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잎의 비상 - 유채하의 호주이야기] ① 언어의 장벽

언어의 장벽... 영어 뚫는데 3년 걸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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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건(theinterview1112)등록 2021.02.23 10:33
 <나뭇잎의 비상> 은 호주에서 보낸 6년의 시간을 스스로 평가한 일기입니다. 이 시리즈에서 등장하는 모든 내용은 일부 주관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스쿨 스펙타큘러> 공연 모습 매년 11월이 되면 NSW주에서는 주의 학생들이 전부 모여 <스쿨 스펙타큘러> 라는 이름의 대규모 퍼포먼스 공연을 연다. 음악, 무용, 악기 등 여러 예술 특기생들이 출연하여 공연한다. ⓒ dance magazine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시작한 외국생활은 나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언어와 문화, 현지의 모든 것에 문외한이었던 나에게 설레임으로 시작했던 외국생활이 곧 도전과 절망으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6년의 시간동안 여러 피해와 잘못, 실패와 전환점을 여러차례 거치며 나는 많이 망가졌고 성장했다. 영어를 제대로 하지 못해 억울한 대우를 받았던 일, 일진 친구들에게 심한 괴롭힘을 당했던 이야기, 친한 친구에게 배신당했던 일, 학교에서 일어나는 여러 부당한 대우에 수업을 빼먹으면서까지 맞섰던 일까지 내가 겪은 모든 일들은 단순한 추억으로 남아있지 않고 나에게 가르침과 교훈을 주곤 한다.

호주에서 생활했던 6년의 시간. 그 시간을 겪으며 지나왔던 사건들과 깨달음을 대중 앞에 공개하며 내 자신이 부여할 수 있는 성찰과 평가를 내보려고 한다. 이런 나의 시도가 과거의 시간과 앞으로 보내게 될 미래의 시간 전체를 풍요롭게 만들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또한 나와 같은 환경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나 비슷한 경험을 겪었던 이들에게도 흥미로운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기를 소망한다.

언어의 장벽

언어는 새로운 땅에 정착하는 모든 사람들이 적응을 위해 해결해야 할 최우선 과제이다. 여타 다른 이주자들이 그렇듯 나도 호주 생활을 하며 언어의 장벽에 부딫치는 스스로를 수없이 많이 발견해야 했다. 여러 시간을 쏟아부은 영어공부와 학교 교육에도 영어 실력이 나아지지 않고 원어민들을 보면 긴장하게 되는 스스로를 볼 때면 종종 내 머리가 좋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자책하기도 했었다.

호주에 가기 전 한국에서도 영어공부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유치원에 다닐 때 일주일에 2번 원어민 교사와 영어공부를 했었는데 반에서 영어를 제일 잘한다고 친구들이 칭찬해줬을 정도였다. 이 후에도 영어학원을 꾸준히 다니며 영어공부를 했고, 호주에 오기 1년 전에는 영어독서 교육을 하는 학원에 다니기도 했었다. 영어독서가 너무 힘들어 학원을 다니는 내내 고생했고, 깐깐하게 봐주시는 남자 선생님 앞에서 제 분을 못 이기고 온 몸을 마구 비틀며 짜증을 내고 바닥에 주저앉아 징징거렸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내가 몸을 막 움직이고 쿵쿵 뛰니 선생님은 자기를 때리려는 줄 알고 놀라 나를 진정시키던 기억도 난다. 그 선생님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어 학원을 그만둘 때까지 얼굴을 바닥에 쳐박고 다녔는데 죄송하다는 사과 한 마디 하지 못해서 지금도 아쉬움이 남는다.

이렇듯 한국에서도 어느 정도 수준 높은 영어 교육을 받았다고 자부하고 호주로 갔지만, 현실은 너무나도 냉혹했다. 영어교육에 쏟아부은 고액의 돈이 아무 의미 없이 날아간 것처럼 느껴질 만큼, 현지의 영어는 나에게 높은 벽이었다. 호주 학교에 들어간 첫 날 선생님은 나에게 자기 자신에 대한 에세이를 써보라고 했다. 당연히 영어로 에세이를 제대로 써보지 않은 나는 순서와 문법 모두 맞지 않는 에세이를 제출했고 선생님에게 진지하게 상담을 받기도 했었다.

