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다

한글, 비밀사전에 가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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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열(banzzok)등록 2021.10.08 08:29
「창광 - 모든 한글 소설을 회수하고, 조선 서쾌를 포섭하라.
조선말을 없애는 일이 귀관 부대의 마지막 임무다.」

 
이 글은 내가 1989년 고구려훼리란 해운회사에 들어가 일본 시모노세키 지사에 발령받아 2년 동안 지내며 함께 일하던 협력사 직원이 들려줬던 이야기를 옮긴 실화다. 그는 나중에 자신이 일본 육군대장 야마카타 아리토모 먼 후손이라고 밝혔다.
 
그 직원이 보여준 서류에 '창광'이란 말이 낯설었다.

1894년 일본군에서 나온 말이라고 했다. 일본은 대본영에서 조선에 파견한 군대를 '대일본제국 동학당정토군'으로 이름 짓고 동학군 토벌을 전담시켰다. 후비보병독립19대대는 독자지휘권을 갖고 오로지 청·일전쟁이 벌어지는 후방에서 전방 주력부대 뒤를 받치면서 남쪽의 동학군만 찾아 몰살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이들은 부산에 들어와 일본 장사치들을 지키는 부산수비대와 남해에 주둔하는 일본군 육전대(해병대)와 함께 동학군 토벌에 앞장섰고 이때 내세운 작전이 삼광三光이었다. 살광殺光, 모두 죽인다. 소광燒光, 모두 태운다. 창광搶光, 모두 빼앗는다. 흔히들 중일 전쟁 때 나온 작전인 줄 아는데, 동학군 토벌 때 시작했다. 창광은 무슨 일이든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끝장을 본다는 뜻이다. - 대일본육군작전 1호 창광 - 조선말을 빼앗으면 조선의 모든 것을 빼앗는다.-
 
짐이 생각건대 황조황종皇祖皇宗이 나라를 열어 굉원宏遠한 덕을 세움이 심후深厚하도다.
우리 신민이 지극한 충과 효로써 억조의 마음을 하나로 하여 대대로 그 아름다움을 이루는 바가 우리 국체國體의 정화精華인 바, 교육의 연원 또한 실로 여기에 있다.
그대들 신민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하며, 부부간에 서로 화목하고, 붕우 간에 서로 신의하며, 스스로는 공손하고 겸손하며, 박애를 여러 사람에게 미치고, 학문을 닦고 기술을 익혀 그로써 지능을 계발하고, 덕과 재능을 성취하며, 나아가 공익을 넓혀 세상의 의무를 다하고, 항상 국헌을 중시하고 국법에 따라, 일단 유사시에는 의용義勇으로 봉공奉公하여 그로써 천양무궁天壌無窮한 황운皇運을 지켜야 한다.
이와같이 된다면 하나하나 짐의 충량한 신민이라 부를 뿐만 아니라, 족히 그대들 선조의 유풍遺風을 현창顯彰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래 줄임)
1890년 10월 30일 어명어새
 
우에하라가 공손히 받들어 펼친 금빛 두루마리는 붉은 글씨로 된 교육칙어敎育勅語였다. 조선 학생들은 날마다 교육칙어를 외어야 했다.
 
그대들 신민은 항상 국헌을 중시하고 국법에 따라, 일단 유사시에는 의용으로 봉공하여 그로써 천양무궁한 황운을 지켜야 한다. 이같이 된다면 (그대 조선인들을) 충량한 신민이라 부를 뿐만 아니라... .
 
