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의 수술이 남긴 흔적

새옹지마 혹은 전화위복을 새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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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광석(kshong25)등록 2021.05.07 10:46
네 번의 수술이 남긴 흔적
새옹지마 혹은 전화위복을 새기며
 
 
지난해 연말 몇 년간 미루었던 '고원(故園)의 강'이라는 제목의 장편소설을 탈고했다.
민족 분단이 개인에게 미친 영향을 담은 장편소설 '회소곡(懷巢曲)'을 탈고한 지 거의 20년 만의 일이었다.
처음에 '고원의 강'은 일제 강점기부터 현재까지 민족의 수난과 분단의 고통과 전쟁의 비극에서 한 개인과 그 가족의 생존과 소멸을 상하권 정도의 분량으로 다룰 예정이었으나, 암이라는 예기치 못한 복병을 만나 몇 번의 수술과 후유증에 시달리면서 소설에 집중할 수 없었다.
2020년 완치판정을 받고 새로운 마음으로 도전하였으나 이미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또 자료의 부족과 기억력의 감퇴 등으로 인해 원래의 구상을 접고 말았다.
그래도 다른 글을 접은 채 기억을 짜 맞추고 보이지 않은 눈을 비비며 2020년 하반기는 마음 앓이를 심하게 했는데, 호랑이를 그리려다 고양이를 그린 꼴이 되었으나 12월 30일 '고원의 강'이라는 소설을 단행본으로 출간할 수 있었다. 참고로 고원은 동심(童心) 아니면 찾아갈 수 없는 고향의 다른 이름이며, 우리 가슴에 품고 청산(靑山)이라는 이상향이다.
 
소설을 읽지 않은 시대라고 한다.
두 권의 책을 냈다고 하지만 알려진 작가도 아니다.
그래서 고원의 강은 내 인생의 한 매듭을 일단락했다는 사실과 공감해주는 몇 사람이라도 있다면 다행이라는 마음으로 욕심 없이 지방의 출판사에서 출간하였는데 읽은 지인들이 가족의 소중함과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알 수 있었다며 좋은 반응을 보였기에 감사했다.
특히 두 아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책을 나누고 권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비의 애쓴 노력을 자식들에게 인정받은 것 같아 귀한 보상으로 여긴다.

작가에게 자신의 책을 냈다는 사실은 자랑이다.
더구나 지인들의 호감을 담은 평을 듣는다는 사실은 기쁨이요 보람이다.
그런데 막 노년의 기쁨을 챙기는 와중에 뜬금없이 내 인생에서 네 번째 수술대에 오르게 되었으니!
오전까지도 산에 다녀오고 집안의 쓰레기도 치우는 등 탈이 없었는데 오후 5시경부터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면서 아랫배가 찢어지는 듯 아프기 시작하였다.
전에도 장 폐색현상이 나타나 응급실에 간 적이 있기에 119를 신청하여 가까운 병원의 응급실로 갔으나 진통제만 놔주고 괜찮을 것이라고 했으니!
한마디로 경험 없는 의사가 문제였다.
1월 14일 밤을 엎치락뒤치락 엄청난 고통 속에서 잠을 못 이루고 다시 119를 불렀더니 또 다른 문제는 코로나19였다.
이미 진행된 염증으로 인해 몸에 열이 심하다는 사실 때문에 일단 코로나 검사부터 해야 된다며 받아주는 병원이 없었기 때문이다.
1월 15일 오전, 집에서 가장 멀리 있는 병원으로 갔더니 먼저 음압실로 집어넣고 코로나 검사부터 하겠다고 했다.
그즈음 나는 정신도 혼미하여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의사들이 어떤 조치를 했는지 기억할 수 없다.
 
아내의 말로는 생전 처음으로 악을 쓰면서 "어제까지도 열이 없었다. 잘못되면 어떻게 할 거냐?"라고 막무가내의 모습을 보였더니, 마침 지나가던 의사가 듣고 나를 다시 검진하고 "맹장 아니면 담낭에 문제가 있을 것 같다"는 말을 하면서 신속하게 시티촬영을 하고 수술을 서둘렀다고 했다.
담낭 결석으로 담낭은 이미 괴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코로나 환자로 의심하여 시간을 끌고 있었으니!
코로나 때문에 병원에서 거부당해 고생을 했고, 자칫 큰일을 당할 수도 있었던 사례 아닌가 싶다.
 
담낭은 배 안의 간 부근에서 소화 기능을 돕는, 우리가 흔히 쓸개라고 부르기도 하는 인체의 기관이다.
많은 사람의 쓸개에 결석이 있는데 고통 없이 그냥 넘어가는 사람도 많다고 했다.
쓸개를 떼어내도 생존에는 지장이 없으며 실제 쓸개를 떼어낸 사람도 많다고 했다.
결석은 쓸개에 돌이 쌓인 현상을 말한다.
결석의 원인은 여러 가지라고 하나 나의 경우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었다.
결석은 가족력으로 인한 유전적인 요인이 아니라 식습관으로 인한 문제라고 하는데 어떤 음식이 문제라고 꼭 집어 말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아무튼 예전부터 하는 짓이 조금 맹한 사람, 사리에 맞지 않은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쓸개 빠진 사람!"이라고 놀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암으로 직장(直腸)을 잃고 이제는 더하여 쓸개 없는 사람이 되었으니!
 
