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평양은 어떻게 초토화 되었는가?

현재 북한이 반미국가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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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기(safariboy)등록 2022.01.21 13:56
우리 역사의 비극적인 사건인 한국전쟁은 상상을 초월하는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초래한 전쟁이다.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전개되었던 한국전쟁은 종전이 아닌 휴전으로 끝이났고, 현재까지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다. 휴전 이후 북한은 철저한 반미국가가 되었으며, 반미주의는 현재의 북한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때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왜 북한은 철저한 반미국가가 된 것일까?

미공군의 폭격은 한국전쟁 개전 시점부터 사실상 시작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을 폭격하는 미공군의 B-29 폭격기 한국전쟁 당시 미공군의 B-29 폭격기는 북한을 초토화했다. B-29 폭격기는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본토를 폭격하는 데 사용됐다. ⓒ NARA/눈빛출판사

 
북한이 반미국가가 된 결정적인 이유에는 한국전쟁 당시 그들이 경험했던 무차별 폭격의 경험이 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는 즉각적으로 군사개입을 했다.  서울이 인민군에 의해 함락되기 1일 전인 6월 27일 미 극동군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는 미공군의 즉각적인 북한군 공습을 주장했다. 2일 뒤 미공군은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이 시점부터 미공군의 폭격은 시작됐다.

1950년 6월 29일 오전 6시, 더글라스 맥아더는 수원비행장에 있었다. 이는 2016년 박근혜 정권 시절 개봉했던 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서도 잠시나마 나온다. 미 극동공군 사령관 조지 스트레이트 마이어(George E. Stratemeyer)는 맥아더에게 제공권을 장악하려면 즉시 북한지역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원에서 공중전을 지켜보던 맥아더는 이를 승인했고, 이 지시는 즉각 실행으로 옮겨졌다. 6월 29일 오후 미공군의 폭격기 대대는 평양 비행장을 폭격했다. 이렇게 해서 평양을 향한 미공군의 폭격이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미공군의 즉각적인 군사개입 및 폭격은 2006년 KBS에서 했던 드라마 <서울 1945>에서도 묘사된 바가 있다. 아래의 내용은 드라마 상에서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허가이가 나누는 대화의 일부이다. 다소 각색된 감이 있으나, 미군의 군사 개입이 즉각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김일성(조선 로동당 수상): 당초 전략에 큰 차질을 빛고 말았소. 동부전선에서 상당한 시일이 지체됐고. 남조선 군대의 한간 방어선을 끝내  허용하고 말았소.

허가이(조선 로동당 당 비서): 부수상 (박헌영)동지께서 장담하지 않으셨습네까? 우리 공화국 군대가 내려가면, 남조선 인민들이 봉기하고 . 대대적으로 환영할 꺼라고. 헌데, 지금 어디서도 그런 일을 찾아볼 수가 없지 않습네까?

박헌영(조선 로동당 부수상): 수상 (김일성)동지. 욕심이 과한 것 아닙니까?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 지금 이시각에도 파죽지세로 남진하고 있소이다. 서울 인민들 또한 자발적으로 임시 인민위원회 내에 가입하고 있소이다.

갑자기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김일성(조선 로동당 수상): 미군 폭격기가  여기 평양까지 올라와 폭격을 해대고 있어.  우리가 우세한 건 이 지상전 뿐이란 말이오!!!!

드라마 서울 1945 52화에서

한국전쟁 초기 원산 폭격

미공군의 즉각적인 참전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 초기 한국군과 미지상군은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의 공세에 후퇴를 거듭했다. 지상전에서는 인민군에게 밀렸지만, 제공권은 연합군이 장악했다. 따라서 군사시설과 인민군을 대상으로 한 미공군의 폭격은 실행되었으며, 이러한 범위는 현재의 북한 지역을 가리지 않았다. 미공군의 원산 폭격도 이 중 하나다.

많은 사람들이 원산폭격을 하면, 과거 한국군대에서 시키던 인간이하의 얼차려인 원산폭격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원산 폭격의 실체는 비극적인 학살극이었다. 1950년 7월 6일 9대의 B-29 폭격기가 정유공장을 공격했고, 7월 7일에는 11대의 B-29 폭격기가 항만시설을 중심으로 폭격작전을 수행했다.

