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머니와 아내와 딸을 생각하며 따사로운 봄볕으로 겨우내 얼어있던 흙을 비집고 파릇한 새싹이 수줍게 돋아나고 민들레, 라일락, 진달래, 개나리, 매화, 벚꽃이 지천으로 흐드러질 때면 꽃을 무척 좋아 했던 엄마가 생각난다. 이즈음 온 산엔 세상 부드러운 연한 녹색으로 맘을 설레게 하는 새잎이 하냥 순한 바람과 새살새살 희롱하고 군데군데 물감을 뿌려 놓은 듯 노오란 생강나무, 산수유며 산 벚나무. 개복숭아 꽃은 옅은 분홍으로 부끄럽다. 지금 이곳은 엄마가 본다면 좋아했을 많은 것들을 갖추고 있다. 언뜻언뜻 아련한 향기를 뿜어내는 사과 꽃을 얼마나 좋아 했을까? 군침 돌게 할 향기로운 두릅은 또 얼마나 좋아했을까? 1923년생인 엄마는 그 시대 여성들의 일반적인 삶을 사셨다. 그 잘난 아들타령에 딸 일곱에 맨 아래로 아들 둘을 두었던 외할아버지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꽤 많은 재산에 시조 꽤나 읊으시던 한량이었으나 내 엄마를 비롯해서 그 많던 딸들은 교육은커녕 혼기에 이르기 무섭게 출가시켜 버리고 나 몰라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버지와 사이가 좋았고 아버지가 가부장적이거나 권위적이지 않았으며 폭력적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 여성, 엄마에 강요된 관습이나 역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국가적으로는 일제강점기를 겪었고 내전을 감당했으며 전후의 궁핍을 온몸으로 견뎌냈던 세대로서 살아남기에 급급한 시대를 살았다. 그 시대에는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없었다. 그 후 우리는 많은 변화를 거치며 지금에 이르렀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치열하게 살았던 만큼 이제는 삶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새 길을 모색할 수 있을만한 위치에 이른 것 같다. 나는 인류역사에서 약자의 권리가 더디나마 꾸준히 신장되어 왔다고 믿는다. 앞으로도 그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특히 최근의 발달한 과학기술은 우리에게 거의 모든 면에서 전에 없이 다양한 선택지를 제시한다. 소외와 인권에 민감한 최근의 시대상황 또한 여성에게 전통적으로 부과했고 강제했던 많은 부분에 대해 근본적으로 새롭게 생각하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이 시점에 여성 또는 엄마에 대해 그들이 여성, 엄마가 아니라 그냥 동등한 한 인간으로서 그들의 인권을 부당하게 침해당하지는 않았는지 살펴야 한다. 그들이 오롯이 감당해 왔던 출산, 생리, 육아, 살림 등에 전과 다른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그 동안 인류가 이룬 지성, 철학, 과학기술 등 모든 성취를 이용하여 할 수 있는 또는 해야 하는 일들에 대해 일체의 제한 없이 창조적으로 임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동안 신성시해서 불가침 영역으로 거의 종교처럼 받들어 왔던 모성애와 육아에 대해 새롭게 논의를 시작해야한다.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성별을 선택해서 태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태어나는 순간 그 사회의 성역할이 강제된다.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남자다. 나는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여자로 태어났으면 좋았겠다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군대에서 조차도 . . . 우리아이들 세대는 다르다고들 한다. 하지만 글쎄다. 지금의 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거의 평생 이어지는 "생리" 그 번거로움, 그 고통, 그 부자유. . . . 사회적으로 갖은 미사여구로 포장되고 장려되고 있지만 임신과 출산, 몸의 변화, 부자유, 불편함 등 표현 불가한 육체적 고통 . . . . 지금은 많이 분담되고는 있지만 인성이 나쁜 상대가 자기의무를 다하지 않았을 때( 현재는 그런 사람이 남자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 일방적으로 책임지게 되는 육아, 교육 . . . . 이런 요소들은 여성의 삶을 크게 제약해 왔다. 하지만 나는 그 중 단 한가지만이라도 온전히 감당할 자신이 없다. 아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런 면에서 나는 많이 부끄럽고 무책임하다. 그렇다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나는 도망 갈 테다. 이러한 여성의 고통이 제거된 미래세계를 헉슬리는 1932년 발표한 그의 책 "멋진 신세계"에서 끔찍한 디스토피아로 묘사하고 있다.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고 필요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요약 "물건을 찍어내듯 공장에서 체외수정으로 배아를 만들고 기계장치 안에서 배양액으로 성장시킨다. 10개월 후에는 양육기관에 의해서 아이의 타고난 신분에 따라 차별화된 방법으로 훈련시킨다. 