조금만 늦었더라면 쓸개가 터져 복막염이 될 뻔했다는 말도 들었으나, 다행히 수술이 빨랐고 경과도 좋아 1월 22일 퇴원하였다.
하지만 암이 완치되어 다행으로 여겼던 나에게 네 번째 전신마취 수술은 그야말로 자존감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을 보는 사건이었다.
우선 배를 건드린 탓인지 그렇지 않아도 잦았던 변의 횟수는 더 증가하였고, 멈추었다고 안심했던 변 지림까지 경험했으며 몸의 상태도 빨리 회복되지 않았다.
자꾸만 눕고 싶었고 앉았다가 일어나는 동작도 힘들었다.
소파에 앉으면 왜 그렇게 비실비실 잠은 오는지!
바깥일을 할 수도 없었지만 몸을 움직이는 것도 귀찮고 걷는 운동도 게을러졌다.
물론 적잖은 나이 탓도 없지 않겠으나, 평생 감기도 안 걸리고 사는 사람도 있다는데 그렇지 못한 나의 노년이 참 불운하다는 한탄을 멈출 수 없었다.
다만 뼈가 시리게 인생이 허망하다고 생각했던 점이나, 가슴 저리게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성과였다.
 
인생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은 예측할 수 없다고 하는 새옹지마(塞翁之馬)의 뜻과 유래를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암 판정을 받고 수술했던 과정이 불운이었다면 완치판정을 받고 준비했던 책을 출간했던 과정은 다행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결석으로 인한 고통은 여인들의 산고보다 더 심하다고 했는데, 비록 쓸개를 떼어내는 화를 당하게 되었으나 수술의 경과가 좋았던 과정을 겪으면서 나는 여러 번 새옹지마의 고사를 떠올렸다.
2021년 1월부터 3월까지 내 인생의 시간은 그렇게 흘렀다.
 
이제 수술의 자국은 아물었다.
텃밭의 쟁기질은 이웃에게 맡겼으나 거름을 내고 이랑을 만들고 멀칭을 하는 일도 남의 손을 빌리지 않았다.
이미 생강은 두 두둑을 심었고 엊그제 비가 오기 전날에는 고추 오이 옥수수 가지 호박 모종도 심었다.
비록 일의 속도가 느리고, 수레에 20kg 퇴비를 4포를 싣고 달리던 예전에 비해 겨우 절반인 2포를 싣고도 힘들지만 그래도 일을 할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리고 밤이면 다시 글쓰기도 한다.
문장의 가닥이 챙겨지지 않고 단어조차 막히지만 글 쓰는 작업은 나를 찾고 삶의 의미를 확인하는 멈출 수 없는 운명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곧 고구마를 심고 마늘 양파 완두콩을 수확하면 여름은 깊어질 것이다.
그러면 농사의 이야기도 몇 편의 글로 쌓일 것이다.
 
정원의 꽃들도 자꾸 바뀌고 있다.
수선화와 철쭉의 계절은 지나갔고 불두화 설구화에 이어 아이리스와 작약이 약동하는 자태를 자랑하는 중이다.
아침마다 아내가 심고 가꾼 하설초, 구봉화, 꽃양귀비, 붓꽃, 바람꽃, 구름국화, 아도니스, 프록스, 미니 마가렛, 오점네모필라, 포피, 위실, 아마플렉스 그리고 내가 아직 이름을 외우지 못한 숨은 꽃들을 만나 기쁨을 얻는다.
이미 꽃은 지고 그 꽃자리에 열매를 키우는 자두 매실 보리수 뽕나무에서 생명의 순환을 보고, 아직 꽃은 없으나 싱싱하게 물이 오른 백일홍과 감나무와 수국을 보며 힘을 얻는다.

물 흐르듯 순탄한 인생은 흔하지 않다고 한다.
나 역시 앞으로 어떤 길흉화복을 겪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다만 이제는 지난날을 돌아보는 시간을 줄이고자 한다.
되돌릴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는 화가 복이 될 수 있다는 전화위복(轉禍爲福)이나 고통이 다하면 좋은 날도 오리라는 의미의 고진감래(苦盡甘來)를 기대하지 않으려 한다.
호사다마(好事多魔)요 흥진비래(興盡悲來)도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꽃 이름을 듣고도 돌아서면 잊는다고 안타까워할 일은 아니다.
간밤 꿈속에 만난 사람의 얼굴도 이름도 아득히 사라지는 사실로 세월을 탓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미 망각의 강가에 이른 나이를 자각하고 망각에 익숙한 존재임을 인지하면서 오늘 최선을 다하고, 정신 줄을 놓기 전까지 소소하게 사는 이야기를 쓰면서 여생을 보낸다면 크게 화(禍)를 당하거나 슬픔을 맛볼 일 없이 마음의 평화를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오늘도 '마음의 행로'라고 명명한 정원의 둘레 길을 걸으며 그런 생각을 해본다.
 
기후 변화로 인한 지구의 재앙이 잦다는데 힘없는 사람들이 해를 입는 일이 없기를 기도한다. 2021.5.7.
 
덧붙이는 글 다음 카페 '대직방'과 '암싸사'에도 실을 예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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