대량 살상을 동반한 폭격은 1주일 뒤인 7월 13일에 시작됐다. 56대의 B-29 폭격기가 동원됐다. 13일에 감행된 미군의 폭격은 인민군의 병력과 물자가 전선으로 못 가도록 적 후방의 교통중심지와 도로 및 철도 그리고 병력 이동로 및 숙소 등에 폭격 전쟁 수행의지를 꺾기 위함이었다. 쉽게 말해 전략폭격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민간인 거주지역까지 폭격 범위가 확산된 양상을 보였다. 13일 당시 원산 폭격으로 총 1,249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을 연구한 김태우 교수는 『폭격』이라는 저서를 집필했다. 아래의 내용은 『폭격』에 나오는 내용이다.
미군은  7월 6일과 13일, 두 차례에 걸쳐 원산에 폭격을 감행했는데, 그중 13일의 폭격은 가장 심한 것이었다. 미군이 그날 아침에 500톤의 폭탄을 구름 위에서 주택구역을 선택하여 투하한 결과, 1,249명이 희생되었다. 그 가운데 195명은 여성이었고, 125명은 어린이였고, 122명은 노인이었다고 한다.

『폭격』 p.114

1950년 7월 초부터 미공군의 폭격을 받았던 원산은 1953년 휴전 협정이 체결되는 시점까지 미군의 무차별 폭격을 받았다. 과거 한국군에서 얼차려로 사용된 대가리 박아인 원산 폭격이 사실은 미군의 대량 학살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미군의 폭격으로 달의 표면이 된 평양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50년 6월 29일 미공군은 북한지역에 있는 평양 비행장을 최초로 폭격했었다. 이것이 바로 미공군이 처음 실행한 북폭이었다. 미공군이 평양을 다시 폭격하게 된 것은 인민군이 대전을 함락시키고 나서 2일이 지난 뒤였다.
 

북한 지역에 투하된 네이팜 폭탄 한국전쟁 당시 미군은 대략 3만 5,000톤에 달하는 네이팜 폭탄을 사용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무차별 네이팜 폭탄 투하가 있기 전에 한국전쟁에서 이런 참극이 일어났던 것이다.?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1950년 7월 22일 B-29 폭격기 22대가 평양을 폭격하기 위해 출격했다. 이들 중 15대는 나남의 창고와 보급품 집적소(supply center)를 폭격했고, 6대는 평양 조차장을 공격했으며, 나머지 1대는 원산정유공장을 폭격했다. 다음날인 23일에는 18대의 B-29 폭격기가 평양조차장을 폭격했는데, 북한 측은 이에 대해 대량의 인명 살상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북한 측은 6시간에 걸친 이날의 폭격으로 평양공업대학, 서평양 제1인민병원, 연화리 교회, 박구리 교회 등이 파괴되었고, 주택지구에 162개의 폭탄이 투하되어 민간인 439명이 살상되었다고 주장했다. 북한 측의 주장에 따르면 7월 23일 폭격은 민간시설과 민간인에게 특별히 많은 피해를 주었다. 이 같은 피해는 당일 B-29 폭격기들의 폭격방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폭격』 p.121

5일 뒤인 7월 28일 미공군은 B-29 폭격기 7대를 동원하여 또 다시 평양 조차장을 폭격했다. 미공군은 B-29 폭격기 수십대를 동원하여 7월에만 수회에 걸쳐 평양 조차장을 공격한 셈이다. 7월 28일 폭격으로 평양에서만 229호의 주민가옥을 파괴했으며, 많은 재산 가구 및 개인 상점의 상품이 파손 소각되었다. 그리고 그 주변 주민가옥 200여호가 피해를 받았다.

전쟁 초기 평양 도심지역 폭격은 1950년 8월 7일에 이르러 그 절정에 달했다. 미공군은 B-29 폭격기 49대를 동원하여 평양을 폭격했다. 폭격 이후 북한 측은 33대의 B-29 폭격기가 평양을 폭격했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놀랍게도 실제보다 16대나 적게 비행기 수를 가늠한 것이다. 아래는 『폭격』에 나오는 내용이다.
미국 측은 미공군 폭격양상에 대한 북한 측의 조사가 과장되었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해왔지만, 오히려 북한 측의 보고서는 실제 공격양상보다 적개 보고하곤 했다.

