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개인의 삶을 정치공학적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돼요"

내가 만난 청년들 11

검토 완료

김명신(alth795)등록 2022.01.25 09:56
불평등한 사회, 청년들이 숨 쉴 틈 없는 현실입니다. 청년은 시대의 얼굴이 아닐까요. 청년들이 무엇에 분노하는가, 무엇에 웃고 열광하는가가 그 사회의 적나라한 민낯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청년들의 삶 속에서 한국 사회를 진단하고 변화의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청년들을 만납니다. 건조한 분석과 통계만으로는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다양한 삶과 고충을 전부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기사를 보는 청년들도 인터뷰하고 싶어요! 연락주세요! - 기자 말
         

Artist Portrait with A Candle(2012) 김한량 작가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의 ?Artist Portrait with A Candle(2012)?의 연작을 보내주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국경을 넘나들며 활동하는 전방위적인 작가로서, 신체항과 관계항으로 비롯되는 퍼포먼스를 기반으로 경계를 넘어서는 작품을 진행한다. 촛불을 들고 있는 예술가(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초상이 담긴 두 장의 사진을 작가 내면의 지점에서 신파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고, 혹은 다른 맥락에서 다각적인 해석의 여지를 줄 수 있다고 한다. 김한량 작가에게 마리나의 촛불을 든 초상은 스스로를 벼려내는 지점에서 '자신'을 기입하며 이입하고 매순간 방향상실의 동일시 과정을 제공하는 작품이다. ⓒ Marina Abramovi

 
- 우리가 살고있는 한국사회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비-공정(非-公定, non-fair)사회예요. 우리 사회는 '공정(公定, fair)'이라는 단어가 진지하게 고민된 적이 없어요. 공정이라는 개념이 있을 때야 비로소 '불공정(不公正, unfair)'이라는 개념도 생길 수 있잖아요. 공정이라는 개념이 사회∙정치적으로 논의된 적이 없기 때문에 불공정을 상쇄하는 비-공정 사회인 거죠. '공정', 단어 자체가 사변적이죠. 즉, 비-공정은 '공정' 자체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고 생각해요. 단순히 '비-'라는 접두사가 가지는 '부정'의 뜻으로 바라보면 헷갈릴 수가 있어요. 제가 주장하는 '비-'는 '존재' 그 자체로 접근해서 말씀드리는 거죠. 공정과 불공정은 존재 이후에 어떠한 '사건'을 판단했을 때 성립할 수 있죠. 정리하자면, 비-공정 사회로 대변되는 한국의 풍경은 공정과 불공정을 논의할 조건이 성립하지 않은 상태에서 해당 어휘가 가지는 '유려하고 결백한 매력' 덕분에 무분별하게 공명하고 있어요.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명확한 설계도라는 기본 조건을 갖추고, 어떠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흔들리지 않는 골조가 잡혀야 해요. 한국 사회는 기본, 근본이 되는 설계도를 조건 없이 수입하기 급급했어요. 그렇다고 '민족주의', '자주성'으로 귀결되면 곤란하겠죠. 사회 기반의 층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정치, 철학, 문화 등 뒷받침되는 근거가 필요하죠. 앞서 '조건 없는 수입'을 언급했는데, 가시적으로 돋보이면서 높은 성과를 창출할 수 있는 설계도를 적용하기 위한 충분한 '검증 과정'이 부족한 것을 '부정'하면서 결과를 '인정'하기를 요구하죠. 대게 '생(生)'으로부터 발현되는 문제를 내세우는, 혹은 '변혁'의 꿈을 안고 펼친 운동의 이력이 계급이 되어, 담론을 현실에 적용 불가능한, 괴리된 '이론'으로 치부하며 벼랑 끝으로 밀어내었죠. 담론은 실천과 이론이 함께 개입되어 긴장 관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죠. 사회적 담론이 사변적인 수사법에 불과하다는 주장, 즉 담론의 부재가 당연시된다면 역사적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낼 수 없어요. 어떠한 사건으로부터 기시감을 느낀다면, 그것의 반복이 종용 되면 우리는 언제든 회귀할 수 있어요." 
 
-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사회적으로, 제도적으로 보장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 있나요?
 
