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한 소녀만을 위해 살았던 클라라의 인생

가즈오 이시구로 소설 <클라라와 태양>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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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미(gracecho)등록 2021.05.24 10:17

*K
K는 오직 J만을 위해 살기로 결심한다. J를 위해 헌신하고, 오로지 J의 행복을 위해 평생을 바치는 것이 K가 생각하는 자신의 운명이었다. K는 J를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이 위험에 처하는 것도 기꺼이 감수할 태세였다.
 
J는 14세의 소녀. 엄마의 바람대로 그녀는 더 향상되기 위한 유전자 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수술의 부작용으로 몸이 나빠졌다. 위급한 상황이 종종 발생하고 가족은 큰일이라도 날까봐 초비상이 된다. J의 언니는 수술의 부작용을 일찍 겪었고 안타깝게 죽고 말았다.
 
K는 J의 친구로 선택되었다. K는 자신을 선택해준 J가 고마웠고, J를 위해서라면 뭐든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같이 살기 시작한다. J의 집은 도시 외곽의 조용한 들판에 있고 근처에는 이웃집 한 채만이 있을 뿐 조용한 곳이다. 이웃집엔 K의 어릴 적부터의 친구 R이 엄마랑 살고 있다. R은 향상되지 못한 친구라서 좋은 대학을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 둘은 서로를 사랑하지만 서로 처지가 갈려 과연 미래를 함께 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가즈오 이시구로
2017년 노벨문학상은 가즈오 이시구로에게 돌아갔다. 노벨상위원회는 '소설의 위대한 정서적 힘을 통해 인간과 세계를 연결하고, 그 환상적 감각 아래 묻힌 심연을 발굴해 온 작가'라는 평과 함께 그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정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1954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나고, 다섯 살때부터 부모를 따라 영국에 이주해 살고 있다. 1982년 <창백한 언덕 풍경>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총 8권의 소설을 꾸준히 발표해왔다.
 
그의 작품은 고루 다 좋은데, 1989년 발표한 <남아 있는 나날>과 2005년 <나를 보내지 마> 등은 잘 알려져 있고 둘 다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올해 그를 아끼는 독자들의 기대 속에 출간된 책이 <클라라와 태양>이다. SF 소설인데, 마찬가지로 SF 소설인 <나를 보내지 마>와 비교해서 보면 더 재미있다.
 
<나를 보내지 마>에서는 지나온 시간을 회상하며 삶과 사랑에 대해 차분하게 들려주는 주인공 캐시 H가 있다. 간병인으로 일하는 그녀는 아직 20대의 젊은 나이인데 벌써 사랑하는 친구들이 많이 죽었고, 그녀 역시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여느 십대처럼 미래의 삶을 위한 소망과 꿈을 간직하고 살아왔던 캐시, 사랑하는 남자와 좀더 삶을 나누고 싶은 바람, 그러나 그녀에게도 그녀의 애인에게도 시한부의 삶만 허용되었다.
 
<클라라와 태양>에서는 십대 아이들에게 인공 친구로 판매되는 로봇이 주인공이다. 클라라 역시 태어나는 순간부터 매장에서 십대 아이에게 친구로 '선택'되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매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진열되어 서 있다. 주로 등급이 높은 신분의 엄마나 아빠들이 아이를 데리고 에이에프 (artificial friend)를 골라 구매해주기 위해 매장으로 찾아온다.
 
클라라는 태양을 주 에너지원으로 하고, 보조적으로 화학물질들이 그녀에게 삶을 부여한다. 클라라는 조시라는 소녀의 AF로 선택되어 함께 살게 되지만, 조시가 대학생이 되자 폐기된다. 클라라는 여전히 태양이 빛나는 드넓은 야적장에서, 살아온 기억을 회상하며 삶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다. (태양이 있는 한 그녀의 삶은 언제 끝날지 모르겠다.)
 
클라라의 '삶과 죽음'이라고 하니 과장이라고 여길지 모르겠다. 그러나 클라라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생각을 가지고 있고, 감정을 익히고 배워간다. 그녀는 사랑과 고통, 불안과 그리움도 느낀다. 누구보다도 공감 능력이 큰 클라라는 주변 사람들에게 다정하고, 늘 최선을 다해 돕는다. 심지어 조시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기도 한다.
 
캐시 H는 인간들을 위한 장기 기증의 목적으로 태어난 클론, 클라라는 인공 친구이다. 이들은 여느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이란,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 캐시와 클라라에게 이른 죽음이라는 운명을 부여한 인간들은 무슨 권한을 가진 것일까.
 
*태양
클라라는 세상에 나온 순간부터 태양을 매우 좋아한다. 해를 조금 더 보고 싶어하고, 해에게 마음 속으로 말을 걸기도 하고, 나중에는 해에게 간절히 기도하기도 한다. 태양은 그녀의 하느님이나 다름없다.
 
조시를 구하기 위해 클라라는 공해를 유발하여 세상을 나쁘게 만드는 쿠팅스 머신을 없애기로 마음먹는다. 순진한 그녀는 세상에 얼마나 많은 쿠팅스 머신이 있는지 모른다. 그저 그녀가 거리에서 본 그 기계 하나를 부순다면, 세상을 좀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 믿고 있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

가즈오 이시구로는 담백하고 조용한 어조로 클라라나 캐시 H같은 태어나면서부터 약자로 태어난 존재들에 대해 이야기를 전한다. 표면적으로는 그들의 삶과 사랑을 말하지만, 그 안에는 우리 사회와 문명에 대한 촘촘한 비판의 목소리가 배어 있다.

미래 사회인데도 여전히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애쓰는 이들, '등급'으로 인간들이 나뉘어지고, 과학 기술로 '향상'되었는지 안 되었는지에 따라 차별하는 사회, 환경오염과 개발, 자본주의의 논리가 여전히 우세한 사회…
 
야적장에 폐기되어 홀로 지나온 기억을 더듬는 클라라, 어느 날 우연히 매장에서 그녀를 판매했던 매니저가 찾아온다. 클라라는 매니저에게 자신의 경우 '일이 잘 풀렸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매니저가 떠나며 자신을 한 번 더 돌아봐 주길 기대하지만, 매니저가 바라보는 곳은 '건설용 크레인'이다. 우리들은, 우리 사회는 어디로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일까. 책을 덮고 나면 두고두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매니저가 나를 쳐다보려는 줄 알았다. 하지만 매니저는 저 먼 곳, 지평선 근처 건설용 크레인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다시 가던 길을 갔다. (<클라라와 태양> P444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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