『폭격』 p.123

8월 중순에 이르러 수 차례 폭격을 받았던 평양 조차장이나 평양 병기 제조소 등 평양 시내 극동공군의 주요 목표물들은 상당정도 무력화 됐으나, 미 극동공군사령관 스트레이트마이어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9월 말 미 지상군의 북진에 앞서 B-29 폭격기 100대를 투입하여 평양 전체를 지도상에서 아예 지위버리자고 제안했다. 물론 이 시기는 맥아더 사령부가 전략 폭격을 고수하고 있었기에 실행되지는 않았다. 다만 마이어의 주장은 그로부터 수개월 후에 실행된다.

한국군과 유엔군의 북진 이후 평양은 한국군과 미군의 수중에 떨어졌지만,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다시 전선이 밀렸다. 1950년 12월 20일 스트레이트 마이어와 파트리지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Pyongyang, Wonsan, Hamhung and Hungnam should be burned without delay

평양, 원산, 함흥, 흥남이 지체없이 소각되어야만 한다.

『폭격』 p.305

중공군이 개입한 이후 맥아더 사령부의 폭격 전략은 군사시설을 중심으로 타격하는 전략폭격에서 초토화 작전 즉 무차별 폭격으로 전환된 상태였다. 1951년 1월 3일에 미군의 B-29 폭격기 72대가 출격하여 67대가 평양을 폭격했고, 1월 5일에는 70대가 출격하여 59대가 평양을 폭격했다. 연 이틀에 걸친 평양공습은 해당 지역을 초토화해버리기 위한 군사작전이었다. 
 

미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평양 무차별 공습으로 평양은 이렇게 초토화 됐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 사람들이 체험한 폭격의 경험은 지옥 그 자체였다.? ⓒ 사진=창비 제공, 노컷뉴스

 
이러한 폭격은 1951년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지속됐다. 1951년 7월 13일 유엔군 총사령관인 리지웨이는 개성 정전회담에서 공산 측의 강경한 태도를 접한 이후 현 교섭기간 중 한국에 와 있는 적에게 타격을 가할 수 있도록 모든 공군력을 동원하여 최대한의 이익을 얻어내라고 명령했다. 이 명령을 받은 미 극동공군사령관 웨일랜드는 평양폭격계획을 수립했고, 7월 30일 전폭기 354대를 투입하여 평양을 폭격했다.
 
휴전회담이 지속되는 와중에도 미공군은 평양을 폭격했다. 대표적으로 1952년 7월 11일 평양을 목표로 한 전면적인 공격에서 주간에 1254회의 공습 출격이 있었고, 야간에는 B-29 폭격기의 54회 출격이 있었다. 1952년 7월 11일과 12일 가공할만한 평양폭격이 가해졌는데 폭격의 목표물은 말 그대로 살아 있는 모든 것이었다. 이 때 1만여 통의 네이팜 폭탄과 6만 2천 발의 탄약, 697톤의 폭탄이 북한 주민들의 머리 위에 쏟아졌고, 하루에만 평양시민 7,000명이 사망했다.
 

2018년 북한에서 열린 반미 시위 북한 사람들 반미의식을 가진 이유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무차별 폭격 경험에 입각한 것이며, 현재까지도 북한을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다. ⓒ 연합뉴스 출처

 
이처럼 평양은 전쟁 기간 3년 동안 미군의 폭격에 시달렸다. 그리고 그에 따른 인명피해도 상상을 초월했다. 현재 북한이 반미 국가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에는 이러한 공중 폭격의 기억과 역사의식이 강력히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폭격의 피해는 얼마나 심각했는가?
 
