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만에 주인에게 돌아온 책, 문헌통고

도산서원 광명실의 서책·목판 135점, 영천이씨 농암종택으로 반환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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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영(82leeanmbc)등록 2022.05.03 14:52
상당수 가정의 책장에 남의 책이 한두 권 정도 있을 겁니다. 지인에게 빌린 책으로 며칠 보다가 돌려줄 요량으로 가져 왔다 깜빡 하고 그대로 보관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일 텐데요. 제 책장에도 남의 책이 몇 권 있습니다. 몇 년 전 책도 있고요. 며칠 전에 잠시 읽고 주겠노라고 가져온 책도 있네요.
 
사실 몇 년 전에 빌린 책을 인제 와서 돌려주겠다고 하기도 어색한 게 사실입니다. 근데 며칠 전, 몇 년 전이 아니고 500년 전에 빌린 책이라면 어떨까요? 그런 책이라면 지금 가지고 있는 사람이 실 소유자가 아닌가 싶은데요.
 
무려 500년 전에 빌린 책을 되돌리는 뜻깊은 행사가 5월 2일 안동 도산서원에서 지역 유림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습니다.
 

하연 이중량공 내사본 및 적선 어필 목판 반환식(안동 도산서원) 도산서원 운영위원회가 '문헌통고'와 '적선' 목판을 원주인인 농암 종가로 반환기념식(5월 2일) ⓒ 한국국학진흥원

  
이야기는 조선시대 선조 때인 1570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퇴계 이황 선생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빌려온 책은 모두 돌려주라"라는 유지를 후손들에게 남겼습니다.
 
지난 2003년 안동 도산서원은 500년 넘게 서원 광명실과 장판각에 보관했던 서책과 책판(책 인쇄용 목판) 만여 점을 국학 전문기관인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했습니다. 화재와 도난 등의 위험으로부터 유물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때 기탁된 책 가운데 '문헌통고'(文獻通考) 133책과 '적선'(積善) 목판 2점을 원래 주인인 영천이씨 농암 종가로 반환하겠다는 결정을 도산서원 운영위원회가 내린 겁니다. 이 책은 당시 퇴계 선생께서 농암 이현보 선생의 종가로부터 빌린 책입니다.
 
"冊主永陽李公幹 供覽眞城李景浩."(책주영양이공간 공람진성이경호)

문헌통고 책에 적힌 기록으로 "책 주인인 영양 이공간이 진성 이경호에게 보라고 주다"입니다. 영양(영천의 옛 이름) 이공간은 이중량 선생의 자(字)이고, 진성 이경호는 퇴계 이황 선생의 자(字)입니다.
 

'문헌통고' 서책 끝 부분 기록 "冊主永陽李公幹 供覽眞城李景浩" 문헌통고 책에 적힌 기록으로 "책 주인인 영양 이공간이 진성 이경호에게 보라고 주다" ⓒ 한국국학진흥원

  
이 기록에 따라 문헌통고 서책의 주인은 퇴계 선생이 아니라 영천이씨 즉 농암 이현보 종가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당시 농암 선생은 퇴계 선생의 고향 선배였고 이중량은 농암 선생의 넷째 아들입니다.
 
이 분들은 서로 책을 빌리고 빌려주는 사이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책이 귀했던 까닭으로 많은 책을 소유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책을 누가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그 집에 가서 빌린 뒤 이를 베끼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래서 필사본이 많습니다.
 
특히 농암 종가와 퇴계 종가는 안동시 도산면 한 지역에 있습니다. 서로 가까운 이웃이었습니다. 지금도 안동시 도산면 백운로 퇴계 종가에서 도산면 가송길 농암종택까지는 13.7km로, 그리 멀지 않아 걸어서도 갈 수 있습니다. 그 옛날 퇴계 선생이 걷던 이 길은 '예던길'로 불립니다. 퇴계 선생이 봉화 청량산을 오가던 길로, 중간에 농암종택이 있습니다.
 
원주인에게 되돌린 '문헌통고'는 1558년 조선 명종이 당시 사헌부 집의에 재직 중이던 하연(賀淵) 이중량(李仲樑)에게 직접 하사한 책입니다. 임금이 하사했다는 내사본으로 책 첫 장에 붉은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문헌통고' 첫 장 내사기 문헌통고(1책 앞장;내사기內賜記)- 조선 명종이 이중량에게 하사했다는 내사본, 붉은 도장이 찍혀있다 ⓒ 한국국학진흥원

 
퇴계 이황과 하연 이중량은 서로 막역한 사이로 1534년(중종 29년)에 문과에 동반 급제한 이후 관직 생활 등 일생을 함께했다고 합니다. 두 집안은 안동 예안에 대대로 세거하면서 오랜 세월 동안 가문 간의 정의를 돈독하게 다져왔습니다. 500년 전에 빌린 책임을 알고 되돌려 줄 정도로 두 가문 간 정의는 깊고도 깊었던 모양입니다.
 
도산서원 운영위원회는 이 기회에 선조 어필 '적선'(積善) 목판도 함께 돌려준다고 합니다. 이 목판은 농암 선생의 여섯째 아들 매암(梅巖) 이숙량(李叔樑)이 선조에게 하사받은 것입니다.
 

'적선' 목판 중 積자 판 적선 목판 첫 글자 적(積)- 조선 선조가 이숙량에게 하사한 목판-한국국학진흥원 제공 ⓒ 한국국학진흥원

        

'적선' 목판 중 '善'자 판 적선 목판 둘째 글자 선(善)- 조선 선조가 이숙량에게 하사한 목판 ⓒ 한국국학진흥원

참고로 문헌통고는 역대 중국 왕조의 전장 제도(제도와 문물, 법칙)를 다룬 서적으로 사마광의 '자치통감'과 함께 선비들이 읽어야 할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문헌통고'와 '적선' 목판은 2003년에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돼 진흥원 수장고와 장판각에 보관 중입니다. 연구원들이 책을 분석하고 연구 조사하다 "冊主永陽李公幹 供覽眞城李景浩" 기록을 발견하면서 반환 행사가 열린 겁니다. 하지만 소유권만 농암 종가로 넘어갈 뿐 책과 목판은 한국국학진흥원에 그대로 보관됩니다.
 
한국국학진흥원 정종섭 원장은 "책이 귀하던 시절, 133책이라는 큰 규모의 책을 빌려주며 돌려볼 수 있었던 것은 두 선생의 학문 열정과 깊이, 그리고 보기 드문 우정을 알 수 있는 데다, 후손들의 뜻깊은 정리 등을 현대인들이 배우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라며 행사 취지를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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