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수수께끼와 두 얼굴의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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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ENHEOROGEE(woodbook)등록 2022.02.08 17:25
과거는 지워졌고, 지워진 것은 잊었고, 거짓이 진실이 되었다.
- George Orwell (조지 오웰)
 
한국전쟁 중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수없이 많이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한국전쟁을 연구해 온 학자들은 이 전쟁을 가리켜 '아직도 모르는 전쟁', '수수께끼', '미스터리', '의혹' 같은 표현이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전쟁에 대해 사용하고 있다. 그 뜻은 한국전쟁의 해석에 대해 중대한 정보가 빠졌거나 잘못된 설명이 지배하고 있을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미 국무부 동북아지역 정세분석관이었던 조지 워싱턴 대학 존 메릴(John Merill) 교수는 그의 저서《새롭게 밝혀낸 한국전쟁의 기원과 진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국전쟁이 어떻게 일어났는가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 문제는 이제 별로 '조용하지 않은 나라'를 뒤덮고 있는 아침 안개처럼 불분명한 의혹에 싸여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경위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 한국전쟁의 원인에 대해 이처럼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는 것은, 거기에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있음을 말해준다.
 
군사 요지는 폭격이 자제된 반면 민간인에 대한 공격은 최악
 
한국전쟁의 수많은 수수께끼 중 하나는 군사 요지는 폭격이 자제된 반면 민간인에 대한 공격은 최악이었다는 기가 막힌 사실이다.
 
이북의 모든 지역은 미군의 폭격에 의해 초토화가 되었다. 미군 비행기는 북한에 3만 2천 500여 톤의 네이팜탄을 포함해서 63만 5천 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2차대전 기간 중 태평양 전선 전체에 50만 3천 톤의 폭탄이 투하된 것과 비교하면 이 작은 북한 지역에 폭탄으로 두 번 세 번 도배를 한 것과 다름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가장 안전한 장소는 바로 전쟁 보급품이 쌓여있는 나진이었다. 나진은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한으로 투입되는 보급물자가 도달하는 항구다. 소련으로부터의 보급 기지가 된 나진을 공격하지 말라는 지시는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미 합동참모본부는 1951년 2월 21일에 함경북도 나진에 대한 폭격금지를 명하고, 3월 1일에는 다시 압록강 연안의 중국 발전시설에 대한 폭격도 금하면서 현지의 사령관 맥아더에게 제한전쟁을 명령했다. 맥아더 장군은 자서전 "Reminiscences"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만주나 시베리아가 아닌 국경에서 불과 수 마일 떨어진 나진의 중요한 공급 센터에 대한 폭격을 거부당한 것이다. 나진은 러시아 블라디보 스토크에서 북한군대를 위한 보급품을 전달하는 물품 창고였다. 나는 나의 무기들 이 단계별로 박탈되고 있다고 느꼈다.
 
아마도 이러한 의아한 점을 영국의 저널리스트 A. K. Chesterton(체스터튼)의 저서 "The new unhappy lords: An exposure of power politics"에서 가장 잘 설명하는 듯하다. 체스터튼은 한국전쟁의 가장 중요하고 특이한 점은 어느 쪽도 완전히 이기지 않도록 함으로 분단이 유지되도록 '세심하게 디자인' 되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체스터튼의 말은 한국전쟁에 대해 미국의 감춰진 얼굴을 설명하는 것이다
 
미리 작성된 통킹만 결의안
 
베트남 전쟁은 여러 점에서 한국전쟁과 유사하다. 베트남 전쟁 역시 군사분계선이 외세에 의해 설정되어 동족끼리 전쟁을 했다. 또한 베트남전을 "Strange war"(이상한 전쟁)으로 불린다.
 
베트남에서 미국의 전쟁개입 확대를 정당화하는 통킹만 사건이 1964년 8월 2일 일어났다. 미 해군 구축함 매독스함(USS Maddox)이 통킹만에서 북베트남 어뢰정에 선제공격을 당했다는 것이다. 1964년 8월 4일 존슨 대통령은 통킹만에서 북베트남 어뢰정이 미국 해군 구축함을 공격했다고 발표한다. 3일 후 하원은 416-0, 상원은 88-2로 통킹만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베트남 전선이 전면으로 확대된다.
 
