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집요하게 버티려했던 '가정'이란 걸 '정리'하려 하고 보니 새삼 드는 생각이 있었다. 아주 오래된 숙제, 내 인생의 미션, 그렇다. 난 아주 오랫동안 내 인생의 숙제를 미뤄두고 있었다는 '절감'이 들었다. 길에 끌린다. 미뤄둔 인생 숙제 운운하다가 길이라니? 가로수가 늘어서 있는 길에 들어서면 숨이 길게 내쉬어진다. 그저 그 길게 늘어선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느긋해진다. 때로는 그 길을 사진으로 담아두기도 한다. 왜 그렇게 길에 끌릴까? 진부하지만 '프로스트'의 시를 들먹일 수 밖에 없겠다. 단풍 든 숲속에 두 갈래 길,/한 몸으로 두 길을 다 가볼 수 없기에/ 난 한참 서운한 마음으로/ 전나무 숲속으로 접어든 한쪽 길을/ 끝 간 데까지 바라보고 서 있었지요.//그러다가 똑같이 아름다운 딴 길을/ 어쩌면 더 나을 성싶었던 그 길을 택했지요. 아마도 이 시가 오래도록 애송되는 이유는 인생의 후일담이 되었기 때문이리라. 살아보니 자신이 인생의 기로에서 두 갈래 길 중 하나의 길을 택했었다는 그 '후일담' 말이다. 나 역시도 그렇다. 인생에서 두 갈래 길 중 하나의 길을 선택한 사례야 많고도 많겠지만, 이 시점에 돌아보니 내 인생의 '기로'가 된 두 번의 선택이 떠오른다. ▲ 길 ⓒ 이정희 한번은 10살 때 부모님이 이혼을 하고, 그 덕분에 내가 아이 없는 큰 집에 입양된 처지였음을 알게 되었을 때였다. 영화 <스타워즈>처럼 학교 방과 후 찾아온 작은 아버지가 '내가 니 진짜 아비다'라며 다짜고짜 나를 데리고 작은 집으로 갔었다. 아직 어렸던 나는 당연히 울고불고 엄마를 찾았다. 10살이 될 때까지 몇 번 보지도 않은 작은 어머니, 아버지가 내 친부모님이라니. 당장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엄마'했던 그 '엄마'가 큰 엄마라니. \ 그런데 그곳에 적응이 미처 되기도 전에 친부모님이라던 작은 엄마, 아빠는 나를 친할머니 집으로 보냈다. 부모님이 살던 곳은 평택, 서울 친할머니 집에 언니 들이 '유학'을 가 있었고, 친부모님은 아직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나를 공부하라며 그곳으로 보냈다. 거기라고 나을까, 친할머니에 고모, 그리고 이제는 친언니가 된 작은 집 큰 언니, 작은 언니와 함께 살아야 하는 시간은 역시나 어린 내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시간이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그 열 살에, 새로 살림을 차린 아버지 집에 간다며 할머니 집을 나선 나는 이제는 진짜 엄마가 아니라는, 지금까지 나를 길러준 엄마를 찾아갔다. 그 10살의 선택이 아주 오랫동안 내 인생을 결정했다. 돌아보면 10살 밖에 안된 내가 무얼 알았겠는가 싶지만 그 '선택'이 새삼 다가왔다. 또 한 번의 선택은 25살에 한 결혼이다. 번갯물에 콩 구어먹듯 그 누가 말릴 새도 없이 후딱 해치운 결혼, '사랑'이란 결심이었고, 그 선택에 지난 몇 십년간 충실하게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막상 그 충실하게 살던 삶을 정리하는 시점이 되자, 오래전 선택에 대한 질문이 내 안에서 솟는다. 열심히 살지 않아서가 아니라, 애초에 내가 했던 선택에 담긴 의미를 묻게 된 것이다. 좋아서였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그립고 좋아서였고, 그 사람을 사랑해서였다. 그런데 이제 내 안에서 다른 물음이 등장한다. 정말 그저 좋아서였냐고? 혹시 두려워서 그런 게 아니었냐고? 내 앞에 펼쳐진 인생의 길이 두려웠던 건 아니었냐고. 다시 프로스트의 시로 돌아가서, 그 시는 '두 갈래 숲속 길이 나있었고, 나는 발길이 드문 길을 택했고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답니다.'