『한국전쟁의 기원』 저자로 유명한 브루스 커밍스는 저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에서 당시 미군의 폭격이 얼마나 참혹했고 파괴적이었는지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1968년 네이팜의 주요 제조사인 다우케미컬(Dow Chemical)은 대학교에 가서 신입사원을 선발하려 했으나, 대부분의 대학교에 들어갈 수 없었다. 베트남에서 네이팜이 쓰였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미국 내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한국에서도 은밀히 막대한 양의 네이팜이 투하되었다. 파괴적인 효과는 훨씬 더 강했는데, 베트남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인구가 조밀한 도시와 도시 산업 시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p.217

브루스 커밍스는 미공군의 북한 폭격의 파괴 규모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에 비해 컸다고 주장했다. 아래의 내용은 그의 저서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미국 공군의 평가에 따르면 최종적인 도시 파괴의 규모는 독일과  일본에 비해 훨씬 컸다. 프리드리히는 영국 공군이 1942~1945년 동안 65만 7,000톤의 폭탄을 독일에 투하했으며, 영국과 미국이 투하한 폭탄의 총량이 120만 톤이라고 추산했다. 미국은 한국에서 63만 5,000톤의 폭탄을 투하했는데, 이에 비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태평양 전쟁 구역 전체에 투하한 것이 50만 3,000톤이었다. 일본의 60개 도시가 평균 43% 수준으로 파괴되었던 반면, 북한의 도시와 마을의 파괴 정도는 40~90%까지로 추산되었다. 북한의 22개 주요 도시 중에서 18개 도시는 최소한 50%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p.226

김태우 교수의 신간인 『냉전의 마녀들』에는 평양이나 원산 외에도 미군의 폭격이 살인적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래의 내용은 1950년 11월 미 공군의 신의주 폭격에 관한 것이다.
신의주 대표들은 1950년 11월 8일의 공중폭격에 대해 설명하는 데 대부분의 브리핑 시간을 소비했다. 그들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1950년 11월 8일 유엔군 소속의 비행기 100대가 신의주를 집중폭격했다. 이 날의 폭격이 신의주를 향한 최초의 공중폭격이었다. 이날 총 3017호에 달하는 공공건문들 가운데 2,100호가 파괴되었다. 또한 1만 1,000호 이상의 일반 주택들 가운데 680호가 파괴되었다. 5,000명 이상의 주민들이 살해되었는데, 그중 4,000명 이상이 여성과 어린이들이었다.

『냉전의 마녀들』 p.136
 

냉전의 마녀들 『폭격』의 저자 김태우 교수가 2021년에 쓴 신간이다. 한국전쟁 시기 북한 지역에서 활동한 국제여맹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 알라딘

   
2021년 뉴스타파는 한국전쟁 관련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시작점인 1부가 미군의 폭격을 다뤘다. 다큐멘터리에는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김동춘 교수도 나온다. 김동춘 교수는 북한의 피해가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완전 융단폭격으로 인해서 초토화시켰다고 봐야죠. 평양과 원산은 멀쩡한 건물이 두 개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원산폭격이라는 말도 나온 것처럼, 도시는 완전히 다 폭파되었다고 보면 되죠. 적어도 군인, 민간인 포함해서  100만을 훨씬 넘는 사람들이 폭격에 사망했다고 봐야 되겠죠. 그러니까 북한이 6.25 전쟁 때 폭격으로 입은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뉴스타파. 〈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1화 : 초토화 폭격.  2021.07.27 
 

이처럼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인한 인명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고, 특히 북한이 받은 피해는 대규모의 인명 살상으로 나타났다. 대략 100만 명 이상의 북한 사람이 폭격으로 죽었다. 이러한 폭격은 남한에서도 작지않은 규모로 일어났다. 현재 북한이 반미국가가 된 이유에는 미군의 무차별 폭격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폭격은 남한에서도 일어났으며, 피해 사례가 적지 않다. 앞으로 평화의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선, 이러한 역사도 인정해야 하며,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참고문헌

단행본

김태우, 『폭격』, 창비, 2013

브루스 커밍스, 조행복(역),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현실문화, 2017

김태우, 『냉전의 마녀들』, 창비, 2021

기사

임영태, 「미군에 의한 학살사건(2)-미공군의 북한지역 공중폭격과 초토화」, 『통일뉴스』, 2017.02.14.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9756&replyAll=&reply_sc_order_by=I

영상물

드라마 <서울 1945> 52화

〈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1화 : 초토화 폭격. 뉴스타파. 2021.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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