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훈처의 김가진 서훈 보류를 논박한다.

검토 완료

박용규(hanbong)등록 2022.07.22 13:57
한국 독립운동의 심장부인 대한민국임시정부, 그 기관지인 <독립신문>에서 김가진이 1922년 7월 4일 서거하자 곧바로 "김가진은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설립된 후에 광복사업에 공헌하고자 상해에 왔고, 이후 강건한 기상으로 조국독립에 매진하였다."(「동농 김가진 선생 서세」, <독립신문>, 1922, 7, 8.)라고 헌사하는 글을 게재하였다. 이렇게 곧바로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사람들이 김가진을 평가한 것이다. <동아일보>에서도 김가진에 대해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의 수령"으로 "조선독립을 뜻하는 사람에게 공경을 받았다."(「김가진씨 장서」, <동아일보>, 1922, 7, 7.)라고 기술하였다.
 

?김가진씨 장서?, <동아일보>, 1922, 7, 7. 김가진을 “독립운동의 수령”이라고 기술했다. ⓒ 박용규

 
김가진(1846∼1922)은 1919년 3·1운동이 전개되던 시기에, 독립운동단체인 조선민족대동단을 결성하고, 총재로 취임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10월 30일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망명한 이후, 전협·나창헌 등과 협의하여 같은 해 11월에 33명이 기재된 제2의 독립선언서(일명 '대동단 선언')를 작성·발표하여 제2의 만세선언을 추진했다. 같은 해 1919년 12월 상하이 민단(民團)이 주최한 연설회에서, 연설을 통해 동포들에게 독립운동에 매진할 것을 당부하였다.
1920년 대동단 해외부를 설치하여 대동단 총재 명의의 「포고문」과 「갹금권고문」을 작성·배포하여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 모금에 앞장섰다. 1921년 4월 북간도의 북로군정서 고문을 역임하였다. 1922년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추천되기도 하였다. 1922년 7월 4일 77세의 나이로 서거하자,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국장으로 상하이에서 장례를 치러주었다.
그런데 납득할 수 없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그의 후손들이 김가진의 서훈을 신청하였으나, 번번히 보류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국가보훈처는 독립운동 참여 이전 김가진의 행적을 문제 삼고 있다고 한다.
필자는 후손으로부터 받은 김가진 서훈 보류 통보 사유를 확인하고 경악하였다. 보훈처는 김가진의 "일제 강점 전후 행적이상(의병탄압, 강제병합 찬양 논란, 수작 등)"을 미포상 사유로 들고 있었다.
첫째,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수작' 행위를 문제 삼았다. 그러나 '수작'을 미포상 사유로 제시한 것도, '후 독립운동'을 한 사람에게는 관계가 없는 일이다. 수작자가 '수작' 이후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은 '수작'을 사망선고한 행위이다. 귀감이 되는 행위를 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대부분의 수작자는 일제가 준 작위를 지닌 채, 반민족 행위를 일삼았다. 수작자가 독립운동전선에 참여한 자는 극히 적었다. 수작자임에도 독립운동전선에 참여한 사람에게 그 행위를 높이 사서, 보훈처가 그 수작자에게 독립유공 훈장을 주어 포상을 한 사례가 있다. 민태곤이 여기에 해당한다. 잘한 일이었다.
민태곤(閔泰崑, 1917∼1944)은 남작 직위를 유지한 채로, 독립운동을 하였고, 죽을 때까지 남작 직위를 가지고 있었다. 민태곤의 남작 직위는 죽고 난 뒤에도 계속 유지되다가, 그 동생 민태륜(閔泰崙, 1924∼2009)이 1945년 2월에 형 민태곤의 남작을 이어받았다.(「서임급사령敍任及辭令」, <(일본내각)관보>, 1945, 9, 14.)
 
 

?민태곤씨 습작?, <매일신보>, 1934, 12, 16. 민태곤이 ‘남작 민규현의 상속인’으로 작위를 이어받았다고 기재되어 있다. ⓒ 박용규

 
 

?민태곤씨 습작?, <朝鮮新聞>, 1934, 12, 16. 민태곤이 남작 작위를 습작하였다고 기재하고 있다. ⓒ 박용규

 
민태곤과 관련된 내용은 <친일인명사전>의 '민규현(1900∼1934, 남작) 항목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작위는 같은 해(1934) 12월 장남 민태곤(閔泰崑)이 17세로 3대째 승계했다. 민태곤은 일본 도호쿠(東北)제국대학 문학부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1년 12월 도호쿠제국대학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 관련자로 체포되었다. 1년여 조사를 받고 1942년 3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센다이(仙台)지방재판소 검사국에 송치되었다가 1942년 11월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44년 11월 사망한 후, 1945년 2월에 동생 민태륜(閔泰崙)이 작위를 승계하면서 조선귀족 중 유일하게 최초 수작에 이어 4대째 이어졌다. 장남 민태곤은 2009년 3월 1일 독립유공자(애족장)로 추서되었다."(<친일인명사전>1, 806∼807쪽.)
 