"소수자 문제 같은 경우는 소수자 당사자성에만 얽매이는 정치공학적 주장이 답답해요. 오직 당사자만이 해당 문제에 공론장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에 매 순간 난처하죠. 당사자성으로부터 발현되는, 논의할 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어요. 저는 그러한 부분을 간과하는 것이 아닌, 확장적 장에서 진지한 논의, 논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성 소수자뿐만 아니라 사회의 '소수자'는 다각적으로 다가오고 있어요. 임의로 한정하고 구별 짓는 것을 고민해야 하죠.
 
예를 들면, 과거부터 지금까지 논쟁이 이어지고 있는 '퀴어 퍼레이드'를 대입해볼게요. 성 소수자들이 행동을 실천하면서 과한 노출에 기인하는 해로움, 성적 교란 등 맹목적 비난의 표현은 계속해서 '반대'의 목소리를 비롯한 몇몇 당사자 속에서 출현하죠. 법의 테두리 안에서 접근하는 사람은 공연음란죄를 내밀죠.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을 고민해보면, '성 지향성'이 정태적이지 않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그것은 매 순간 재위치 되면서 유동적이죠. 당사자성에 관해 끊임없이 고민할 여지를 주는 것이 퀴어 퍼레이드를 비롯한 행동 실천이에요. 당사자성은 간과할 수 없지만, 자세히 보면 그러한 행동의 실천은 확장적인 장에서 '개방성'을 살펴볼 수 있어요. 즉, 당사자성에 기인한 실천으로만 '보일 수' 있겠지만, 누군가는 왜곡되었다고 주장하더라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당사자성' 그 자체에서 '배타성'을 규정한 '일반적인' 사고 회로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를 분석하는 것은 담론을 위해 중요한 작업이에요."
 

- 한국 정치를 한 마디로 표현해볼까요?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의 『관료제 유토피아(메디치미디어, 2016)』 라는 책이 있어요. 이 책의 제목, 내용이 한국 정치에 걸맞지 않나 생각해요. 관료제 유토피아는 자본주의와 관료제 권력으로부터 기인하는 세계를 말해요. 전 지구적 신자유주의 상황은 마치 자연 속에 양들을 방목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어떠한 욕망 때문에 '방목'을 가장한 양치기의 '관리' 속에 살아가는 양태가 그러하죠. 사회에 대입하면, 표방된 자유는 완급조절의 결정체에요. 사실상 암묵적인 지배력이 발휘되는 것이죠. 이 책에서 핵심으로 얘기하는 것은 자유의 모순과 감시의 역설을 시사해요. 자유를 바탕으로 관료제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고, 그것이 제도화된 것이 현재의 전 지구적 정치 체계이자, 한국의 정치. 권력, 명예, 자본이 자유로부터 발현된다는 것이 매우 아이러니한 지점이죠. 관료는 관공서를 비롯해 기업, 조직, 정당 등 현재 사회의 모든 체계 속에 대입할 수 있어요. 관료제로부터 발현되는 자유는 표피적으로는 매혹적이죠.
 
앞서 언급한 공정을 비롯한 언어를 깊게 생각해보지도 않고 막연히 사용하는 지점을 상기 시켜 볼게요. 사실상 어떠한 말을 어떻게 사용하든 '자유'니까요. 자유는 권력, 명예, 자본을 쟁취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매우 넓은 시각에서 사용돼요. 자유 아래서 합리화 전략은 간단해요. 누군가 자본, 명예, 권력을 불법적으로 쟁취해도 신자유주의의 '자유' 아래에서 보호받죠. 오히려 이를 규제하는 건 자유를 탄압하는 게 되죠. 자유라는 단어는 구속을 벗어나는 매혹적인 이미지 때문에 보편적으로 부정적으로 인식되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사회에서 표현되는 상황을 구체적으로 보면 굉장히 모순된 단어이죠. 신자유주의가 규제를 철폐하고 자유를 수호한다는 논리 기반으로 확산하는 세계화 속에서 경쟁은 심화하고, 능력주의와 성과주의가 우선시되죠. 불합리한 전략으로 얻어진 권력, 명예, 자본이 범람하고, 어느 것 하나 가지지 못한다면 무능력한 존재로 낙인찍히는 양태는 물질과 정신 모든 것을 뒤흔들어 놓죠. 공정과 마찬가지로 '자유'를 의심하고 분석하는 전략이 근본적으로 논의되어야 해요."

