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만 되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얘기처럼 옛날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옛날이 실존의 시대인지도 알 수 없고, 어떤 시대에 정말 그런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있었는지도 분명하지 않지만 내가 학생이던 때엔 정말 선생님의 그림자를 거의 밟지 않았다. 존경의 마음은 아니었다. 단지 밟고 싶어도 밟을 수가 없었다. 선생님들이 다니는 곳에 학생인 내가 갈 수가 없었으니까. 교사용 화장실, 교사용 식당, 교사용 휴게실, 교사용 테니스장 등 학교엔 학생들이 갈 수 없는 곳이 많았고 그 옆을 지나가다 쳐다만 봐도 혼이 나기도 했다. 학생들이 그곳에 갈 수 있는 때는 정해져 있었는데, 청소할 때뿐이었다. 테니스장에서 테니스는 칠 수 없었지만 눈이 오거나 비가 오면 소금을 뿌리러 가곤 했고, 교사용 휴게실에서도 쉬어 본 적은 없지만 교사들의 원활한 휴식을 위해 재떨이를 비우고 쓰레기통을 비웠다. 학생용 휴게실은 없는데 교사용 휴게실은 있는지, 도대체 왜 그렇게 교사만 쓸 수 있는 공간들이 많은지에 대해 별로 의문을 가진 적도 없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늘 그랬을 뿐이었다. 적어도 그런 공간들은 아예 교사들만을 위한 공간이라고 하니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교사용이라고 쓰여 있지도 않으면서 학생은 갈 수 없게 한 공간까지 있는 것은 정말 그 당시에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현관은 말 그대로 현관이고 출입구였을 뿐인데 선도부가 지키고 서 있으니 중앙현관으로 갈 수가 없어서 빙 돌아갈 때마다 내가 왜 돌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가 없었고 왜 돌아가야 하냐고 따져 물으면 답은 대개 둘 중 하나였다. 규칙이라고 하거나 때리거나. 중앙현관, 중앙계단, 교실의 앞문은 중학교에서나 고등학교에서나 늘 교사들의 것이었고 학생이 탐을 내면 큰일이 날 것처럼 반응했다. 으레 학생들은 알아서 피해가거나 교사가 없는 틈을 타 중앙을 탐내볼 뿐이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그건 너무 옛날얘기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며칠 전, 한 학생이 페이스북에 '왜냐고'라고 쓰고 공유한 글을 봤는데 90년대생이면 다 아는 사실이라며 '중앙계단 학생이용금지'라는 글과 사진이 있었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그렇게 '왜냐고'라고 쓴 학생도 정작 등굣길에 중앙현관을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옛날처럼 중앙현관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있지는 않지만 등교 지도를 한다는 핑계로 교장실과 먼 가장자리 계단 쪽으로 학생들의 등굣길의 입구를 정하고 중앙의 입구는 (이름은 멋있게 바꿨지만 역할은 그대로인) 선도부 학생이 지키고 있다. 그리고 학생들은 중앙현관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이유도 모른 채 출입을 금지당하고 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교사만 쓰는 휴게실이 있고 화장실과 식당은 교직원용과 학생용으로 나뉘어 있다. 교실 앞문을 쓴다고 혼내는 교사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학생들은 뒷문을 주로 이용하고 있다. 지체 장애인 학생의 등교를 위해 교육청 지원사업으로 엘리베이터는 대부분 학교에 설치되어 있지만 엘리베이터가 장애인만 타라고 만든 것도 아닌데 학생들은 다리를 다쳤다는 확인을 받아야만 이용할 수 있다. 행여나 학생들이 몰래 엘리베이터를 탈까 봐 카드키 장치를 다는 학교도 있다고 하는데 교사들은 잘도 탄다. 학생들에겐 장애인용이라고 하면서 내리라고 하지만 사실은 교사용 엘리베이터인 셈이다. 원래 엘리베이터는 엘리베이터일 뿐이다. 장애인용 엘리베이터란 것은 없다. 그러니 교사도 다리가 아프든 아니든 탈 수 있고 학생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학생이 타려고 하면 장애인도 아니면서 왜 타려고 하냐는 말을 하는 교사들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다. 왜냐면 난 장애인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장애인 인권에 대해 훈수를 두는 교사를 보면 여기 장애인은 나밖에 없으니 다 내리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이렇듯 화장실, 휴게실, 엘리베이터 등 교사들과 학생들이 분리된 채 생활하는 모습을 매일 보다 보면 내가 학생이던 시절의 이야기가 다 지나간 옛날의 얘기라는 생각이 들 수가 없다. 예나 지금이나 학교가 생긴 이래 한 번도 학교는 학생들을 위한 공간으로 존재했던 적이 없었고 학생들은 항상 2등 시민으로서의 공간을 허락받고 사용했을 뿐이다. 이 정도 얘기를 해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요즘 교사들이 학생들과 분리된 공간을 원하는 것은 옛날처럼 학생들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냐고. 