민태곤은 1934년 12월 15일 아버지 민규현의 남작 작위를 이어받았다.(「민태곤씨 습작」, <매일신보>, 1934, 12, 16.) "정5위 남작" 작위를 가진 채 민태곤은 1944년 11월 22일 별세하였다.(「민태곤 부고광고」. <매일신보>, 1944, 11, 24.)
 

?민태곤 부고광고?, <매일신보>, 1944, 11, 24. 부고에 “정5위 남작 민태곤”이라고 되어 있다. ⓒ 박용규

 
민태곤은 "1940년 일본 동북제대 문학부에 재학 중 조선의 독립과 신사회 건설을 목표로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항일투쟁을 전개"(보훈처 공훈록.)한 공로로 200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가진의 경우도 일제가 준 남작 작위를 내팽겨 둔 채, 1919년에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망명을 가서 1922년 상하이에서 서거할 때까지 독립운동전선에 참여하였다.
<친일인명사전>(2009)에서도 친일파(민족반역자)에 "해당하더라도 뒤에 뚜렷한 반일 행적이 확인되는 자는" 친일파에서 "제외"한다(22쪽) 라는 '예외 규정'을 두고 있다.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2004)의 제2조(정의)에,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해도, "후에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사람"은 "예외로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둘째, '의병탄압'을 문제 삼았다. 그러나 의병탄압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민종식이 일본헌병대에 의해 1906년 11월 20일 체포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김상기, <한말 홍주의병>, 홍성군, 2020, 381쪽)
1906년 11월 19일에 체포해온 홍주의병 민종식·이용규·박윤식·김덕진·곽한일·황영수를, 1906년 12월 3일 충청남도재판소 판사 김가진이 본도(충청도)의 경무보좌관과 협의해 평리원으로 압송하였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보고서 제102호」. <사법품보(을)>, 광무10년(1906) 12월 3일.) 이로써 충청남도재판소 판사로써 김가진이 맡은 바 소임을 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울러 김가진이 홍주의병 곽한일·박윤식·이남규·이충구를 탄압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김상기, 위의 책, 363쪽.) 1906년 12월 3일 충청남도재판소 판사 김가진이 홍주의병 이남규, 성우영을 집으로 돌려보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위의 「보고서 제102호」. <사법품보(을>) 1907년 9월 26일(음력 8, 19) 일본군이 이남규를 학살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김상기, 위의 책, 363∼364쪽.)
김가진은 1907년 4월 27일(음력 3월 15일)자로 충청남도 관찰사에서 중추원 찬의로 임용되었다.(<승정원일기>) 1907년 5월 13일(음력 4월 2일) 이건영(李健榮)을 충청남도 관찰사로 임명하였다.(<고종실록>48권) 1907년 5월 17일(음력 4월 6일)에 전 충남관찰사 김가진은 충남재판소 판사와 충남 세무감에서 해임되었다. 1907년 5월 17일(음력 4월 6일) 전 충청남도 관찰사 김가진을 겸임 충청남도재판소 판사에서 해임하고, 충청남도 관찰사 이건영을 겸임 충청남도재판소 판사에 임명하였다.(<승정원일기>)
따라서 이남규의 학살과 김가진이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동시에 김가진에 의해 민종식과 이남규가 체포되었다는 주장도 근거가 없음이 밝혀졌다. 선 친일·후 독립운동의 서훈원칙에 의거해 볼 때, 의병탄압 건을 논의한 것 자체가 부당한 심사이다.
셋째, 강제병합 찬양 논란도 선 친일·후 독립운동의 서훈원칙에 의거해 볼 때, 부당한 심사이다. 선 친일을 적용해, 후 독립운동을 격하시키는 것 자체가 선 친일·후 독립운동의 서훈원칙을 훼손하는 행위이다. 후 독립운동이 더할 나위가 없이 중요하기에, 서훈원칙은 모든 사람에게 일관되게 적용해야 한다.