호주에는 영어센터라는 곳이 있다. 공식적인 명칭은 영어 집중 센터(Intensive English Centre) 로, 비영어권 국가에서 온 유학생들은 이 곳에서 3개월~1년여의 예비 기간을 거쳐야만 정식 호주 학교로 진학할 수 있다. 나의 호주생활은 이 곳에서 시작되었고 정식 학교에 진학하기 전 6개월을 이 곳에서 공부해야 했다. 아이들의실력은 천차만별이었다. 당장 정식학교로 진학해도 문제 없을 수준의 영어실력을 갖춘 아이들도 있는가 하면, 기본적인 인사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이들도 수두룩했다. 심지어 영어실력이 갖춰지지 않아 교육기간이 1년이 훨씬 넘는 학생들도 있었다.

한국에서 어느 정도 영어교육을 받고 온 나는 같은 반에 있는 친구들보다 영어를 잘하는 축에 속했다. 그러나 비영어권 국가에서 온 아이들 틈에서 잘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 기본적인 문법과 영단어는 배우기 쉬었지만 어려운 에세이와 쓰기로 들어가면 형편없었던 나의 실력이 밑바닥까지 들어났다. 글을 첨삭해주는 선생님의 빨간색 팬이 현란하게 움직일 때마다 자존감이 떨어졌지만, 더욱 절망적이었던 것은 실력 향상이 내 눈에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어는 속성과외나 벼락치기 같은 기술로 실력향상을 기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영어는 또 나의 생존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호주에서 한국인 학생들이 줄어들기 시작해 내 반에도 한국인은 나 밖에 없었고 외국 아이들만 모아놓은 영어센터에서도 한국인을 찾기 어려웠다. 같은 나라 사람이라도 있다면 어느 정도 기댈 수 있는 방어막이라도 있지만, 그런 것조차 없었던 나는 내 스스로를 방어할 수 밖에 없었다. 미리 한국에서 학습된 읽기, 쓰기와 달리 말하기와 듣기는 처음 시도해보는 것이라 난이도가 훨씬 높았다. 돈 내고 배울 수라도 있었던 읽기, 쓰기와 달리 말하기와 듣기는 특정한 교육과정이나 선생님이 없었다. 처음에는 말하기가 잘 되지 않아 선생님에게 조언도 구해봤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네가 노력하는 수 밖에 없다" 였다.

맨몸으로 부딫쳐라, 그것밖에 없다

무작정 도전해보기로 했다. 선생님들과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며 말하기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했다. 처음 영어로 말하기 시작한 나의 입에서 나오는 영어는 대부분 문법도 제대로 갖추기 못한 유아 수준의 문장들이었지만 내 스스로가 그들의 사회에서 목소리조차 뺏긴 약자로 살지 않으려면 수준 낮은 문장으로라도 그들과 소통해야 했다. 한국인이 별로 없었던 학교의 환경도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나도 초반에는 한국인 동생들과 같이 어울리며 밥을 먹기도 했었으나 그 친구들과 안 좋은 계기로 절교한 뒤에는 한국인들 자체에 대한 환멸이 생겨 더더욱 외국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영어 실력이 나와 비슷하거나 낮은 비영어권 아이들과 자주 대화를 했으나, 시간이 지나며 그들의 실력은 더 이상 나의 실력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영어 원어민을 찾아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든 나는 교사들을 찾아다니며 영어 회화를 연습했다. 담임선생님과 음악선생님, 지리선생님, 심지어 교감선생님의 사무실에도 들어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눴다. 처음에는 나 같은 학생이 없었는지 이상하게 여기며 웃던 선생님들도 시간이 지나며 나의 노력을 인정해주셨고 내가 말하는 엉터리 수준의 영어에도 친절히 대답해주셨다. 이렇게 맨몸으로 부딫친 결과 영어센터 졸업을 앞두고 있을 시기에는 영어실력이 많이 향상되어 있었다. 선생님들도 상담때마다 영어로 끊임없이 대화하고 말하는 나의 열정을 칭찬했다.

진짜 산은 따로 있었다

영어센터에서의 6개월을 마치고 정식학교에 처음 입학하던 날 나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영어센터에서 맨몸으로 부딫쳐 영어 실력을 향상시켰으니 이 곳에서도 내 의지만 있다면 금방 호주인들의 사회에 섞여 적응하고 언어에도 익숙해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진짜 산은 따로 있었다. 학교는 영어센터와는 차원이 다른 곳이었다. 영어에 익숙하지 않았던 학생들의 학습속도에 맞춰 수업을 진행하던 영어센터의 배려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바쁘게 움직이고 일하는 진정한 호주 사회가 내 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 곳에서는 언어를 제대로 하지 못해 멈출 수 없으며, 그것을 핑계로 휴식이나 또 다른 길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영어센터에서 배운 기초적인 영어지식들로는 학교의 수업을 따라갈 수 없었기에 나는 끊임없이 공부하고 그들의 사회가 요구하는 보폭에 맞춰 열심히 쫓아가야 했다.