아이들은 시험관수정시에 유전자조작으로 질병을 제거하고 신분에 따른 지능을 부여받으며 그에 합당한 육체능력을 받는다." 인용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1932년 ( 한정효, 소담출판사 ) p32~33 "10만개의 밀도에 이르는 육수에서 10분 후에는 그릇을 어떻게 들어 올려 내용물을 다시 검토하고, 혹시 수정이 안 된 난자가 하나라도 있으면 어떻게 그것을 다시 액체속에 담그고, 필요하다면 또다시 담그고, 수정이 된 난자는 어떻게 다시 인공부화기로 옮기는지를 보여주었다." p44 "그 까닭은 물론 굉장히 많은 경우 임신은 귀찮은 현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p59 "너희들도 틀림없이 잘 기억하겠지만 추악한 모체태생으로 생식이 이루어지던 그 시절에는 아이들이 국립 습성 훈련 본부가 아니라 항상 부모의 손에서 자랐단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를 발표한 동시대에 히틀러는 우생학이라는 사이비과학으로 유대인, 장애인, 동성애인을 말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헉슬리가 우려하던 일이 현실화 된 것이다. 그 당시 헉슬리의 문제의식은 옳았다. 하지만 지금도 전적으로 옳을까? 결론적으로 부분적으로만 옳다고 할 수 있다. 과거와는 달리 지금의 우리가 맘만 먹으면 그러한 불합리, 부정의에서 다음 세대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육아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이루고, 불완전하고 변덕스러운 부모 더욱이 폭력적이기 까지 한 부모에게 친권이라는 미명하에 아이에 대한 전권을 인정해야하는지, 더구나 자격미달의 부모에게 양육되는 아이의 인권에는 어찌 대처할지. 요즘은 인터넷에 온갖 흉측한 뉴스가 난무한다. 어린 부부가 게임에 빠져 아기를 방치해 숨지는가 하면, 의붓자식을 모질게 학대해서 죽이기도 하고, 입양한 아이를 때려서 숨지게 하고, 어떤 10대 미혼모는 공중화장실에서 아이를 낳아 유기하기도 하는 등, 무능력한 아이에 대한 무능하고 책임감과 인간적 감수성이 부재한 부모의 범죄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내가 내 부모를 선택하지 않았듯 부모 또한 나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주어졌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아주 저급하고 몰상식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어떤 선택권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유복한 가정을 가진 아이에 비해서 현저하게 부당한 환경에서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게다가 생물학적 부모로부터 전해지는 열등한 유전자까지 감수해야 한다. 인류의 삶에 등장한 모성애의 전설은 또 어떠한가? 요즘 심리학 또는 교육관련 책을 보면 5세 이전의 아이에게 부모의 사랑이 그 아이의 인생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고 하면서 그 시기의 아이를 가진 부모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있으며 이 기준에 못 미치는 부모, 특히 엄마에게 엄청난 죄의식을 심어주고 있다. 혹자는 동물과 비유하면서 개, 돼지와 같은 짐승들도 자기 새끼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모성애가 있다면서 그렇지 못한 인간을 비난한다. 하지만 자연계에도 새끼를 유기하는 사례는 차고 넘친다. 그런 경우에 사람들은 그 원인이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서 그 원인을 합리적, 과학적으로 규명하여 원인을 제거하고자 한다. 하지만 인간에 대하여는 인간성에 대한 비난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한다. 사람 같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면 끝이다. 그에 더해 둘 이상 자녀가 있는 여성이 모성애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신의 경지는 저리 비켜야 한다. 우리는 둘 이상의 자녀가 있는 경우 편애 없이 사랑한다고, 꼭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그럴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것이 현실이다. 어떤 부모는 자식사랑보다 일이나 취미 등 자기생활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실을 부도덕하거나 무책임하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럼 이런 경우도 생각해 보자. 우리는 독립투사나 일상에서의 의인들이 자기의 안위나 가족을 희생한 많은 예를 알고 있다. 그들에게도 부도덕하다고 할 수 있을까? 경우가 다르다고? 정말 그럴까? 그 외에도 생래적으로 자식사랑이 열렬하지 않은 사람들은 얼마든지 존재하는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자식사랑을 강제할 어떤 실제적인 방법도 없다. 그저 무력하게 그러면 안 된다고 호소하는 것 이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을까? 그들에게 도덕적 훈계를 하기는 쉽다. 