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기의 초입에서부터 괴이한 병고를 겪게 되면서 지난 세월의 궤적 안에 덩두렷하게 자리 잡고 있는 보람되고 행복했던 일들을 자주 떠올리게 된다.
돌이켜 보면 멀지 않은 60대 시절, 10여 년 간의 삶이 가장 뜨겁고도 절실했던 것 같다. 손에 잡힐 듯 눈에 선한 그때의 나를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기쁨과 희망 사목연구원)은 기관지 <빛두레> 2021년 5월 9일 자에 최근 출간된 내 촛불시집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 촛붌시집 표지 지난 3월 발간한 내 촛불시집에는 촛불혁명 당시 천주교 촛불미사 장소에서 낭송했던 시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 지요하
"소설가 지요하 막시모 선생이 지난 3월 시집 〈이승의 영마루에서 오늘도 꿈을 꾼다>를 내셨습니다.
선생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2008년 '오체투지 순례기도'부터 시작하여 2009년에는 용산참사 현장에서 매일 저녁 거행되었던 '용산미사', 그리고 2010년 11월부터 이듬해 11월까지 이어진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월요 시국기도회'에 동참하셨습니다.
2012년 7월부터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월요일 저녁마다 드리던 '민주주의의 부활을 위하여, 용산참사/ 쌍용차 해고노동자들/ 4대강/제주 구럼비/ 그리고 오늘을 생각하는 월요미사'에도 매번 참례하면서 미사 전 묵주기도를 주송해 주셨으며, 종종 시낭송으로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해주셨습니다. 비바람 부는 날일수록 빌고 바라는 정성을 보태기 위해 태안부터 서울까지 그 먼 길을 오가셨던 대장정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머리 숙여 지요하 선생님의 신앙과 실천에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그 시절의 절절했던 심정과 염원이 담긴 시집 <이승의 영마루에서 오늘도 꿈을 꾼다>의 애독을 여러 <빛두레> 독자들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은 최근 5년 전 불운의 의료사고로 비롯된 질환 때문에 크나큰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지요하(막시모) 선생님을 위한 기도와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4면의 이런 소개 글 다음에는 내 연락처가 적시되었다. 4면으로 발행되는 <빛두레>는 2면 전체에 시 '나는 생각하고 행동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싣고 그 옆에는 책 사진을 올렸다. 그리고 3면에는 시 '오늘도 여의도에는 바람이 분다'를 실었다. 두 개 시가 나란히 배치됐다.
시 '나는 생각하고 행동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2011년 5월 11일 저녁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거행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4대강 파괴 공사 중단을 촉구하는 미사'의 영성체 후에 낭송한 시이다, 또 '여의도에는 오늘도 바람이 분다'는 2011년 3월 22일 여의도 거리미사에서 낭송한 시이다.
그 시절의 희망과 열정, 그리고 보람
▲ 2012년 4월 9일 거제 고현성덩의 현수막 천주교 마산교구 시국미사에 참례하러 거제 고현성당에 갔을 때 우리 일행을 맞아주는 듯한 현수막을 보고 감격을 맛보았다; ⓒ 지요하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행동신앙은 2006년 4대강 파괴공사 중단을 촉구하는 오체투지 순례기도부터 시작하여 매년 주제와 장소를 바꿔가며 매주 월요일 저녁에 실시됐다. 월요일에 갖는 것은 월요일이 세계 모든 천주교사제들의 공식 휴무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시절 매주 월요일 오후에는 만사제폐하고 서울을 비롯하여 인천 수원 대전 전주 원주 거제(마산교구)와 아씨씨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설립한 '작은 형제회' 서울 수도원 성당을 다니며 미사참례를 했다. 이때 처음 수도원도 구경하고, 주차장도 이용하고 잠을 자기도 했다.
서울에서의 4대강 미사부터 미사 전의 묵주기도 주송을 전담했다. 나는 처음에는 맨 앞에 앉아 미사 참례만 할 줄 알았는데, 4대강 미사를 지내던 어느 날, 당시 사제단 총무로서 사회를 보시던 청주교구 김인국 신부의 호명에 따라 미사 전의 묵주기도 주송을 하게 됐다. 참으로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의아하다. 김인국 신부가 나를 어찌 알았는지, 일찍이 알고 있었다면 그 경로나 동기는 무엇인지 실로 궁금하다. 나는 그 분이 일찍부터 한국교회 안에서 많은 일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사제단의 거의 모든 대외 메시지가 김인국 신부에게서 나오고 있고, 본당 사목 일과 함께 집필 활동도 활발하게 병행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어쨌거나 나로선 그저 고맙고도 흐뭇한 일이었다. 나는 사제단의 모든 미사에 참례하러 먼 길을 가고 오는 일이 즐겁기만 했다. 일종의 사명감과 의무감이 함께 하는 일이어서 한 번도 빠지지 않았고 지각도 하지 않았다.
