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바람이 머무는 곳- 솔뫼성지 나이를 먹어갈수록 아름답고 싱싱했던 젊은 날의 추억을 함께 공유하던 친구들이 그리워지고 시끄럽고 번잡한 소음의 도시보다 묵직한 안정을 주는 자연 속에서 더 편안해지는 게 비단 나 혼자만의 감정은 아닌듯하다. 고단했던 세월의 무게가 얼마나 그 모습에 내려앉았을까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음들이 맞닿아 그간 소원했던 대학 동문들의 반가운 연락들이 잦아졌고 내친김에 시간이 맞는 친구들을 만나러 잠시 당진에 들리게 되었었다.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시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수다를 떨었지만 헤어짐이 아쉬워 산책하며 남은 수다를 마무리하자며 들린 곳이 솔뫼성지였다. 충청도 내포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솔뫼는 '소나무로 이루어진 산'이란 뜻이며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장소로 전해지며, 중세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이행기에 발생한 천주교 전래 및 사상과 신앙의 자유에 대한 박해 과정 등을 집약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 종교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사상적 변천을 반영하는 중요 유적으로 평가된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은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선비가 살만한 곳을 찾아 전국을 답사하며 그 결과를 『택리지』에 남겼고 충청도에서 제일 좋은 땅이 내포라했기에 그 좋은 기운이 뻗쳐있을 것 같은 솔뫼성지 방문이 더욱 기대되었다. '내포'는 바닷물이 육지 깊숙이까지 들어와 포구를 이루어 배들이 드나들며 새로운 문물을 전해주는 장소였기에 서학인 천주교 역시 빨리 들어와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김대건 신부의 가문은 천주교 신앙에 귀의한 후 잦은 박해로 가족들이 여러 차례 투옥되고 고문을 받다가 순교까지 하여 솔뫼를 '순교자의 고향'으로 만들었다. 유교 사상이 뿌리 깊이 박혀있던 시대였으니 천주 앞에서는 높고 낮음도 귀하고 천함도 없으며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공평하다는 그 교리를 전하는 전하던 김대건 신부의 어려움은 보지 않아도 어땠을지 상상이 된다. 본 기자는 천주교 신앙인은 아니지만 모진 핍박 속에서도 굽히지 않았던 김 신부의 정신력과 의지 그리고 그 믿음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어렵다고 포기하고 힘들다고 멈췄더라면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뿌리내릴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왜 천주교 신앙인들이 이곳을 성지로 생각하고 방문하는지 조금은 이해가 된다. 자신들의 믿음에 녹이 슬지않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솔밭길에 새겨놓고 오는 것이리라. 어른보다 더 어른답게 자기 앞가림을 하며 사회를 이끌어가는 청년들도 많지만 조금만 힘들고 어려우면 쉽게 포기해버리고 실패에 대한 핑계를 먼저 찾는 청년들이 이러한 정신을 조금만 배워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자신이 믿는 천주를 전하며 왜 어려움이 없었을까. 그러나 죽음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았던 그 열정과 패기, 신부로서 자기 일에 대한 투철했던 사명감과 믿음이 있었기에 그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아름다운 청년들도 너무 쉽게 포기하고 두려워하기보다는 죽을힘을 다해 이겨내려는 노력과 의지를 이곳에 와서 배워가기를 바란다. 그렇게 좋았던 햇살을 숨겨놓고 차가운 바람만 내어주는 짓궂은 하늘 탓에 긴 시간을 머물며 구석구석 돌아보지는 못했지만, 눈이 시원한 소나무 동산과 성서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놓은 조형물들의 조화를 돌아보며 수다를 떠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소나무 동산 곳곳에 설치된 조형물을 통해서 조물주가 인간들을 사랑해서 예수를 보내어 그 죄를 대신하게 했던 사랑,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면서도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빌었던 예수의 사랑을 말하고 싶은 건 아니었을까. 종교를 떠나 이렇게 어렵고 퍽퍽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했던 예수의 그 외침을 한 번쯤은은 실천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솔뫼성지를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내가 먼저 그 사랑을 실천해보자 다짐해 본다. 덧붙이는 글 이슈라이프 중복게재 #충남 #당진 #솔뫼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