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에서 - 조운희 작가 "섬 이야기"

길, 길에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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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세희(comoland)등록 2021.10.01 14:48
 
길, 길에서 만난다.
 
미술을 처음 배울 때 교과서적으로 기피하게 된 흰색. 어린 미술학도의 시간으로부터 터부시되어 왔던 눈이 부시도록 밝은 흰 색은 본래의 색이기도 하고 햇빛의 색이기도 하다. 때문에 회화에서, 특히 한국화를 포함한 동아시아적 회화에서는 지류의 질감을 그대로 드러내는 미적 기법이 일반적이었다. 이 독특한 흰 색을 몇 해 전 한국화의 한 대목에서 발견하게 된 것은 신기한 일이기도 하지만 독특한 신세계를 발견한 기쁨이기도 했다.
 
2014년 4월, 평택호 미술관에서 고 죽리 조성락 화백의 회고전이 개최되었다. 전시를 둘러보던 중 나는 여러 점의 작품에서 흰 색을, 녹다 만 서설 또는 고추에 덮인 담요 같은 눈의 형태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작품에서의 흰색은 금방이라도 녹아서 빨간 고추를 적실 듯함에도 불구하고 정감어린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기도 하고, 없는 색으로서의 흰색과 붉은 고추와의 대조가 시선을 응집하듯 매력적이었다. 중앙화단보다는 지방인 평택에서 주로 작품활동을 했던 조성락 화백은 "생활주변에서 항상 보고 느끼는 것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며 "기존 동양화에서 쓰지 않던 역출법이라는 새로운 기법을 창안", 독창적인 한국화의 세계를 열었던 작가였다. 조성락 화백에게 흰 색은 바로 생활주변의 흔하디 흔한 색조였으며 사람들에게 내재된 감성의 색이며, 흰 색은 비로소 흰색으로서의 독특한 표현양식을 발휘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2021년 10월. 조운희 작가의 작품 '목화'를 보면 작가는 드디어 오랜 시간 준비했던 길 위에 서 있는 느낌이다. 마치 모든 준비를 끝내고 드디어 출사표를 던지는 장수의 자세처럼 거침없는 표현과 경계를 넘는 재료와 소재들 그리고 오래도록 숨겨두고 갇혀있었던 회화의 역사성에 찬란한 햇빛을 비추는 자세로 나아가는 것 같다. 10월 30일까지 계속되는 갤러리앨리스에서의 초대전 작품에는 작가가 즐겨 사용하던 성질의 소재와 함께 역사성을 지닌 소재 또한 자유롭게 등장한다. 이번 작품 여러 곳에서 등장하는 '목화'는 작가의 출발점과 지향점을 동시에 소개하는 셈이다. 소재의 새로운 해석은 이 뿐만이 아니다. 오래도록 집중해온 채색화의 바탕 위에 작가가 경험한 '삼미론'의 강렬함과 '독도'와 '나의 일상으로부터'까지 함께 나타난다. 특히 '독도'는 기존 작품에서 나타나길 어둡고 웅장하고 엄숙했던 역사적 통찰에서 희망적이고 애착이 어린 '흰 색'으로 바뀌면서 조운희 회화의 중심적 배경으로 자주 등장한다.
 
조운희 작가의 흰 색은 과감하면서도 역사성을 표현한다. '나의 일상으로부터' 깊은 통찰의 화풍을 30년 이상 이어온 채색화의 역사를 단숨에 뛰어넘어 모든 것을 일순간 포용한 느낌이다. 농채화(濃彩畵), 후채화(厚彩畵) 등으로 불리는 채색화는 재료의 준비부터 작업과정까지 많은 준비가 필요하고 상당한 집중을 필요로 한다. 이는 채색화의 재료가 가진 특성에 기인한 것인데 그 과정을 통해 수묵화 등에서 나타나는 기운과 정신을 섬세하고 고도화된 작업의 몰두로 대체하게 한다. 이 과정에서 얻어지는 산물은 시간과의 교합이며 시간의 중첩을 통해 만나게 되는 역사성이다. 때문에 작품은 풀벌레나 일상 소재를 통해 '일상의 소소함'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정적인 무게감과 깊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조운희 작가는 '나의 일상'을 뛰어넘어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통찰과 현재의 시간을 헤아리는 철안(鐵案)을 찾아내고자 노력했던 산물을 드러냈다. 작품 '삼미론(森美論)'에서 등장했던 흰 색은 바로 평택호 미술관에서 만났던 흰색과 역사적 조우를 이루게 된다. 인물 군상의 의복 또는 고추밭을 덮었던 서설로부터 탄생한 담담한 흰 색은 바로 조운희 작가의 부친인 고 죽리 조성락 화백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또한 '삼미론(森美論)'은 화가이자 한시(漢詩) 시인이었던 조성락 선생의 시로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미론(森美論)
그림을 논함에 삼미가 근본이니 그것은 자연과 성정과 기공이라.
자연은 미의 원형이며, 성정은 그의 향기요, 기공은 품격이니
그림은 이 세 가지가 결함이 없어야 예술이라 말하리라.
 
조운희 작가는 작품 '삼미론(森美論)'을 통해 드디어 아버지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작가 본인에게 깊이 내재되어 본래부터 있었던 색과 역사를 지향점과 출발점이 같은, 그래서 모든 인생이 그렇듯 본래 가고자 했던 길에서 만나는 의미 있는 시간을 맞이한 느낌이다. 오래전부터 잘 준비된 길을 드디어 만나게 되는 그런 운명같은 깨달음의 길을 가게 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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