생존을 위한 영어 역시 한층 다른 차원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영어센터와 마찬가지로 이 곳에도 한국인이 없었다. 심지어 영어센터에서는 같은 반이 아니더라도 종종 보이던 한국 사람들조차도 찾아볼 수 없었고, 이는 곧 나를 지켜주거나 나의 곤경에 함께 나서줄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현실을 느끼고 나니 무서움마저 느껴졌다. 친구를 찾는 일도, 행복을 찾는 일도, 어려운 일 앞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도, 불리한 대우에 맞서 내 권리를 찾아야 할 때도 나 혼자 행동해야 했다. 물론 한국인들이 싫었기에 그들을 안 만나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내 편이 없다는 사실 자체는 무겁게 다가왔다.

호주 학교 수업을 완전히 알아듣는데 3년의 시간이 걸렸다. 초반에는 교실에 앉아 알아듣는 단어들을 공책에 적어 전체적인 문장의 뜻을 유추해 수업을 이해했다. 단어조차도 제대로 들리지 않아 옆 친구의 눈치를 보며 수업을 들었던 시간은 나에게도 심적인 부담이 컸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 문장씩 들리기 시작하자 잘 들리는 문장들을 떠올리며 수업내용을 이해했다. 그렇게 조금씩 이해의 범위를 넓혀나가다 입학 3년차에야 드디어 한 수업을 어떠한 중간과정 없이 완벽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가벼운 과제로 생각했던 수업을 이해하는 것도 높은 수준의 영어실력이 필요할 만큼 쉽지 않았다.

학습을 위한 영어보다도 나에게 더 절실했던 건 생존을 위한 영어를 익히는 것이었다. 영어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단순히 외톨이가 되는 건 물론이고 나에게 억울한 일이 닥쳤을 때 내 스스로를 변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영어센터에서 그랬던 것처럼 원어민 아이들에게 무작정 다가갔다. 그 아이들에게 영어로 끊임없이 대화하며 그들의 관심을 끌어내려 노력했다. 내용이 유치하든 유익하든, 문장이 문법적으로 얼마나 완벽하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최소한 그 아이들이 나에게 영어로 무언가를 물을 때 더듬거리며 대답을 포기하는 비겁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영어로 부딫치며 그들과 대화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원어민들은 엉텅이로 영어를 하며 그들의 관심을 끌려는 나를 외면하거나 비웃었고 심지어 일부 아이들은 나를 이용하고 괴롭힘을 가하기도 했다. '영어 때문에 삐에로 같은 행동을 하며 관심을 끌어야 하나?' 라는 자책을 스스로에게 해보았지만, 혼자 교실에 앉아 백인들의 신기한 시선만을 받으며 지내는 생활은 도저히 내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영어를 제대로 하지 못해 받는 불이익도 엄청났다. 억울한 일이 생겨도 나는 제대로 해명할 수 없었고, 종종 엉뚱한 단어를 사용해 거짓말쟁이로 몰리기도 했다. 한 호주 남자 아이가 나와 어느 정도 알고 지내던 그 아이의 여자친구와 도서관에서 우연히 마주쳐서 대화한 걸 스토킹으로, 내가 화가 나 욕설을 한 걸 모욕으로, 사과를 하기 위해 다가간 것까지 스토킹으로 몰아서 나를 교감에게 보고했을 때 나는 그 어떤 해명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한국인 통역사조차 지원되지 않은 상황에서 교감과 상담사는 나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쏟아내며 말할 때 나는 제대로 해명조차 할 수 없었다. 처벌로 이르지는 않고 경고로 끝났으나 억울하기 그지 없었다. 위에서 언급된 나를 이용하고 왕따를 가했던 아이들의 경우 내가 보고를 하고 도움을 요청했지만 학교에서는 그 아이들의 주장만을 받아들여 나는 아무런 도움이자 피해보상을 받지 못했다. 도움을 받으려고 찾아간 자리에서 인성에 큰 문제가 있는 문제아로 몰려 결국 그 아이들 앞에서 얼굴을 처박고 사과해야 했을 때, 그런 상황에서 부족한 영어실력 때문에 해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제 자신을 마주했을 때 그만큼 억울하고 살떨리게 분한 적이 없었다.

사실 생존영어는 지금도 나에게 숙제이다. 학문적인 영어는 노력과 과외를 통해 실력향상을 기대할 수 있다지만 생존영어는 특정한 과외나 교과서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 영어를 쓰는 사람들과 계속해서 대화하고 교류하며 실력을 늘려야 한다. 이 과정 속에서 수많이 실패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영어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신과 마주해야 한다. 6년동안 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왔지만, 여전히 영어는 나에게 어렵다. 호주에 온 지 시간이 조금 지난 시점에서도 교감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영어를 잘못 말해 거짓말쟁이로 몰리거나, 문맥에서 실수를 저질러 내가 예상한 것과 다른 해석이 나오는 등 언어적 어려움으로 인한 나의 고충은 현재진행형이다.

