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애(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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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년(sanha3000)등록 2021.06.11 16:01
막걸리애(愛)
                                                                                 김 만 년

 
 
  바야흐로 농사철이 돌아왔다. 목련은 허공으로 자주 빛 혈포를 마구 쏘아 올리고 새들은 곡예비행을 하며 춘풍을 즐기기에 여념이 없다. 겨우내 묵언하던 엄나무 두릅도 손톱만한 촉을 틔우며 첫 말문을 연다. 들판 여기저기서 트랙터 돌아가는 소리가 시끌벅적하다. 저마다 거름을 뿌리고 묵은 흙을 갈아엎고 고랑을 튼다. 나도 기지개를 펴며 슬슬 밭으로 진출한다. 난롯가에서 움츠렸던 게으름을 털고 굼실굼실 부풀어 오르는 흙냄새를 맡는다. 역시 사람이든 식물이든 생명력을 환기시키는 것은 땅의 기운만 한 것이 없다. 자두 복숭아 대추 체리 보리수 팥배나무 등이 오늘 식재할 목록들이다. 직장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얼추 한나절을 심고 나니 목이 컬컬해진다. '컬컬'하다의 동의어가 막걸리쯤 되려는가.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이 절로 생각난다. 때맞추어 아내가 발그레한 볼을 훔치며 냉이 지짐에 막걸리 한 주전자를 새참으로 내어 온다. 누구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삽자루를 내 던지고 밭둑에 앉는다. "그려 막걸리는 역시 주전자에 따라 먹어야 제맛이지."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발 가득히 막걸리를 따른다. '벌컥벌컥, 커억' 모두들 '커억'하는 추임새 한 소절씩 넣으며 아라리가락처럼 목구멍으로 술술 잘도 넘긴다. 넘길 때마다 목젖이 벌름거리고 뱃구레가 들썩거린다. 뱃심 뚝심으로, 오후 나무 심기의 구 할은 막걸리 힘이다.
  막걸리는 청주에 비해서 흐리다 해서 탁주(濁酒)라고도 하고 막 걸러냈다고 해서 막걸리라고 불린다. 우리민족의 전통주이자 국민주이기도하다. 배고픈 시절에 술 막지를 먹고 홍당무가 되어서 등교하던 기억, 술 심부름을 하다 그만 쏟아버려서 아버지에게 혼나던 기억, 밀주단속반에 걸릴 새라 술 단지를 지게에 지고 뒷골 뽕나무 밭에 묻으러 가시던 아버지의 당황스런 뒷모습, 젓 도는 술이라고 가끔 부뚜막에 앉아서 홀짝거리다가 그 여흥으로 춘향가 한 소절 흥얼거리시던 젊은 엄마, 고사리 같은 손으로 술 빵을 뜯어먹던 어린 남매들, 그 시절을 건너온 세대라면 누군들 이런 추억 한 구절쯤은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막걸리는 고달픈 보릿고개를 넘어오던 민초들의 길동무이자 우리민족의 애환이 짙게 서린 서민의 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다산(茶山)은 목민심서에서 "흉년에 나라의 금주령이 내렸지만 탁주는 요기도 되는 관계로 그냥 넘어갔다."고 했지 않았던가. 때론 막걸리 신명으로 삶을 위무하고 때론 술막지로 배고픔을 달래기도 하면서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을 배경으로 사람들은 그렇게 시린 삶을 건너왔다.
  막걸리는 특별한 안주가 필요 없다. 열무김치 하나로도 족하다. 안주가 없으면 손가락을 빤다는 말도 막걸리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다. 막걸리는 돼지껍데기 도토리묵 지짐 두부, 어느 음식과도 잘 어울린다. 마른 멸치에 고추장이면 또 어떤가. 밥상 위에 오르는 반찬이 곧 막걸리 안주다. 찬밥 더운밥 가리지 않고 아무데나 허허실실 잘 어울리는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의 품성을 닮았다. 그래서 막걸리를 받는 손들은 겸손하다. 주전자가 먼저 허리를 굽히면 술잔을 받는 사람도 두 손으로 받든다. 막걸리 한 사발을 탁자에 놓으면 세상사 근심이 다 사라지는 것만 같다. 막걸리잔 앞에서는 격식이나 허세도 없다. 입은 채로 노천이든 들마루든 아무 곳이나 걸터앉아 한 사발 가득 따르며 형님먼저 아우먼저, 그렇게 사람들과 친해지고 인생도 얼큰해진다. 오가는 대화도 막걸리처럼 털털하고 수더분하다. 열무 겉 저리 버무리듯이 서로의 마음들을 막걸리 몇 잔에 버무리다 보면 더러는 쌓였던 오해도 풀리고 앙금도 털어낸다. 그래서 더불어 마시면 응어리가 풀리는 것이 막걸리 오덕(五德)중 일덕(一德)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인지 막걸리 한 사발을 거침없이 벌컥 하고 풋고추를 와작 깨물어 먹는 사람을 보면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정감이 간다.