그리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게 문제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바탕에서 해결책을 모색해야한다. 또한 현실적 생활고 때문에 아이를 제대로 보살필 수 없는 경제적 약자가 존재하고, 정신적, 육체적 불편으로 인해 의도와는 달리 아이들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모든 경우를 아이의 운과 부모 탓으로 돌리는 사회나 국가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우리가 더불어 제대로 된 삶을 지향 하고자 한다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시야를 지금보다는 더 크게 넓혀야 한다. 사람에 대해서도 개별적 인간성에 전적으로 기댈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행한 이유를 합리적이고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그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처방함은 물론 그들에 의한 2차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들의 잘못된 행위를 사회 또는 국가에 돌려 그 들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게 아니다. 그들의 범죄는 단죄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거기에서 끝나면 안 된다. 아무런 죄 없는 아이들에게 그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됨은 물론 무지와 무능력으로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들에게 좀 더 나은 삶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모성은 개개인의 자질, 성향, 환경에 따라 다르게 발현되지만 우리는 막연하게 이상적으로 발현된 모성을 전제로 생각하고 믿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겉으로는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가정의 경우에도 우리의 아이들은 잘못된 애정에 노출될 위험이 상존한다. 마마보이, 파파걸로 일컬어지고 있는 사회현상이 그 예이다. 아이에 대한 지나친 소유욕, 통제 등으로 구속하는 더 나쁜 예도 많다. "낳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 . ." 로 시작되는 어머님 은혜라는 노래가 5월이면 도처에서 울려 퍼진다. 그 외에도 어머니의 사랑 관련한 미담은 세상 어디에나 넘쳐난다. 기념일이나 노래, 미담은 나쁜 의도에서 만들어 지지는 않았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의도에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엄마, 또는 여성은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고 강요하는 측면이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온갖 고통과 짐은 여성에게 떠넘기고 거기에 더해 성스런 어머니의 역할까지를 부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인간도 상대를 이런 모진 덫에 가둘 권리가 없음은 물론 갇혀서도 안 된다. 게다가 출산의 고통이 모성을 더욱 완전하게 한다니. 모성애의 상대성, 다양성과 인간의 불완전함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만이 우리를 그에서 구원할 수 있다. 그래야만 인간 모두에게 바람직한 삶의 모습을 전망할 수 있다. 우리가 모성애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까지는 출산, 육아, 생리 등 주로 여성 관련 문제들은 그저 운명이려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현재의 우리는 그런 점이 얼마나 부당하고 불공정한가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다. 개별적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일임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개인적문제로 치부함으로써 사회와 국가는 애써 외면해 왔다. 물론 그러한 제반문제를 개인적으로 감당할 수 있으며 가치관과 취향의 문제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최대한 그 뜻을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문제들에 대응할 능력이 부족하거나 능동적으로 받아들일 적극적 의사가 없을 경우 지금의 우리사회, 국가는 각 개인이 다양한 선택지를 가질 수 있도록 국가차원에서 복지제도에 반영하여 제도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과 의지가 있다고 믿는다. 출산장려책에 앞서 우리 모두가 깊이 생각하고 합의해야할 문제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부당한 제약이 제거 된 탄탄한 기반아래 자유롭게 역량을 발휘하여 맘껏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모성애 #생리 #출산 #임신 #여성성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