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를 향한 나의 고해록

SNS 사용자였던 나의 고해록... 바램은 너무 쉽게 깨졌다

검토 완료

허건(theinterview1112)등록 2021.02.15 15:44
 

인스타그램의 로고 2010년 개발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SNS) 인스타그램은 전 세계적으로 이용되는 SNS이다. ⓒ Instagram

 
최근 배구선수 이다영-이재영 자매의 학교폭력 사건은 배구계를 넘어 대한민국 사회 전체에 큰 논란이 되었다. 이다영과 김연경의 갈등이 시초가 된 이 사건은 이 후 이다영과 이재영 남매의 학교폭력 폭로로 진화됐고, 결국 두 선수가 학교폭력 가해 사실을 시인하고 선수단 숙소를 퇴소하는 절차를 밟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국가대표에 발탁되어 한 때 대한민국 배구계를 이끌어갈 대표선수로 촉망받았던 두 신예는 그렇게 코트에서 당분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 사건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도구는 바로 SNS였다. 학교폭력 사건이 공론화되기 전 이다영이 같은 팀 동료인 김연경을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통해 비난한 것이 모든 일의 시초였다. 이 후 이루어진 학교폭력 가해사실 폭로도, 가해사실 폭로 이후 SNS에서 보여진 이다영의 논란적 행동까지 SNS는 이 사건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로 자리잡혀 있었다. 사건의 전말을 떠나 SNS가 이 사건의 대부분의 전개에 포함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SNS는 인터넷의 발전과 함께 현대 사회의 대표적인 아이콘으로 뽑힌다. SNS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이유와 명분은 다양하다. 과거 편지와 일기장에 적었던 마음 속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정신적 해방감을 느끼고 싶어하는 이들도 있고, 자신의 견해와 생각을 밝히기 위해 SNS를 사용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단순한 연락 목적으로 SNS를 만들어놓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유가 어찌됐든 현대 사회에서 SNS는 인간의 삶 속에서 뿌리깊게 자리잡았다.

그러나 어떠한 것도 빛만 보여주지 못하듯, SNS가 불러온 부정적인 폐해들도 SNS의 발전과 함께 수면 위로 떠올랐다. 수 많은 유명인들이 SNS 상에서의 부적절한 발언 혹은 행동 한번으로 가지고 있던 명예의 대부분을 상실하고 몰락의 길을 걷게 된 사례나, SNS를 이용한 사이버 범죄까지 성행하는 등 SNS의 발전과 높은 사회적 위치는 꼭 긍정적인 작용만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기사를 쓰고 있는 나 자신도 한 때 SNS 사용자였다. 본래 SNS에 관심도 없었지만 학창시절 친구들이 하나씩 만들어 쓰고 있는 SNS 계정을 나만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 뭔가 유행에 뒤떨어졌다고 생각해 하나 만들어서 시작했던 것이 계기였다. 나에게는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계정이 있었지만 대부분 인스타그램에서 활동했다. 긴 글을 써야 하는 페이스북보다는 사진 하나로도 사람들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인스타그램이 내 취향에 맞았던 것 같다. 그렇게 2019년 정도까지 꾸준히 SNS를 사용하며 지냈다. 

그러다 지난 해, 나는 순간적인 허탈감을 느끼고 모든 SNS 활동을 그만두었다. SNS를 그만두겠다는 결심을 하기까지 오랜 시간과 고민은 필요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SNS가 나에게 불러온 부정적인 영향들과, 언젠가부터 SNS에 지배당한 듯한 나의 삶, 그리고 SNS로 내가 만들어온 여러 실수들과 잘못을 생각했을 때 더 이상 이 작은 앱 하나에 내 삶을 기부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나에게는 연락용으로 남겨놓은, 아무 글도 올라와있지 않고 활동도 없는 계정 몇 개와 아이디를 잊어버려 접속도 할 수 없는 계정들만 남아있는 상태다.

물론 이 글을 읽는 모두가 나와 같은 상황을 겪지는 않았을 것이다. 읽은이들 중 누구는 지금도 SNS를 통해 삶의 활력소를 찾고 SNS라는 도구를 통해 삶의 긍정적인 방향을 발견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들은 어찌 보면 SNS를 제대로 사용한 성공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하듯이 SNS를 나의 원래 목적대로 완벽하게 사용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뒤를 돌아보면 SNS에 올린 화려한 사진 밑에 깔려있는 허탈감과 잊고 있었던 실수들이 떠오를 수 있다.

'고해록' 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제목처럼, 나의 계기와 실수를 돌아보며 SNS를 이용하기 전 생각해봐야 할 몇 가지를 떠올려봤다.