언제 읽어도 명문이다. 감격에 겨워 온몸이 떨리는 걸 진정시키려는 듯 우에하라는 천천히 두루마리를 말아 들곤 아리토모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ㅡ 칙어를 외우게 한다고 조선인들이 자기 말을 버릴까요?
ㅡ 당장 그럴 리야 없겠지. 아무리 어리석은 조선인이라고 해도.
먼저 조선인들이 조선말을 부끄럽게 여기도록 만들어야지. 조선말 사이에 대일본말을 퍼뜨리고, 경성에서 해남까지 북으로 신의주까지 일본말이 퍼지도록 해야겠지.
경성 말을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시골에서 쓰는 말은 부끄러운 말로 숨기도록 부추기야 지. 조선인 가운데 우에하라 자네보다 더 일본에 충성스런 인물, 일본인을 따라 하지 못해 안달하는 조선인이 조선말을 짓밟을 걸세. 조선인들이 알아서 조선말을 더럽히고 천박하게 만들 것이야.
 
 

할아버지가 쓴 조선사 중학교 때 이 책을 펼쳤으나 나는 읽지 못했다. 한자를 많이 익혔다고 생각했으나 아직도 잘 읽지 못한다. ⓒ 김시열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가운데 줄임)
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정신을 드높인다.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1968년 12월 5일 대통령 박정희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ㅡ 우에하라, 조선말에는 ~노(の)가 없네.
모든 공문서에 국어 ~노(の)를 퍼뜨리게. 오카모토가 만든 국민교육헌장에는 ~노(の)가 겨우 스무 번밖에 들어가지 않아 불만이지만 뭐 이제 시작이니까. ~노(の)가 조선말을 잡아먹을 때까지 쓰고 또 써야 해. ~노(の)는 말하는 사람은 감추고 물건만 드러내지. ~노(の)는 조선말을 없애고 한자말을 불러오는 징검다리야. ~노(の)는 말을 어렵고 장황하게 늘여서 듣는 이들이 귀를 닫도록 만들지. 조선인들 마음과 몸짓을 나타내는 솔직한 말, 짧고 분명하게 쓰는 조선 큰말은 점점 줄어들고 쪼그라들다 못해 이내 사라질 것이야.
 
 

어머니가 베낀 강릉추월전 어머니가 시집 와서 베낀 강릉추월전. 시집가는 고모에게 선물로 주려고 베낀 한글소설이다. ⓒ 김시열

 
마침내 미국과 이야기가 끝났다.
아리토모와 우에하라가 1945년 일본으로 돌아가며 오카모토에게 전한 비밀사전이 은밀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밀사전에는 '~노(の) : 의'와 '기오쓰케 : 정신차렷' 딱 두 낱말만 적혀있었다. 이 두 낱말은 국민교육헌장과 함께 교실을 뒤덮더니, 태풍처럼 휘몰아쳐 아침저녁으로 조선 아이들과 청년들을 다그치며 조선말을 파고들며 점점 몸집을 늘렸다.
 
ㅡ 각하. 언제까지 오카모토가 정권을 잡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ㅡ 그렇겠지. 제2, 3의 오카모토를 키우고 만들면 되겠지. 그런 인물이 나올 때까지 미국이 우리 뒤를 받쳐줄 걸세. 알렌이 선물한 자동차 답례로 조선왕이 미국한테 광혜원 병원 허가를 내주도록 손을 썼지. 이제 조선인 몸이며 손발 그리고 머릿속에 든 모든 것, 수천 년 이어져 내려오는 이야기도 영어로 적기 시작할걸세. 그 영어를 일본식 영어로 일본식 한자로 바꿔 우리가 조선에 전할 거야.

갑오년 남조선대토벌작전을 생각해봐.
조선인이 동학군이든 아니든 우리는 상관없었어. 조선인들이 서로 죽이고 증오하고 싸움이 끊이지만 않으면 됐지. 그 일을 우리가 계속할 필요도 없어, 미국한테 넘겨. 일본말과 영어가 번갈아 가며 조선말을 잡아먹을 거야. 하하하.
 
아리토모 예언대로 조선은 일본식 한자말과 영어가 뒤덮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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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모토 미노루, 스키야아 아키히모에 이어 시게마쓰 마케오가 비밀사전을 넘겨받았다.
 