▲ 촛불혁명 당시 천주교 시국미사에서 시를 낭송하는 모습 2014년 8월 11일 서울광장에서 세월호의 희생자들들을 애도하며 시를 바쳤다. ⓒ 지요하
생각할수록 그 날들이 그리운 가운데서도 그 시절의 내 건각이 가장 그립다. 4대강 미사를 지낼 때는 국회의사당 앞 국민은행 본점 길가 주차장이 넉넉해서 자주 차를 가지고 가곤 했다. 간혹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이나 남부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지하철을 탔다. 1호선이나 3호선을 타고 가다가 한 번씩 갈아타고 서울역에서 내리곤 했다. 그리고 서울역에서부터 광화문까지 씩씩하게 걸었다.
내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매번 전례봉사를 하니 사제단 신부님들은 내가간혹 다소 늦더라도 시간을 늦추며 기다려 주곤 했다. 나는 내 차를 가지고 가든 버스를 타고 가든 가고 오는 길에서 묵주기도를 수십 단씩 바치곤 했다. 기도의 지향은 오로지 우리나라 현실 문제에 관한 갈구였다.
나는 내 기도 지향을 하느님께서 반드시 기쁘게 들어주시라 믿었다. 내 기도 지향은 지고지선하며 공의로운 것이었다. 내 개인의 구원과 영화를 갈구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내 기도 지향 자체에 대한 믿음, 공의로우신 하느님의 섭리와 전능하심을 굳게 믿는 마음이 내 가슴에 충만했다. 그로 말미암아 내 발걸음은 절로 가볍고도 경쾌했다. 서울역에서부터 광화문까지 걸었던 그 시기는 내 인생의 알토란 같은 황금기였디.
먼 길을 갈 때마다 그런 미사를 베푸시는 하느님께 깊이 감사했고, 또 가고 오면서 사제단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득 안곤 했다.
촛불혁명은 우리나라를 비추시는 하느님의 은총
단언컨대 2016∼17년의 위대한 촛불혁명은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의 수 년 간에 걸친 지속적인 거리미사가 발단이 되고 견인차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느님은 이 땅에 수억 만 개의 촛불로 당신을 현시하셨다. 하느님 현존의 역사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 촛불혁명 당시 우리 가족 2014년 10월 22일 저녁 천주교 시국미사에 가족과 함께 참례했다. ⓒ 지요하
그 촛불혁명은 오늘에도 여러 가지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촛불은 여전히 내게서도 오롯이 불타고 있다. 나는 지난 3월 삼일절에 맞추어 펴낸 촛불시집 <이승의 영마루에서 오늘도 꿈을 꾼다> 역시 촛불의 현신인 셈이다. 나는 그것을 굳게 믿는다.
나는 한때 촛불시집 출간을 후회했다. 출판사 섭외에 의해 계약에 따라 출간된 책이 아니었다. 자연 비용 감수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게 예상했던 일이고 당연지사임에도 그저 난감하여 망연자실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 촛불시집의 제1부 '영원불멸의 기운처럼' 거기에서도 어떤 기운이 작용하고 있음을 느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과 청와대의 관심표명에 크게 고무되기도 했다.
요즘 내 가슴에는 오롯한 의문 하나가 자리 잡고 있다. 내가 만약 5년 전처럼 코가 정상이라면 과연 촛불시집을 만들 수 있었을까? 만약 코를 크게 다쳐 극심한 고생을 겪지 않고 있었다면 촛불시집 출간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을까? 그걸 생각하면 다소 위안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코질환 고통이 너무 심하다. 노상 낮이고 밤이고 코가래릏 달고 살아야 하는 신세가 너무 가혹하다. 형벌이나 다름없다. 코가래 때문에 수면제를 장기 복용하여 근육이 굳어져서 집안에서만 겨우 생활하고 있다. 운신하기도 힘들어 거의 폐인처럼 살고 있다. 남은 근육이나마 보존하기 위해 올해부터는 수면제 복용을 중단하고 있다. 그러자니 밤새 잠이 들지 않아 그야말로 생고생이다.
이런 고통 가운데서도 하느님 신앙을 굳게 유지하고 있다. 시시때때로 터지는 코가래의 발작 때문에 성당에 가지 못하는 것이 마음 아프다. 하지만 성령의 기운을 늘 느끼고 살며 희망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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