SNS는 작은 일을 작은 일로 끝내지 않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일을 SNS에 올려 항상 사건이 커지게 만드는 빌미를 제공했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나는 한 친구와 크게 싸웠다. 이유와 상황에 대해서는 정확히 공개할 수 없지만 절교를 이야기할 정도로 큰 다툼이었다. 그렇게 서로 저주를 퍼붓고 심적으로 우울해진 나는 자살을 암시하는 듯한 문구를 올렸다. 나의 행동에 대해 '왜 그랬을까?' 라는 반문으로 돌이켜본다면 그저 사람들에게 "난 힘들어!" 라고 호소하고 싶었던 한치 앞을 못 내다본 행동이었음이 분명하다.

학교에 갔더니 난리가 나 있었다. 학생이 자살을 암시하는 글을 올렸으니 학교에서 야단법석하게 나를 걱정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급기야 나랑 싸웠던 그 친구도 내가 걱정된다며 이야기하는 바람에 나는 상담 교사에게 불려가 상담을 받아야 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절차였건만, 어린 나는 이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고 교실에 돌아가서는 친구들에게 "이거이거봐. 그 애 정말 한 대 때리고 싶네.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라는 말을 했다. 그러자 듣고 있던 담임교사는 '때리고 싶다' 라는 표현을 문제 삼았다. 한국에서라면 그냥 화가 나서 횡설수설 한 것으로 인식하겠지만 그 곳 사회에서는 '협박' 으로 인식되었기에 매우 잘못이 중했다. 선생님은 나를 교감에게 데리고 간다고 했고 안 좋은 기억이 있었던 나는 필사적으로 막으며 "제발, 보고하지 말아주세요" 라고 빌었다. 그렇다가 너무 감정이 복받친 나머지 가시려는 선생님의 어깨를 잡아챘고 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막 울었다. 나중에는 화가 나서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 학교 뒷구석으로 가 소리를 지르며 눈물을 흘렸다.

다시 돌아온 교실에는 교감이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4일동안 정학을 당했다. '뭘 이런 걸로 4일씩이나 정학을 주나?' 라는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교사의 어깨를 잡아챈 건 사실이니 뭐 어쩌겠는가. 하지만 본래 이유보다도 이 사건이 중하게 다뤄진 건 바로 내가 SNS에 올렸던 자살 암시 문구 때문이었다. 이것 때문에 나는 정학에서 돌아오고 나서도 계속 상담교사와의 상담을 받게 되었고 감시 대상이 되었다. 이 때 선생은 "부모가 SNS를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라고 진심 어린 조언을 했다. 그 때 어린 나는 '뭔 참견질이지?' 라는 철 없는 생각을 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말이 맞았다. 아이의 SNS는 부모가 최소한 관찰하기라도 해야 한다.

나는 이 버릇을 못 버리고 2년 후 비슷하게 또 자살 암시 글을 올렸고 다시 불려가서 조치를 받았다. 물론 2년 전처럼 후속적인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으니 정학은 받지 않았지만 그 글 한번으로 교장 앞에서 수치스럽게 얼굴을 쳐박고 훈계를 들어야 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순간이었는지 모른다. 상담사가 또 다시 상담을 받자고 제안했지만 나는 반항심 때문인지 상담시간이 되어도 어느 순간부터 가지 않았고, 그렇게 상담과는 멀어져 갔다.

나의 일화에서 보였던 것처럼, SNS상에 올라온 일은 시작이 작은 일이었더라도 끝은 절대 작게 끝나지 않는다. 실제로 내가 그 순간 죽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다. 먼 땅에서 여러 피해를 당하고 나름대로 고통을 겪었으니 그런 글은 올린 순간만큼은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나의 사적인 감정을 공개적인 SNS에 올린 대가는 컸다. 고통의 그 순간은 모두 무시되고 결국 나의 잘못처럼 뒤바뀐 결말만 남았다. 만약 내가 그런 글을 올리지 않았다면 내가 상담사에게 불려가는 사건은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정학을 유발시킨 후속적인 일들도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무엇보다도 싸운 그 친구와 화해할 수 있는 기회를 영영 잃어버린 것도 바로 이 SNS의 존재 때문이었다. SNS에 올린 글 하나로 문제가 되고, 그로 인해 사건이 커져버려 사과가 가능했던 두 사람의 사이에도 거대한 대나무 몇 십 그루를 십어버린 셈이 되어버렸다.

