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은 실수> 1픽셀과 불과한 점과 같은 '실수';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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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ama2010)등록 2021.03.04 07:56
시작은 이러했어요.
(사람 얼굴을 그리는데,) 앗, 실수, 그만 한 쪽 눈을 크게 그리고 말았어요.
(다시 고쳐보려고 했는데, 앗, 또 실수, ) 이번에는 다른 쪽 눈을 더 크게 그리는 실수를 했네요.

코리나 루켄 작가의 <아름다운 실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화가가 아니더라도 학창 시절에 그림을 그려본 사람이라면 코리나 루켄 작가가 보여주는 상황에 저절로 공감이 갈 겁니다.

제가 어릴 적 장래희망이 디자이너였어요. 그때만 해도 파는 연습장이 없어서 엄마가 갱지라고 하는 누런 시험지를 묶어서 연습장을 만들어 주셨지요. 몇 수십, 아니 학교에 들어가서도 꽤 오래도록 그렸으니 몇 백 권이 될지도 모를 그 갱지 연습장을 갖가지 옷을 입은 여자 사람들로 채웠습니다. 당연히 주변 사람들도 제가 자라서 '디자이너'가 아니라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학교에 가서 진짜 그림을 그리고 보니 제 생각처럼 되지 않았어요. 그럴듯하게 밑그림은 그렸는데 막상 색칠을 하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거예요. 수채화 물감은 어찌나 번지던지, 내 붓질은 왜 언제나 그어놓은 선을 불쑥 넘어가는 건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솜씨'를 자책하며 그림이랑 나는 인연이 없구나 하고 지레 포기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덕분에 옷감을 재단했을지도 모를 손으로 자판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실수 ⓒ 나는 별

 
실수가 만들어 낸 아름다운 그림 

그런데 코리나 루켄 작가는 다르게 그려진 사람 얼굴에 안경을 씌웠어요. 기발하죠. 짝짝이던 양쪽 눈이 안경 덕분에 두드러져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팔꿈치는 뾰족하고 목은 너무 길게 그려졌습니다. 그러자 작가는 이번엔 긴 목에 장식을 그렸어요. 나풀나풀 레이스와 쪼글쪼글 주름을 더했죠. 기형적이던 모습이 모딜리나니의 여인처럼 독특하게 느껴집니다. 
 
'와~ 괜찮은데요!'

<아름다운 실수>는 이렇게 실수 연발인 작가의 그림이 한 편의 아름다운 그림책으로 재탄생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겉표지를 열면 툭 하고 한방울 떨어진 잉크 자국이 보입니다.

작가는 이렇게 '본의 아니게' 떨어진 잉크 한 방울처럼 자신이 겪었던 실수 과정에서 이 책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합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실수'로 그림을 포기해버린 저와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첫 그림책으로 볼로냐 국제 아동도서전에서 수상한 코리나 작가는 참 다르네요.

한 아이를 그리며 실수를 반복한 작가는 아이에게 안경도 씌우고, 레이스와 주름으로 만든 옷도 그리고, 롤러블레이드도 신깁니다. 눈도 짝짝이고 목도 길고 둥둥 떠있는 아이는 신이 나서 노란 풍선을 들고 친구들에게 달려가는 아이로 '변신'합니다. 실수가 멋드러진 그림으로 '업그레이드' 된 것입니다.

아이가 날아가듯 들고 달려가는 노란 풍선들은 마치 실수에 대한 '훈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는 이의 마음조차 붕붕 띄워줍니다. <아름다운 실수>의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작가가 '실수'를 포기하지 않고 그림을, 그림책을 완성한 것이 고마워질 정도로 '아름다운' 아이들의 풍경을 만나게 됩니다. 
 

아름다운 실수 ⓒ 나는 별

 

실수, 우리의 존재론적 조건 

그런데 또 다른 그림도 있어요. 한 동물을 그렸는데, 개구리같기도 하고, 고양이 같기도 하고, 젖소같기도 하고, 정체성이 모호해졌네요. 그래서 코리나 루켄 작가는 거기에 덧칠을 해서 잎이 뻑뻑하고 컴컴한 수풀로 덮어버렸어요. 또 다른 동물은 바위로 만들어 버렸구요. 덕분에 애초에 작가가 무엇을 그렸는지 알아볼 수 없어졌어요. 

실수에 대한 대처가 다르죠? 물길을 바꾸듯 실수를 그대로 놔둔 채 보는 관점을 바꾸기도 하구요. 또 다른 하나는 그걸 완전히 덮어버렸어요. 점점이 뭍어있는 잉크 얼룩들이 하늘로 둥실둥실 떠올라 흩어지는 나뭇잎들이 되기도 해요. 판타스틱한 발상의 전환입니다. 

작가의 그림은 우리가 살아가며 저지르는 실수에 대한 우리들의 갖가지 대처 방식과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우리가 저지른 실수의 종류에 따라 그 '수습' 방식도 달라지겠지만, 대부분 '실수' 자체보다는 그걸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에 따라 실수에 대한 대처가 달라지지 않을까요? 