라는 상당히 인생에 대한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마무리로 끝난다. 하지만 나는 내 앞에 펼쳐진 인생의 길이 무섭고 두려워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를 선택한 경우라는 깨달음이 들었다. 10살 시절, 두 분은 징글징글하게 싸웠지만, 그래도 나를 '무남독녀 외동딸'이라며 아낌없이 사랑해 주셨던 그 '가족'의 환상에서 나는 놓여나지 못했다. 두 분의 이혼과 친부모님과 형제의 등장이라는 내 앞에 다가온 현실을 감당하는 대신 익숙한 '환타지'를 쫓았다. 오랫동안 어른들 탓을 했지만, 제 아무리 10살이라 핑계를 대도 결국 복잡한 관계로 뛰어든 건 다름 아닌 나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익숙한 의지처는 결국 의지가 되어주지 못했다. 홀로된 엄마는 나 못지않게 의존적인 인물이라 나를 거두지 못했고, 나는 오래도록 아버지의 빈 자리에 연연했다. 이제 와 돌아보니 낳아주셨던, 길러주셨던 내 아버지들은 그리 책임감있는, 의지가 될만한 분들이 아니셨는데도 아버지같은 사람을 그리워했다. 그래서 '아버지'같은 사람이 될 만한 사람과 일찍 가정을 꾸렸다. 말은 그럴듯했지만 아버지같은 사람은 없었다. 아니 그보다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그 서두른 결혼이라는 과정 속에서 25살 나는 살아가야 할 사회적 삶으로부터 도망친 것이었다. 두려웠다. 밥 빌어먹기 십상이라며 어른들이 반대하던 사학과를 고집스레 가놓고, 거기에 통장 하나 딸랑 들고 뛰쳐나와 운동까지 했는데 살아갈 길이 막막했다. 아니 이제와 고백하건데, 과연 그 시절 통장 하나 딸랑 들고 뛰쳐나오는 대책없는 선택에 '사회'라는 내가 나설 인생에 대한 두려움이 전제되어 있었다. 이 또한 후일담식 해석이겠지만, 이제 깃들어 의지하던 삶을 정리하는 마당이 되니, 새삼 내가 나로 살아내야 할 삶의 숙제를 오랫동안 미뤄왔었구나라는 '실감'이 드는 것이다. 이건 결혼 생활을 성실히 살아냈는가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아니 다른 문제가 아닐 지도 모른다. 다 큰 아이들이 아버지에 대한 엄마의 태도를 문제 삼는 것을 보면서 내가 믿지 못한다 하면서도 의존적인 태도로 살아왔구나라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나로써 온전히 걸어내야 할 인생 길, 그 길을 조금 더 편하게 걸어보려 했던 선택들이 결국은 이제 다시 나를 그 길에 서도록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인생의 다하지 못한 미션은 늘 다시 돌아오게 된다고. 아마도 내가 길게 뻗은 길에 연연했던 이유는 여전히 내 앞에 펼쳐진 인생의 행로에 대한 무의식적인 '연연함'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이제라도 걸어보려 한다. 나로써 온전히 걸어가야 할 인생의 길을. 사실 난 내가 되게 주체적이고 당당한 인간이라 자부해왔다. 그런데 돌아보니 거기엔 아주 많이 외로움을 타고 그래서 어떻게든 누군가에 의지해서 살아가려 했던 자존감낮은 한 아이가 있다. 어쩌면 난 10살 시절로 부터 한 뼘도 자라지 못한 채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죽을 때까지 '아이'로 살다 죽을 수는 없지 않겠나, 있지도 않은 엄마, 아빠는 이제 그만 찾아야 겠다. 아빠처럼 나를 품어줄 사람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그 10살의 시절로부터 한 발자국씩 걸어나가 보련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https://brunch.co.kr/@5252-jh/ 에도 실립니다 #<낼 모레 육십, 독립선언서 2>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