특히 여자 교사들은 학교에서 학생보다 약자일 때가 있으니 안전을 위해서라도 교사용 화장실은 필요하다고 하기도 한다. 그럴듯한 이유이다. 학생에 의해 성희롱을 겪은 피해 교사가 있기도 했으니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말을 들으면 공간 분리가 납득이 되거나 공감되기보다는 1960년 이전의 미국이 떠오른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노예가 해방되자 미국 백인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흑인과 분리될 방법을 고안했다. 초반에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된 것은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에게 성폭력을 당하는 영화를 통해 백인들의 공포심을 유발하는 것이었다. 노예 신분이어서 그동안 교육을 받지 못했기에 흑인들은 아직 미성숙하고 본능에 충실한 상태, 즉 동물과 같은 상태라고 보았고 그런 통제 불능의 대상과 공간을 함께 사용하면 얼마든지 위험해질 수 있다는 논리였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백인 여성이 흑인 남성의 폭력에 노출되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단 한 건의 사건만 있어도 공포심을 주기엔 충분했다. 백인들이 가진 공포심이 너무 커지고 그로 인해 차별과 폭력도 심해지자 흑인 사회에선 교육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미성숙하다거나 폭력적이라는 편견을 이겨내기 위해 흑인 학생들을 위한 학교를 만들었다. 그러자 백인들은 짐 크로법이라고 불리는 '분리되었지만 평등한' 분리정책을 내세웠다. 백인용 화장실만 있다면 문제가 있지만 흑인용 화장실도 있으면 충분하지 않냐는 논리였다. 그렇게 화장실, 식당, 호텔이 나뉘었고 버스의 자리도 나뉘었다. 그런데 어느 것도 흑인용이 더 쾌적하지 않았다. 결국, 분리되었기에 평등할 수가 없었다. 교사들에게 흑인과 백인의 분리정책에 관해서 얘기하며 학교 안의 학생과 교사 공간의 분리에 관해 얘기하면 어떻게 흑인과 학생을 비교하냐며 자신들은 백인들처럼 학생을 차별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흑인을 차별할 때 쓰던 말과 학생과 교사를 구분 지으며 쓰는 말은 신기할 정도로 닮아있다. 학생은 아직 어려서 미성숙하다는 말은 흑인들이 교육받지 못해 미성숙하다는 말과 다를 바 없고, 학생들은 아직 이성적인 사고능력이 발달하지 않아 사리 판단이나 폭력성을 통제하기가 어렵다는 말과 흑인들은 아직 문명화되지 못해 동물적으로 행동해서 위험하다는 말도 다를 게 없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닮아있는 것이 있다면 백인용이 항상 더 좋았던 것처럼 학교에서도 교사용이 항상 더 좋다는 점이다. 교사용 화장실엔 비데가 있으면서 학생용엔 좌변기조차 없는 경우도 있고, 교사용 식당엔 잘 접힌 냅킨과 커피가 준비되어 있으면서 학생용 식당엔 뽑아 쓰는 냅킨과 물만 제공되기도 한다. 교사용 휴게실은 있지만 학생용 휴게실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공간주권이니 학교혁신이니 하며 생색내듯 학생들을 위한 휴게실을 만들 때도 있지만 대개 교사용 휴게실보다 더 좋은 곳은 거의 없다. 나의 학교도 교육청 예산으로 휴게공간을 만들긴 했는데 결과물을 보니 학생용과 교사용으로 칸막이로 나뉘어 있고 교사용 휴게실은 카페테리아로 꾸며놨다. 학생들 보기에 미안한 마음은 있는지 밖에서 보이지 않게 잘 만들어놨다. 그 안에는 어느 예산에서 썼는지 네스프레소 커피 캡슐과 쿠키들이 쌓여 있는데 학생 공간엔 오직 소파뿐이다. 우리 학교만 그런가 싶어 인근 학교에 가보았지만, 그곳도 사정이 크게 나을 게 없었다. 학교가 민주적 공간이 되고자 공간 주권 개념을 내세워 공간을 리모델링 했지만 민주적 학교가 있을 것 같은 북유럽 어딘가의 분위기만 있을 뿐 실제로 민주적인 공간은 아니었다. 교사와 학생이 함께 설계하고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운영한다고 했지만 그곳의 카페테리아도 교사만 이용할 수 있었다. 대체 왜 그리도 분리되어 있고 싶고 더 좋은 대우를 받고 싶을까. 아무리 학교 안의 청소년과는 같은 공간을 쓰기 싫다고 해도 학교 밖으로 나가는 순간 교사와 학생은 같은 화장실과 같은 식당을 쓸 수밖에 없는데 왜 그리도 교사용 화장실을 원할까. 어떤 교사는 식당도 휴게실도 다 같이 서도 좋지만 화장실만큼은 싫다고 말하기도 한다. 화장실은 사적인 공간이기에 필요하다고. 그런 이유라면 학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 모두에겐 공적인 공간 속에서 사적 공간을 갖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마음이다. 예산만 충분하다면 더 많은 사적 공간을 두어 학생이든 교사든 모두가 충분히 휴식할 수 있기를 원한다. 그런데 학교는 시청이나 도서관처럼 매우 공적인 공간이고 특별히 한 주체에게만 사적인 공간이 더 많이 허락될 수는 없다. 우리는 교사니까, 수업하느라 지쳐서…. 이것저것 이유를 붙여봐야 점점 궁색해질 뿐이다. 교사라고 더 나은 존재도 아니고 교사라서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이유도 없다. 그냥 인정하자. 학생의 공간에 관심이 없었고 교사만이 누리는 것에 대해 별문제를 느끼지 못했던 것 아닌가. #교권 #교사 #스승의날 #교사잡것들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