'다 된 밥에 코 빠뜨린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 '약빠른 고양이가 밤눈 어둡다', '홍시 먹다 이빠진다' 등등 실수에 대한 속담들이예요. 인터넷에 쳐보면 70가지가 넘는 속담들이 나와요. 동물, 음식 우리 삶의 모든 것을 끌어들여 '실수'를 경고합니다.

어디 속담뿐인가요. 사자 성어도 많고, 명언도 매우 많습니다. 말하고자 하는 바도 제 각각이예요. '돌다리도 두르려 보고 건너라'처럼 어떻게든 '실수'를 하지 않도록 독려하는가 하면,  '경험이란 사람들이 자신들의 실수에 붙이는 이름이다'라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실수', 자체를 우리 인생의 과정 자체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고전 중의 고전인 그리스 로마 신화는 달리 해석하면 무수한 신과 인간들의 '실수의 역사'가 아닐까 싶어요. 스핑크스조차 지혜로 이긴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한 채 '친부'를 죽이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지요.

음악가 오르페우스 역시 지옥까지 달려가 아내를 구했지만 그 아내는 실수로 인해 끝내 지옥의 문턱을 넘지 못합니다. 오늘날까지도 그리스 로마 신화가 대중적으로 '회자'되는 이유는 바로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실수'담들의 '서사성'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속담에서 부터 신화까지,  '실수'는 어찌보면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이 아닐까요?  하지만 존재론적 조건임에도 우리는 늘 그 '실수'로 인해 힘들어 하며 살아갑니다. 저처럼 몇 수십, 수백권을 그렸던 장래 희망을 '포기'하기도 하구요.  코리나 루이켄의 <아름다운 실수>는 바로 우리의 존재론적인 '조건'인 실수에 대해  '괜찮아, 괜찮아'하며 등을 두드려주는 거 같습니다. 

현대로 올 수록 '심리학'은 나를 얽어매는 무의식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아'의 의지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합니다. 나치의 포로 수용소와 같은 극단적인 외부의 상황조차도 극복할 수 있는 자신의 의지가 중요하다'는 마티 셀리그만이나, 선행한 사건자체보다 그걸 해석하는 '주체'의 의지가 사건의 결과를 달리 보게 만든다는 앨리스의 합리적 정서행동 치료(Rational Emotive Behavior Therapy)의 방향으로 발전을 거듭해 왔습니다. 

즉 그림책처럼 '실수'라는 객관적 조건을 '내'가 어떻게 해석하고 대응하는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가 있다는 것이죠. 정 이상하면 빽빽한 수풀로 덮어버릴 수도 있고, 안경을 씌우고 장식을 더해 풍선을 들고 달려가는 소녀로 만들 수도 있어요. 

하지만 무엇보다 <아름다운 실수>가 '아름다운' 책인 이유는 안경을 씌우거나 덧칠을 하는 데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림책은 장을 넘기며 조금씩 조금씩 '원경'으로 변합니다. 이상하게 그려져서 바위가 되어버린 동물도, 풍선을 들고 달려가던 아이도, 그저 멀리서 보면 나무가 있는 풍경 속의 작은 부분입니다.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마치 우리가 카메라의 풍경샷처럼 멀어진 그림 속 소녀는 점점 줄어들어 한 점으로, 그리고 다시 그 조차도 불분명한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보이나요? 이런 저런 실수들이'

토성을 돌고있는 우주선에서 찍은 사진에서 지구는 그저 밝게 빛나는 한 점에 불과합니다. 사진 상에서 1픽셀(사각형의 점으로, 디지털 화상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단위이다)에 불과하지요. 우스개같은 이야기지만 제가 살면서 처음 '인생무상'을 느꼈던 건 중학교 과학 시간이었어요. 우주 속에 지구의 존재에 대해 수치 상으로 보여주는데 참 그 지구에서도 작은 대한민국에 사는 '나'라는 존재가 참으로 하잘 것없이 느껴지더라구요.

'인생무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 역시도 1픽셀에 불과한 지구의 모습을 새삼 확인하게 되면 내가 '안달복달'하는 현실이 참 별거 아니게 느껴지며 '여유'를 찾게 되지 않던가요. 그처럼 이리저리 '실수'를 만회하던 그림들이 아름다운 풍경 속 한 부분인가 싶더니, 그 조차도 한 점인가 싶게 멀어지는 전경 속에서 우리가 '몰입'해 있는 '실수'에 대한 보다 너그럽고 여유로운 시선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내가 생각했던 '실수'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되지요. 다시 시작해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거지요. 그래서, 그림책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실수는 시작이기도 해요 

자꾸만 실수를 해서 그림을 포기하려 했던 시절의 저에게 이 그림책을 선물하면 어떨까요? 그 시절의 제가 이 그림책을 봤다면 어쩌면 지금쯤 저는 '자판'을 두드리는 대신 캔버스 앞에 앉아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실수를 한 자신에게 이 그림책을 보여주고 싶은가요? 부디 여러분의 실수는 저처럼 '타임머쉰'이 필요한 게 아니라 그림책이 말하듯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실수이기를 바래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개인 블로그 https://blog.naver.com/cucumberjh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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