잠깐의 감정, 결국 부끄러움으로 끝이 난다

'저격글' 이라는 말을 들어봤는가? SNS가 열린 공간이라는 특성을 들어 자신의 불만이나 불만을 안겨줬던 특정인에 대해 공개적인 비난을 하는 것을 말한다. 부끄럽지만 나도 한 때 나와 가까이 있었던 친구에 대해 저격글을 쓴 적이 있다. 2016년 연말의 일이다. 그 친구가 그 해 초 전학온 이후 나는 어느 정도 그 친구와 함께 놀며 챙겨주려 노력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 친구가 내가 해준 노력만큼 잘 해주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서운함이 쌓여갔다. 

해가 바뀌고 한창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그 친구에 대한 서운함이 우연히 생각나 잘못된 선택을 했다. SNS에 그 친구를 태그하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나에 대해서 좋게 말해줄 수 없는 거였냐" "서운하다 난 너에게 최선을 다했다"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넌 사실 아무것도 아니였어" 등의 저격글을 올렸다. 그런 글을 올리고 나서 울며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당연히 그 친구도 화가 나 나에게 답글을 적었고 나는 황급히 그 글을 지웠다. 그러더니 나에게 문자알림이 쏟아졌다. 알고 보니 그 친구가 화가 나 나를 그 아이들의 단톡방에 강제로 초대시켜 놨던 것이다. 단톡방에는 그 친구가 나에 대해 쓴 욕이 많았다. 순간 무서운 마음이 들어 단톡방을 나와 계정을 지워버렸다.

잠깐이나마 그 친구에게 들었던 미안함이 사라졌다. "아무리 내가 그렇게 했더라도 단톡방까지 초대해서 날 모욕줄 필요는 없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자 그 친구에 대한 서운함이 분노로 바뀌어 타올랐다. 그리고 학기가 개학하고 컴퓨터 시간, 나는 "왜 이 과목을 선택했느냐?" 라는 질문에 "그 아이가 싫어서" 라고 대놓고 대답하고, 아이들 앞에서 대놓고 그 친구를 "머저리" 라고 욕하며 분노를 풀었다. 일종의 뒷담화였지만 그 때의 분노를 참을 수 없어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남들 눈에는 그저 분노를 못 이기고 아무 말이나 막 뱉어내는 모자란 애로 보였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난 어떻게든 이 애를 욕해야 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미숙한 행동이 낳은 결과는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나는 어느 날 수도가에서 물을 받다가 그 아이의 친구들과 마주쳤다. 그 아이는 모든 소식을 다 알고 있는 듯 씩 웃으며 다가왔다. 나에게 "야, 요즘 괜찮냐?" 라고 놀리듯이 묻고는 각 길을 가버렸다. 그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잠깐의 감정으로 SNS에 올렸던 서운함이 담긴 저격글과 그 교실에서의 뒷담화, 이 모든 행동의 결과는 그저 쪽팔림 뿐이었다. 

지금도 종종 SNS 상에서 저격글이 발견되곤 한다. 어떤 경우 심하면 법이 개입해야 할 정도로 내용이 심각하지만 절대다수는 자신들끼리의 작은 오해로, 다중이 개입하는 것이 아닌 자신들끼리 해결할 수 있는 작은 갈등들이다. 잠깐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작은 갈등을 SNS라는 열린 공간에 오픈하면, 마치 정의처럼 보였던 그 작은 감정의 끝에는 부끄러움만 남는다.

유치한 장난

나는 SNS에서 종종 유치한 장난을 친 적이 몇 번 있다. 위의 두 일화들과 달리 이것은 복기나 다른 생각이 필요없는, 시간이 지나고 보면 더욱 철이 없게 느껴지는 일화이다. 아마 SNS를 이용하는 많은 사람들도 이런 충고는 필요 없다고 느낄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오랜만에 초등학교 동창과 연락이 닿았다. 그 친구는 중학교에서 이제 3학년인데 내가 묻고 싶었던 선후배관계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그 친구는 자신이 꽤 무서운 선배라고 했다. 초등학생 때는 딱히 사나운 성격이라고 느낀 적이 없어 의외의 대답이었다. 한국 학교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했다. 

대화가 끝난 뒤 뭔가 유치하고도 고약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 친구가 자기가 무서운 선배라고 스스로 말했으니 그 친구에게 장난을 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의미 있고 뼈 있는 장난을 쳐주겠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좋아졌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정신으로 그런 생각을 했고 시행에 옮겼는지, 참 정신적으로 미숙했던 내 자신을 타임머신으로 돌아가 막고 싶다.