오카모토는 조선인이면서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처럼 굴었다. 아키히모는 눈에 보이는 거짓말을 너무나 태연하게 지껄였다. 시게마쓰는 오카모토나 아키히모 못지않게 일본인을 닮지 못해 안달하는 조선인이었으나 영리하게도 돈 뒤에 숨어 감쪽같이 그 모습을 감추었다. 조선에서 한자말과 영어를 섞어 쓴 결과 조선인들 의사소통능력은 점점 낮아졌다. 영어를 공용어로 써야 한다는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비밀사전은 점점 더 두꺼워졌다.

사전은 조선 토박이말을 가두고 일본말을 토해냈다. 옛날부터 내려오던 땅이름도 모두 감추고 일본식 한자말 영어로 재빠르게 바꾸어나갔다. 비밀사전은 대본영에서 내로라하는 언어학자 수십 명이 달려들어 개발 보급한 일본이 자랑하는 최고 무기였다.
 
조선에서는 영어를 쓰지 않거나 한자를 섞지 않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든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영어 못해 일자리를 얻지 못한 조선 젊은이들은 '패배자'란 열등감을 이력서에 반드시 적어야 했다. 영어 과외 시키지 못해 자식 대학에 보내지 못한 조선 부모들은 '무능'이란 굴레를 스스로 씌우고 모든 일을 '내 탓'으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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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우에하라. 아키히모를 잊고 있었군. 그에게 영어 몰입교육 판을 짜라고 하게.
시게마쓰가 영어를 마음대로 쓸 수 있도록 말이야.
 
그는 모든 계열사와 경제단체에 영어 알 박기를 권고했으며 은밀히 언론과 교육부를 움직였다.
(비밀 공문) 기업은 광고에 반드시 영어 낱말 한두 마디 넣을 것,
(비밀 공문) 작곡가는 노랫말에 꼭 영어 한두 소절 섞을 것,
(비밀 공문) 영화는 영어 대사로 세련미를 갖출 것,
(비밀 공문) 의사결정은 '예-아니오' 대신 yes나 no로 쓸 것,
(보통 공문) 텔레비전 연속극․라디오 프로그램에 외국어 못해서 겪었던 불편을 말할 것,
(공개 공문) 유치원 아이부터 노인까지 영어 이름 갖기. 관공서․거리 간판․ 상품 이름․아이들 별명․알림판․강아지 이름․음식 이름․대회 이름․아파트 이름․제품이나 서비스 사용설명서 따위는 모두 영어로 바꿀 것,
(공개 공문) 사람을 채용할 때는, 어떤 일을 하든 영어 시험부터 보이도록.
 
조선 부모들은 한자와 영어를 못 써 제 자식들이 남한테 무시당하고, 얕잡아 보이는 꼴을 두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대한민국은 영어에 매달렸다. 옛날 조선이 일본말에 매달렸듯이.
 
ㅡ우에하라.
오카모도와 시게마쓰가 전문가를 앞세우니 조선인들 스스로 앞다투어 조선말을 짓밟고 있지 않은가. 전문가에게 맡기고 우리는 이쯤에서 본영으로 철수한다. 조선말 불씨가 되살아나지 않도록 사전을 철저히 살피도록. 말만 움켜쥐면 생각도 틀어쥘 수 있어. 그러면 그들 행동쯤이야 손끝으로도 부릴 수 있지. 이제 조선인들 삶은 우리 손아귀에 들어왔네.
 
비밀사전은 이제 더는 비밀이 아니었다. 학교 도서관 자료실마다 '국어대사전'이란 이름으로 조선말을 하나둘 잡아 가두었다. 비밀사전은 나날이 두꺼워지고, 사라진 말 자리에 영어․한자말이 독판쳤다. 그때마다 조선인들은 무슨 말을 써야 할지 할 말을 잃었고 생각은 나날이 옹색해졌다.

그 협력사 직원은 한국에서 시게마쓰 다음으로 비밀사전을 이어받을 사람이 벌써 정해져 있다고 했다. 마치 자기는 그 사람이 누군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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