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때 일이다. 시험 기간, 한 번은 눈덩이처럼 쌓인 과제를 완수하느라 꼬박 며칠 밤낮을 새운 적이 있다. 지칠 대로 지친 육신이 더이상은 못 버티겠다는 듯 이내 몸살이 찾아왔다. 하루 이틀이면 낫겠지 싶던 감기는 약도 들지 않더니 갑자기 몸에 두드러기마저 올라와 버렸다. 평소 알레르기도 없던 내게 나타나는 증상들에 덜컥 겁이 나, 잘 가지도 않던 병원을 곧장 찾았다. 병명은 명료했다. 면역력 저하에 따른 몸살 및 발진. 그깟 면역력 저하가 뭐라고! 처방받은 약과 함께 집에 돌아온 나는 면역력과 관련한 정보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당시 알게 된 사실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잘 알려져 있듯 백혈구의 주 업무는 외부에서 침입한 '바이러스'를 무찌르는 것이다. 문제는 외부에서 들어온 균이라 해서 모두 다 나쁜 균은 아니라는 것. 분명 우리 몸에 필요한 좋은 균들도 존재할 터. 가령 유산균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면역력 저하와 함께 약해질 대로 약해져 버린 백혈구는 나쁜 균, 좋은 균을 분별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곤 이내 모두 잡아먹어 버린다. 일명 몸 안의 군대란 작자가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지도 못하니 온몸에 말썽이 나는 건 당연했다. 어쩌면 방위군 입장에서 외부 침입자를 경계하는 건 당연한 이치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좋은 균마저 그저 '바이러스'로 인식해 모두 무찔러 버린다면 우리 몸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지 않은가. 우리의 백혈구가 소위 일 잘하는 군대가 되기 위해선 경계해야 할 대상과 기준을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할 터다. 내 몸 안에 똑똑한 백혈구들을 주둔시키기 위해선 스트레스나 과로가 금물이란 기사를 접한 뒤, 나는 백혈구들을 명분 삼아 몇 주간 마음 놓고 푹 쉴 수 있었다. 우리는 과연 똑똑한 백혈구들이었을까. 생각해보면 우리 또한 익숙지 않은 집단과 문화엔 일단 칼날부터 들이밀고 보는 오류를 범하며 살아간다. 나와 다른 이들을 향해 무조건 '바이러스'라 규정짓고 무찔러야 할 적으로 간주해버리는 고장이 난 백혈구처럼 말이다. 타국에서 건너온 이주민은 말할 것도 없으며 같은 뿌리에서 뻗어 나온 새터민마저 그렇다. 취향이 다르고 성적 지향이 다르고 정치관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바이러스'로 취급되는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 사회가 병들어가는 이유가 진정 그들이 아닌 못난 백혈구들 때문이었음을 짐작게 한다. 아마도 함께 살아갈 때 더 건강해질 수 있음을 간과했음이라. 그사이 자라나는 차별과 혐오란 진짜 바이러스를 인지하지 못한 채 말이다. 트렌스젠더 군인이 목숨을 끊었다. 지난겨울 비닐하우스에선 외국인 노동자가 죽어갔다. 장애인이란 이유만으로 누군가의 입시성적이 조작됐고 입학이 거부됐다. 나와 다른 건 모두 낯설다. 그렇다고 그 모든 게 바이러스는 아니다. 내 몸 안에 함께 있어야 할 아군들이며 이들이 함께할 때 나와 네가, 그리고 우리가 비로소 건강해진다. 이제는 동지를 알아보고 끌어안을 수 있는 똑똑한 백혈구를 만들어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몸살이든 발진이든 피할 수 있으니 말이다. 병든 나를 향해 묻는다. 나는 지금껏 과연 어떤 백혈구들이었는가. #바이러스 #팬데믹 #차별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