내가 현재 쓰는 예명 '유채하' 외에 당시 팟캐스트 방송과 글 등에 쓰던 예명이 몇 개 있었는데 그 중 하나를 골라 페이스북 계정을 급하게 팠다. 그리고는 여러 경로를 거쳐 페이스북 친구를 맺고 그 애와 대화를 했다. 그 친구에게 "너보다 2살 어린데 내가 왜 너한테 반말을 못하냐" "21세기는 다 친구인 사회다" "꼰대" "욕배틀을 하면 너를 언니라고 불러주지. 욕배틀 하자, 욕배틀 하자!" 등의, 아주 유치한 이야기를 했다. 그 친구도 어이가 없고 화가 났는지 나에게 욕을 하며 맞섰다. 내가 "욕배틀 해서 이기면 너를 언니라고 불러준다니까. 그것만 해주면 나도 알아서 갈게." 라고 막 꼬드기며 "나 대전 사니까 내려올래?" 등의 말도 했다. 혹시라도 그 아이가 주변의 죄 없는 애한테 뭐라고 할 까봐 지역을 서울이 아니라고 미리 말을 했다. 나중에는 그 친구가 "너 같은 애랑 이런 거 할 시간 없다. 차단하겠다" 며 내 계정을 차단해버렸고, 그 후 나는 그 계정에 들어간 적이 없다. 한 마디로 정의해서 친구에게 가명으로 욕배틀하자고 장난을 친 셈이다.

그 때만 해도 재밌다고 생각하고 잊어버렸던 일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내가 SNS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을 하게되며 이 이야기도 다시 내 머리 속에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런 유치하고 철 없는 장난을 쳤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새롭게 걱정되는 건, 확률은 매우 낮지만 혹시라도 내 가명과 비슷한 이름을 가진 사람이 오해를 받았으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면 절대 이런 장난을 치지 않을 것이다. 특히 SNS라는 공간에서 남을 사칭하지 않더라도 가명 같은 걸 쓰며 이런 장난을 치는 건 유치하기도 하고 위험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장난을 치고 난 뒤 나는 그 친구와 연락이 끊겼고, 지금까지도 소식을 못 듣고 있다. 아마 이 친구는 이 사람이 나인 줄 알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 친구에게 불쾌감을 줘서 미안하게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그러지 않았길 바라고 지금까지 봤을 때는 확실히 그런 일은 없었지만, 혹여나 이 일로 오해받거나 하신 분이 계신다면 이 기사를 빌려 사과를 드린다.

이렇듯 SNS라는 공간에서 나는 유치한 바보가 되어갔다. 사실 SNS라는 공간이 없더라도 이런 장난을 칠 만한 철 없는 정신상태면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이런 장난을 쳤겠지만, 이것이 더욱 특별히 다가오는 이유는 SNS라는 공간은 기록이 남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유치한 장난을 쳤든, 혹은 미래에 자신의 유치함을 후회하더라도 내가 기록으로 남긴 데이터는 나의 뒤를 영원히 따라다닌다. 반성의 유무, 후회의 유무와는 관련 없이 말이다.

SNS, 손을 놓다

여러 계기를 통해 SNS를 끊은 뒤의 세상은 이전과는 많이 다르게 보인다. 적지 않은 허구가 첨가되어 있는 SNS 속 세상은 직접 직시한 현실의 세상과 꽤 달라보였다. SNS에서 크고 격동적으로 보였던 감정과 스토리를 현실세상에 가져오면 너무나도 작고 볼품없어 있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SNS는 나에게 '혼란의 각막' 을 선물했다는 생각이 든다. 현실의 세계와 SNS의 세계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혼란으로 가득 찬 각막은 나에게 많은 실수를 저지르도록 만들었다.

현재 남은 SNS는 연락목적으로밖에 사용하지 않는다. 내가 기사를 쓰고, 방송인으로 조금 인지도가 쌓이면 SNS가 필요할 것이라는 주변의 권유도 있지만 내가 운 좋게 최상의 수준의 인지도를 가진 사람이 된다 하더라도 SNS로 세상과 소통할 생각은 꿈도 꾸지 않을 것이다. SNS를 통해 바라본 세상이 결코 깨끗한 각막을 통해 본 것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SNS에 대한 미련은 없다. 더 이상 오픈된 공간에서 바보가 되지 않겠다.

서문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결코 모든 이가 나의 전철을 밟지는 않는다. 현재도 SNS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즐기며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그들에게 이런 글은 그렇게 필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SNS를 시작해보려는 초보라면, 혹은 SNS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는 이들이라면 이 글에서 말하는 '혼란의 각막' 이라는 한 단어를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SNS가 주는 혼란의 각막을 잘 걷어내는 법을 모른다면, 당신도 SNS와 함께 많은 명예를 잃고 몰락할 수 있다.

현대 사회와 사람들과 함께 앞으로도 공존하게 될 SNS. 사회 구성원 전체가 SNS라는 현대사회의 필수품 같은 존재와 현명하게 공존하는 방법을 고민해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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