놀랍게도 통킹만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통킹만 결의안은 미리 작성돼 있었다. 1967년 12월 21일 윌리엄 풀 브라이트(J. William Fulbright) 상원의원은 통킹만 결의안에 대한 윌리엄 번디(William P. Bundy) 당시 국무부 차관보의 비밀 증언에 대해서 발표했다. 딘 애치슨(Dean G. Acheson)의 사위이기도 한 번디 차관보는 통킹만 사건이 일어나기 전 자신이 통킹만 결의안을 작성했다고 증언했다.
 
펜타곤 문서(The Pentagon Papers)는 1945~1968년 동안 베트남 전쟁의 기원과 미국의 개입을 상세히 조사한 7,000쪽의 기밀문서다. 펜타곤 문서의 작성에 참여한 대니얼 엘즈버그(Daniel Ellsberg)는 11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을 수 있는 위험을 각오하고 1971년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여러 언론에 그 비밀서류를 제공한다. 그 문서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베트남 전쟁은 북베트남의 도발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미국이 조작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유엔 결의안을 미리 준비해 두고도 남침을 예측하지 못했다니?
 
조작된 통킹만 사건으로 베트남전을 확대한 린든 존슨 정권에 도전하여 베트남전 반대 여론의 기폭제가 된 최초의 언론은 I. F. 스톤즈 위클리 《I. F. Stone's Weekly》라는 4쪽짜리 신문이다. 스톤(I. F. Stone)이 1인 신문을 창간하게 된 동기는 블랙리스트에 올려져 일자리를 구할 수 없게 되어 1953년부터 1971년에 이르기까지 광고 없이 그의 아내와 함께 취재, 집필, 편집, 그리고 배포까지 모든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가장 놀라운 점은 그가 블랙리스트에 올려진 이유는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해 미국의 공식발표를 도전하는 책을 출간했기 때문이다.
 
1952년 스톤이 출간한 《한국전쟁 비사》(The Hidden History of Korean War)에서는 한국전쟁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기습으로 시작되었다는 발표에 의문을 갖는다. 그 이유는 그 당시 뉴스들 중에 미국 정보 부서들이 북한의 남침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기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정보부에서 북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었으면서도 미국은 남한에 전쟁을 억제할 수 있는 군사적 지원을 충분히 제공하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키려 는 '책략'의 정황 증거라고 스톤은 주장했다.
 
당시 남한은 미국과 UN 측에 북의 남침 가능성을 경고하는 한편,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보는 일부 미국 정책결정자들의 태도에 반발하며 군사 지원을 확대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또한 신성모 국방장관은 1950년 5월 10일 기자회견을 열어 대규모의 북한군이 38선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북의 침략이 곧 일어날 위험이 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그 이후 북의 침략 위험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더 이상의 언급도 없었다. 스톤 기자는 이렇게 전쟁 발발의 경고가 갑자기 잠잠해진 이유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으로부터 남침을 유도하자는 '권유'를 받았을 것으로 보았다.
 
전쟁 발발 이틀 후인 1950년 6월 27일 유엔위원회는 북의 침략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는 남한 정보원의 보고를 안전보장이사회에 전달했다. 하지만 북의 남침이 있기 6개월 전 한국의 육군 참모총장은 유엔위원회에 북한의 침략 가능성을 알린 바 있다. 또한 북의 남침 가능성을 발표한 신성모 국방장관의 5월 10일 기자회견 이후, 유엔위원회는 북한의 침략 준비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를 받았다. 남침 하루 전인 6월 24일 자 유엔위원회 문건에는 6월 9일부터 38선상에 일어나는 변화는 군사적 충돌의 임박함을 나타낸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미 국무부는 북한의 침략에 놀란 척 했지만 사실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1951년 6월 5일 미 의회의 국무부 예산에 관한 국회 공청회에서 존 히커슨(John D. Hickerson) 유엔사무국 차관보는 북한의 침략에 대한 유엔 결의안을 사전에 준비해 두었다고 Ferguson 상원의원의 답변에서 시인했다. 전쟁이 일어나기도 전에 유엔군 참전에 대한 결의안이 이미 준비돼 있었던 기가 막힌 사실이다. 이것은 통킹만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의회 결의안이 미리 작성돼 있었던 것과 비슷하다.