언어를 얻기 위한 고통은 당연하다

해외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언어문제를 놓고 고민한다. 언어문제로 인해 고충을 겪은 이야기는 평범한 것으로 취급될 정도로 매우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다. 사람에게 있어 소통과 대화가 무엇보다 중요한데 언어적 어려움 때문에 이걸 하지 못하게 된다면 사람은 스스로를 보호하는 장치가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억울한 상황이나 해명해야 하는 기회를 맞았을 때 제대로 하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나는 "부딫치라!" 라고 조언하고 싶다. 매우 간단하고 추상적인 말 같지만 언어적 장벽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의 모든 기초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이다. 비웃음과 무시를 당할 걸 두려워한다면 스스로의 심신에만 좋을 뿐 언어실력은 결코 늘지 않는다.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를 학습하는 건 엄청난 노력과 시행착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원어민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영어로 그들과 대화로 맞서야 한다. 그들에게 어떤 주제로든 부딫쳐라. 주제의 내용은 항상 심오하거나 전문적일 필요는 없다. 사람사는 곳은 똑같다는 말처럼, 어느 나라 사람이든 친구와의 대화에서 전문성을 찾지는 않는다. 그들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며 새로운 언어를 말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나아가 그들의 정서를 이해하고 정서에 맞는 영어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러한 과정들을 거치며 겪는 개인적 피해와 고통, 스트레스는 담대하게 마주하고 극복해야 한다. 언어와 소통이라는 인간관계의 중요한 요소를 외국어로 수행하는 과정은 결코 어려움 없이 완료할 수 없다.

난 모범생이 아니었기에 공부에만 집중하는 학생이 아니었다. 종종 공부와 학습에 있어서는 매우 불량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 비해 영어를 배우고 받아들이는 과정도 늦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나의 과정을 모든 이들에게 따르라고 절대 권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자랑스러운 건 내가 이 과정을 맨몸으로 부딫치며 극복해냈다는 사실이다. 최소한 원어민들과의 관계에서 언어적 평등을 이루고 그들이 더 이상 내 언어를 문제삼아 나를 저평가하지 않는 수준까지 내 언어 실력을 끌어올린 것에 큰 의미를 둔다. 여전히 내 영어의 수준은 부족하지만 언어적 평등을 이루어냈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게는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가장 안타깝게 여겼던 아이들은 바로 중국인 유학생들이었다. 중국인 유학생들에게 호주 학교는 사실 적응이 필요없는 천국이었다. 높은 중국인 비율을 자랑하는 호주 땅은 중국인들에게 다른 인종만큼의 적응 기간이나 현지화가 요구되지 않는다. 환경부터가 다르기 때문이다. 학교에는 중국인들을 위한 중국인 통역사가 항시 대기하고 있었고, 학교 교정을 돌아다니다 보면 중국인들을 발견하고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이런 환경 때문에 가장 인원이 많았던 중국인들은 항상 자신들끼리만 어울리며 놀았다. 그들의 배척성은 원어민들과 견줄 정도로 높았다. 같은 아시아인인 나도 중국 정서와 중국어를 모르니 그들의 사회에 들어갈 수 없었다. 자신들끼리 모여 중국어를 쓰고, 중국 음식을 나누어먹으며 자신들의 작은 커뮤니티를 만든 그들의 모습은 나에게 안타까움과 경멸을 안겨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외국 생활이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라는 한탄이 이들의 상황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들처럼 해외에서도 중국 문화와 언어 안에 스스로를 가두는 건 그들이 정신적으로 여전히 중국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더욱 기구해보였다. 중국인들 중에서 좋은 성적으로 높은 대학에 진학한 아이들은 많았지만, 유독 중국인들의 생존영어 실력과 현지 문화에 대한 이해는 다른 인종에 비해 떨어져보였다. 그들의 생활이 현지 문화에 대한 이해와 정서에 대한 의지조차 없는 폐쇄적인 생활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해외에서는 자신의 언어와 문화를 잠시 포기하는 걸 감내하며 원어민들과 마주해야 한다.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자신의 문화에 고립되어 있는 것 만큼 비효율적인 태도가 없다. 그들의 정서속으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 비집고 들어가려고 시도하며 그들로부터 언어적 평등을 얻어내야 한다. 이것이 이주한 해외 사회의 일원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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