 

동농 김가진(1846∼1922) 초상. 새비지 랜도어가 그린 것임. ⓒ 김선현

 
국가보훈처의 김가진 서훈 보류 판정은 아래와 같은 심각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독립유공자 서훈 원칙의 훼손이다. 지금까지 보훈처는 선 친일· 후 독립운동의 경우, 후 독립운동을 높게 보아서, 선 친일·후 독립운동을 한 인사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하여 왔다. 이 서훈 원칙을 김가진만 유일하게 적용하지 않았다. 과거에 어떤 사람도 그런 적이 없었다. 보훈처는 선 친일·후 독립운동을 한 인사 가운데서, 독립유공자로 서훈하지 않은 사례를 제시하기를 바란다. 독립운동 시기에 인간의 개과천선과 만절(晩節)은 소중한 귀감이고 좋은 유산이다.
다음으로, 김가진 서훈 보류는 형평성 논란을 야기시킨 점이다. 이전에 선 친일·후 독립운동을 한 경우, 모든 분들이 서훈을 받았다. 전협·최익환·민태곤은 그 일부 사례이다. 선 독립운동·후 친일한 경우는 서훈하지 않았다. 이광수·최남선·장지연이 그 일부 사례이다. 보훈처가 선 친일·후 독립운동을 한 사람에게 서훈을 안 준 경우가 없었다.
김가진과 민태곤을 비교했을 때도, 보훈처가 형평성에 위반하게 서훈 심사를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두 사람은 모두 남작 작위를 반납하지 않은 채, 독립운동전선에 참여했다. 독립운동전선 참여만으로 사실 남작 작위를 헌신짝처럼 내버린 것이었다. 보훈처는 민태곤의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하여 서훈하였다. 잘한 조치였다.
반면에 김가진에 대해서는 남작 작위를 반납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아 계속 서훈을 보류해 왔다. 형평성에 반한다는 것이다. 보훈처와 공적심사위원들이 <조선총독부 관보>에 나오는 다음의 내용을 문제 삼아, 서훈을 반대하였다고 한다.
 
"조선귀족의 영전(榮典)상실 : 남작 김가진이 1922년 7월 4일 사망하여, 조선귀족령 제13조 제1호에 의해 습작할 수 없음(4월 11일 관보)"(<조선총독부 관보>제3202호, 1923, 4, 17)
 
보훈처와 공적심사위원들이 <조선총독부 관보>제3202호를 근거로 하여, 김가진이 남작 작위를 1923년까지 유지하였고, 1923년까지 김가진의 남작 작위가 반납되지 않았으며, 1923년에 김가진의 남작 작위가 박탈되었다고 강변하였다고 한다. 이런 사유로 김가진의 서훈을 반대하였다고 한다.
필자는 <조선총독부 관보>제3202호의 자료에 근거한 김가진 서훈 반대 사유는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고 본다.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이 <관보>는 일제가 작성한 문건일 뿐이다. 1923년 4월에 김가진이 남작 작위를 상실했다는 논리가 조선총독부 <관보>의 논리다. 일제는 1923년에 가서야 일제와 반대 진영에 있던 김가진의 사망을 들먹이며, 1923년에 김가진이 남작 작위를 상실했다고 황당하게 <조선총독부 관보>에 기재하였다. 이처럼 일제는 사자(死者)인 김가진의 명예를 1923년에 다시 훼손하였다. 대한민국의 보훈처와 공적심사위원들이 1923년에 김가진이 남작 작위를 상실했다는 조선총독부의 논리를 대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1919년 김가진은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망명을 하여 남작 작위를 파탄냈고, 이후 독립운동에 매진하다가 영광스럽게 1922년 7월 4일에 서거했다. 이처럼 김가진은 조선총독부 <관보>의 논리와 정반대로 살았다.
보훈처와 공적심사위원들은 과거의 김가진 서훈 심사를 번복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할 필요가 없다. 바로잡으면 그것으로 끝날 일이다. 즉각 김가진에 대한 서훈조치를 단행하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김상기, <한말 홍주의병>, 홍성군, 2020.
반병률, 「해외에서의 대동단 조직과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28, 2004, 봄.
장명국, <대동단 총재 김가진>, 석탑출판, 2022(4쇄).
이용창, 「독립운동가의 생애에 나타난 독립운동과 친일 행적-조선민족대동단과 조선귀족 관련자를 중심으로-」, <독립운동가 서훈의 역사와 과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20,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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