍경.. 대야, 환풍기, 목욕의자 그리고 초록색 때수건. 코로나 시대, 이제 이것들은 일상의 그리움이다. 아련해진 평범한 날이다. 파스텔톤의 그림과 차갑지 않은 표지 촉감이 친근하다.
 
  어릴 적 나는 주말이면 할머니, 엄마 손을 잡고 목욕탕에 갔다. 그래야 새로운 주를 맞이할 수 있다 생각했다. 락커에 옷을 대충 던져넣고 잠근 후 열쇠를 발목에 끼운다. 그리고 돌아서 종종걸음으로 목욕탕으로 향한다. 모두가 알몸이고 공중, 대중목욕탕은 이름처럼 누구에게나 자유롭고 평등한 곳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어린 내 기준으로 지정 락커를 가지고 달목욕을 하는 이들은 부자였다. 카운터를 지키는 주인, 세신사의 목소리 톤은 경쾌하고 그들이 주고받는 반말은 가족처럼 다정하다. 붐비는 주말이나 명절 전후에도 그들이 오가는 동선은 막힘이 없었다. 목욕 바구니에 있는 갖가지 목욕용품들. 미제 샴푸나 바디클렌저는 상설시장 유일한 수입품 코너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군더더기 없는 생활을 하는 엄마의 목욕 바구니에 비누가 아닌 바디클렌저가 담긴 것은 한참 뒤였다.
 
  목욕탕에서 사는 삶이라. 벌거벗은 몸으로 벌거벗은 사람들 속에서 매일을 보내는 것은 어떤 것일까. 주인공 유라는 엄마와 목욕탕에서 산다. 달목욕도 모자라 때미리 아줌마에게 몸을 맡기고 요플레를 온몸에 칠하고 얼굴은 곱게 간 오이로 뒤덮은 사모님들. 도살장에 끌려가듯 엄마 손에 이끌려 여탕에 온 같은 반 남학생. 때미리 아줌마에게 곧 돌아오겠노라고 부탁한 단골의 아이는 인형을 들고 물에 퉁퉁 불은 손으로 몇 시간째 놀고 있고.. 바나나 우유를 사달라고 보채다 등짝에 손바닥 자국이 벌겋게 난 아이 등등. 유라의 사소한 일상은 이러했을 것이다.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 있었지만 늘 관찰자였고 떠돌이였을 유라가 짠하다. 같이 목욕탕 평상에 앉아 야쿠르트라도 쭉쭉 빨고 싶다.

  탄탄한 근육질의 몸과 빨간 브라 팬티 세트는 유라 엄마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이렇게 나는 내 딸을 무용도 시켰고 명문대도 보냈다는 당당함. 허리를 곧추세우고 살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을까 싶어서 딸 가진 엄마의 마음으로 읽는 내내 나의 몸도 긴장되었다. 남자와 모텔에 갔다는 딸에게, 제대로 관계를 하지도 못했다는 딸에게 오늘 못하면 다음에 하면 된다, 인생은 길다.... 잠 안 오면 온탕에라도 한 번 들어갔다 오라는 그 지점에서야 나도 온탕에 있는 듯 몸이 풀렸다.
 
  얼마 전 백내장 수술을 받느라 엄마가 오셔서 3주를 계셨다. 내려가시기 전날 나의 딸에게 엄마는 "지현아, 아빠가 참 좋은 아빠다이. 니한테 이리 잘해주고. 할머니는 아빠 없이 자라서 니처럼 좋은 아빠랑 사는 사람들 보믄 참 부럽데이." 엄마가 한 살 되던 해, 6·25 때 할아버지는 전사하셨다. 나에게 늘 우리 엄마는 아빠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딱히 추억할 것도 없는 이였다. 우리 엄마에게 아빠에 대한 그리움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것은 유라 엄마의 빨간 브라와 팬티다. 아빠의 그늘에서 인생의 다사다난함을 겪은 이들을 부러워하는 속내를 들키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씩씩함이었을까. 힘겨웠겠다. 70이 넘어서야 엄마의 숨통이 트인 것 같다.

  목욕탕에서 살아본 아픈 추억이 없어도, 홀로 딸을 키우지 않아도 무용학원비를 아까워하지 않는 유라 엄마의 마음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때를 밀어 번 돈이기에 더 기쁘게, 당당하게 학원비를 냈을 것이고 유라가 자랑스러웠을 거다. 세상의 모든 딸과 엄마는 그들 나름의 독특한 관계가 있다. 가장 친밀하면서도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그리고 치유하고 화해하려고 생을 걸고 발버둥 친다. 빨간 브라 세트 없이 벌거벗은 채로 누워 유라에게 온탕에라도 들어갔다 오라는 엄마의 말은 포옹 같았다. 다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아 뭉클했다.
 
  동네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연애를 즐기는 윤원장은 가장 이상적인 인물이다. 그래서 비현실적이다. "니도 너거 엄마처럼 살까봐 내가 걱정이 태산이다. 춤이야 때리치아도 되는데 평생 외로블까봐......" 외롭지 않은 삶이 구색이 갖추어진 그럴듯한 삶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어른은 40이 넘도록 만나보질 못했다. 나는 이런 어른이 되고 싶다.
 
  유라는 괜찮을 것 같다. 대학원을 간다고 뾰족한 수는 없겠지만 힘겹게라도 자신의 삶을 살게 될거라 안심이 된다. 이야기는 끝났는데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 같아 역시 김유담 작가의 글이구나 싶다. 다시 꼼꼼히 읽어봐야겠다. 달리듯 내리읽어서 놓친 유라와 엄마의 이야기를 더 들여다보고 싶다. 누군가에게 선물해도 괜찮은 책을 쓴 김유담 작가에게 고맙다. 돌아가신 외할머니, 엄마, 나 그리고 내 딸. 네 여자가 함께 목욕탕을 가던 추억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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