  비 오는 날이면 유독 막걸리가 땡 긴다. 그래서 나는 일찌감치 '막걸리는 비를 타고 온다.'고 명명해 두었다. 여름 한낮 느닷없이 장대비라도 내리치면 자꾸만 엉덩이가 들썩여진다. 오는 비 흠뻑 맞으며 단골 선술집으로 냅다 뛰어가 '막걸리 한잔 주소'라고 하면 필시 그 집 주모가 호들갑을 떨며 반겨줄 것만 같아서다. 그렇게 한잔 가득 부어놓고 아스팔트 위로 활강하는 비와 비가 주는 풍경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보면 어느새 마음도 막걸리처럼 후덕해진다. 팍팍하던 일상이 술에 물탄 듯 순해지고 물러지는 것이다. 그런 날은 비를 핑계 삼아 날 굿이 술꾼들이 모여들기 마련이다. 어릴 적 시골에서도 비오는 날이면 동네사람들이 모여 날 굿이 술추렴을 했다. 아낙들은 나물 비빔밥에 전을 부치고 남정네들은 논물을 보던 발로 마루에 걸터앉아 막걸리 잔을 돌렸다. 그때 마을의 대소사나 미루었던 일들도 의논하고 섭섭했거나 오해했던 일도 푼다. 비와 술의 여흥 때문인지 대화도 술처럼 술술 잘 풀린다. 그래서 막걸리는 단절된 마음을 여는 소통의 음식으로서도 유효하다.
  젊었을 때 나는 막걸리는 어른들이 마시는 술쯤으로 치부했다. 스무 살 무렵엔 1000cc 생맥주잔을 호기스럽게 들었다. 왠지 그래야 멋있을 것만 같았다. 30대 때는 소주로 주종을 바꾸었다. 퇴근길 눈발이라도 흩날리면 바바리코트 깃을 세우고 포장마차를 찾곤 했다. 투명한 소주잔에 가끔 고독과 연민, 분노를 희석시켜서 마시곤 했다. 우리네 인생처럼 소주는 쓰고 달았다. 아마 그때가 인생의 단맛과 쓴맛을 조금 알아가는 나이였던 것 같다. 달사하고 쓴맛에 흠뻑 취하던 시기였다.
  내가 막걸리 예찬론자가 된 것은 주말농장을 하고부터다. 여름 땡볕에서 잡초를 뽑고 호미질을 하다 보면 목이 말랐다. 맥주나 소주보다 시원한 막걸리 한잔이 간절했다. 아버지 생각이 났다. 일하시다가 새참으로 한잔, 점심 드시면서 갓 따온 홍초를 된장에 쿡 찍어서 또 한잔, 그때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직접 농사를 지어보니 알 것 같다. 막걸리는 노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흠뻑 땀을 흘리고 나면 몸이 먼저 막걸리를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막걸리를 농주(農酒)라고 하지 않았는가. 막걸리는 농주로 마실 때 제대로 진가가 발휘된다. 농주는 상생, 협동 등의 다의적 해석이 가능하다. 군 시절 참호를 파고 진지구축을 할 때 중대장 몰래 수통에 감추어 온 막걸리를 따라 먹던 맛은 또 어떤가. 한잔 쭉 들이키고 고추장에 갓 캐온 산 더덕을 찍어 먹던 그 달달한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예전에는 지붕을 잇는 날이나 마을 길을 넓힐 때면 이웃 사람들과 협동했고 그럴 때면 반드시 막걸리 말술이 배달된다. 일이 끝나면 마당에 빙 둘러서서 지짐이나 돼지고기를 구워놓고 흔쾌한 마음으로 막걸리잔을 나눈다. 그러고 보면 오늘 동료들과 나누는 막걸리 역시 농주(農酒)의 반열에 올려도 무방할 것 같다.
  영치기 영차, 동료들과 협심해서 돌을 캐내고 구덩이를 판다. 갓 복토한 땅이라 맷돌만한 돌들이 만만찮게 나온다. 장마에 대비해 쇠스랑으로 북을 높게 돋우고 나무를 심는다. 그 많던 나무들이 어느새 열병식을 하듯이 반듯하게 도열해있다. 마음이 뿌듯하다. 얼른 주먹만 한 과실들이 주렁주렁 열렸으면 좋겠다. 어느새 미루나무 뒤로 해가 기운다. 모두들 목이 컬컬한지 농막 쪽으로 눈길들이 자주 간다. 오늘 같은 날 뒤풀이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자, 오늘은 여기까지, 삽과 괭이를 어깨에 메고 농막으로 행진! 오늘 뒤풀이 안주는 홍어무침이다. 일몰을 배경으로 노천탁자에 걸터앉아 알싸한 홍어무침에 막걸리 한잔 하다보면 뭉친 근육도 풀리고 하루의 고단함도 풀리지 않겠는가. 자주옷고름 풀어헤치고 술잔 속으로 잎잎이 순절해오는 '목련아씨'에게 입 맞추다 보면 초로(初老)의 봄밤 또한 달콤하지 않겠는가.(끝)
 
 
출처: 에세이문학 2021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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