미국의 두 얼굴은 진행형이다
 
2003년 5월 9일 자 영국 언론 The Guardian에 엄청나게 중대한 기사가 게재되었다. 'The two faces of Rumsfeld'(두 얼굴의 럼즈펠드)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럼즈펠드 장관의 두 가지 모순된 행동을 소개한다:
 
2000년: 럼즈펠드, 북한에 원자로 설계도와 주요 부품을 2억 달러에 수주한 스위 스 기업의 이사로 재직
2002년: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 북한을 악의 축이자 테러 국가로 선언하고 정권을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
 
럼즈펠드는 1990~2001년 스위스 ABB의 이사로 재직하면서 연봉 19만 불을 받았다. ABB가 북한에 판매한 두 개의 원자로는 경수로지만 플루토늄을 생산하기 때문에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한다.
 
럼즈펠드는 ABB 이사회에서 북한에게 경수로 판매 안건이 상정된 기억이 없다고 국방부 대변인을 통해 말했다. 그러나 ABB 대변인은 이사진들은 그 당시 북한과의 거래를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일본의 독립 저널리스트 다니구치 나가요(谷口長世) 씨는 '북핵 위기라는 허상'에서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된 과정을 더 상세히 다룬다.
 
국제 '핵 암시장' 네트워크를 통해 유럽 및 세계 각국으로부터 기술과 부품 그리고 특수소재 등이 파키스탄을 통해 북한으로 흘러들어 갔으며 미국이나 네덜란드 정부 당국은 이런 부정 수출의 존재를 오랫동안 알고 있으면서도 방치해 왔다는 것이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경수로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핵 암시장' 네트워크를 통해 다양한 필수 품목들이 북한으로 흘러들어 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된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럼즈펠드가 보여준 두 얼굴이 바로 미국의 얼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디언의 기사는 럼즈펠드의 두 손가락을 보여주는 사진을 게재했는데, 그것은 미국이 가진 두 개의 얼굴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앞에서는 세계평화를 강조하지만, 뒤에서는 핵확산이 일어나도록 교묘한 조작을 하는 것이다.
 
다니구치는 북한이 핵보유국이 된 궁극적인 상황을 설명한다. 동아시아에서의 긴장이 고조되면 될수록 군사산업 입장에서는 더욱더 유망한 시장으로서의 가치가 증가하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평화와 화해의 움직임에 진전이 있으면 군사산업의 시장가치는 하락한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한 상황에서 2017년 4월에 발표된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의 '세계 군사비 동향(2016년)'에 의하면, 세계 총 군사비 추계는 1조 6,860억 달러로 전년 대비 0.4% 증가했다. 이렇게 2011년 이후 세계적으로 큰 변동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는 가운데 유독 동아시아에서만 같은 기간 74%가 증가한 3,080억 달러(2016년)의 군사비를 책정하게 된 것이다.
 
이 시기는 남북정상회담이 실현되어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평양에서 만났고 같은 해 10월에는 Madeleine Albright(매들린 올브 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첫 평양 방문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한반도 평화에 대한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클린턴 대통령의 임기가 종료되고 부시 정권이 들어서자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게 된다.
 
2002년 새해 국정연설에서 부시 대통령은 북한을 이란, 이라크와 더불어 '악의 축'이라고 규정하면서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조사관을 추방하고 2003년 1월에는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했다.
 
지난 70년 동안 한반도 평화를 달성하기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를 이해하려면 이러한 미국의 두 얼굴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앞에서는 평화를 강조하지만 뒤에서는 평화가 일어나지 않도록 교묘한 조작을 하는 것이다.

*위의 글은 "두 얼굴의 미국과 한국전쟁"(오로지·남호정 저)에 제시된 내용을 기반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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