 
- 그렇게 생각한 구체적인 사례가 있나요?
 
"사회∙정치를 객관화해서 보는 시야가 정전상태에 이르렀어요. 갑작스러운 정전 상태가 되면 시야가 좁아지고 아무것도 안 보이게 되죠. 지금의 우리는 그 상태에 안주하려고 해요. 정전됐을 때 '나'의 집만 정전이 되었는가, 혹은 모두가 정전되었는가에 관한 판단이 있어야 하고 정전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가 필요하죠. 그러나 현재의 상태는 그러한 고민보다는 눈이 적응하는 시간 동안 정전 상태에 안주하여 활동하려고 해요. 불현듯 다가온 정전 상태, 그 자체를 수용하는데 조급해요. 문제를 조우했을 때 너무 많은 것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져요.

예를 들면, 장애인 이동권을 대입해보죠. 장애인이 이동권 보장을 위해 지하철을 점거하는 행위에 대해 다수의 비장애인의 날 것 그대로의, 모욕적인 발언과 주장을 하죠. 단지 장애인이 소수라는 이유만으로. 이동권을 위한 점거 논란이 다뤄질 때마다 다수를 차지하는 비장애인의 이동권이 지연되었다는 주장으로 장애인이 정전 상태에 있을 이유는 없어요. 가장자리에 내몰린 이가 발화한 목소리가 정전 상태로부터 탈주하기 위한 실천이라는 것을, 그것을 '경청'하는 것이 관성에 의한 '정전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해요. 이러한 맥락에서 비장애인 '나'의 이동권, 시간이 일시적으로 중지된 것에 관해 장애인 '그'를 맹목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자유'의 개념을 표피적으로 인식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증명하죠. 정전 상태에 익숙해져, 이전의 상태를 망각하고 문제가 있는 정전의 일반화를 믿고 싶은 거죠."

 
- 스스로 정치를 한다면/정치인이 된다면, 가장 하고 싶은 것 / 절대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면?
 
"총체적으로, 그들 개개인의 삶을 정치공학적 수단으로 삼는 것은 지양하겠죠. 현재보다 나아진 삶을 살기 위해서 그들 스스로 개입할 수 있는 담론의 장을 개방하는 것이 필요해요. 삶, 사회, 정치의 패러다임을 재편해야겠죠."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로잘린 도이치(Rosalyn Deutsche)의 발언을 인용하자면, "나는 정치적 예술이라는 말을 쓰지 않으려 한다. 마치 진짜 예술은 정치적이지 않은 예술이라는 뉘앙스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많은 이들이 현실에 개입하고자 하는 정치적 예술을 폄하 하려는 정치적 의도로 그런 예술들을 정치적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을 본다."라고 주장해요. 인터뷰의 주제가 청년을 관통하는 한국 정치를 둘러싼 생각을 정리할 기회라고 생각하고, '청년' 그 자체로부터 발현되는 문제를 오버랩해서 말씀드릴게요. 선거 공약과 정책 기조가 '청년 정책', '청년 네트워크 사업', '청년 문화 활성화' 등의 경향이 급증했죠. 청년이라는 용어를 내세워 얻는 이익은 합리적이거든요. 사실, 저는 그들이 규정한 청년이라는 범주로부터 마련된 기회라는 존재를 인식한 적이 없어요. 청년이 지닌 개념, 서사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청년이라는 무형의 용어 활용은 예산 편성과 정책 실천에 있어서 무난하거든요. 앞서 언급한 '정치적 예술'을 대입해보죠. 무난하고 합리적으로 활용하는데 용이한, 협소하게 범주화된 청년이라는 용법은 분명히 존재하는 '삶'들의 시야를 좁혀 판단을 흐리게 하는, 합리적 전략이라고 생각해요. 공정, 자유, 청년. 이외에도 문제의식을 지니고 섬세하게 검토해야 할 사안이 많겠죠. 누구의 잘못과 몫으로 귀결시킬 이유도 없어요. 우리는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매 순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그러한 설명을 잘 하기 위해 자신을 벼려내고,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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