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평 고막천 돌다리. 다리 위가 평평해, 흡사 대청마루 같다. ⓒ 이돈삼
"알고 있냐? 너, 고막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사실을..." "얼레리 꼴레리 누구는,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네." "그렇게 말 안 들으면, 고막다리 밑에다 다시 데려다 놓는다." "웬수 같은 ×, 다리 밑에 있는 니 엄마한테 다시 가라."
중장년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얘기다. 옛날 어른들은 그랬다. 자식이 말을 듣지 않거나, 심하게 울면 '다리 밑'을 들먹였다. 친구들끼리 놀면서 서로 놀리기도 했다. 그 말을 자주 들은 한 아이는, 진짜 보따리를 싸 들고 다리 밑으로 가려 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하는, 옛 추억 속의 이야기다.
그 이야기 속의 다리다. 전남 함평에 있는 고막천 석교, 이른바 '고막다리'다. 장성에서 흐르기 시작한 물이 월야·나산을 거쳐 영산강으로 가는 길목의 고막천을 동서로 가로질러 놓여 있다. 길이 20m 남짓. 교각 위에 우물마루 형식의 상판을 올린 널다리다. 고막천을 가로지르는 나머지 부분은 현대에 다시 쌓은 콘크리트 다리로 연결돼 있다.
▲ 고막천 돌다리. 고막마을과 문평 사이를 가로지르는 고막천을 동서로 잇고 있다. ⓒ 이돈삼
▲ 함평 고막마을 풍경. 전형적인 농촌마을 그대로다. ⓒ 이돈삼
고막다리가 놓인 게, 700년이 넘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1273년 고려 원종 때 무안 승달산 법천사의 고막대사(古幕大師)가 도술을 부려 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그동안 수십 차례 홍수와 범람에도 거뜬히 견뎠다. 재작년 여름에도 기습 폭우로 하천이 침수됐지만, 돌다리는 무사했다.
고막다리는 함평 고막마을의 상징이 됐다. 마을과 다리의 이름에 고막대사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고막다리는 '똑다리'로 불린다. '독다리'를 거세게 발음하면서 생겼다. 마을에 살던 떡장사가, 이 다리를 건너 영산포 등지로 떡을 팔러 갔다고 '떡다리'로도 불린다.
고막다리는 당시 나주와 함평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였다. 함평 학교면과 나주 문평면이 고막천을 경계로 나뉜다. 지금은 고막천을 잇는 크고작은 콘크리트 다리가 생기면서, 고막다리는 고막천 건너의 논으로 가는 길로 쓰이고 있다.
▲ 함평 고막천 돌다리. 다리 위가 마룻바닥처럼 평평하다. 대청마루 같다. ⓒ 이돈삼
고막다리는 간결하면서도 투박한 인상을 준다. 다리를 석축 방식으로 놓았다. 큰 석재를 다듬거나, 따로 모양을 내지 않고 돌기둥으로 세웠다. 그 위에 평평한 노면을 만들었다. 가운데에는 중간석을 끼워, 노면을 2개의 구역으로 갈라놓았다. 흡사 칼로 두부를 자른 것처럼, 큰 돌을 자유롭게 자르고 짜 맞췄다. 흡사 대청마루 같다.
옛사람들의 지혜와 기술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축조 연대를 20여 년 전, 다리를 보수하면서 밝혔다. 바닥의 기초나무로 쓰인 말뚝의 탄소연대를 측정한 결과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쌓은 것으로 추정됐다. 국내 돌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확인됐다. 국가문화재 보물로 지정됐다.
"나 어렸을 때는, 얼마나 촘촘했는지 몰라. 빈틈이라곤 하나도 없었어. 똑다리 위에서 나락을 널고, 날려서 말리기도 했어. 멍석을 깔지 않고 나락을 날릴 정도로 촘촘했어. 시방은 많이 엉성해졌지."
천변 둔치에서 만난 마을 어르신의 얘기다.
▲ 고막천 돌다리. 큰 석재를 다듬거나, 따로 모양을 내지 않고 돌기둥을 그대로 세웠다. ⓒ 이돈삼
▲ 고막대사를 등장시킨 돌다리 벽화. 고막마을회관 앞 벽에 그려져 있다. ⓒ 이돈삼
고막다리는 여전히 듬직해 보인다. 옛날에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나 괴나리봇짐 짊어지고 길을 나선 상인이 그랬던 것처럼, 굳이 두드려 보지 않고도 마음 놓고 건널 수 있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야 한다'는 말도 여기에선 '남의 얘기'일 뿐이다.
동학농민전쟁 때엔 고막다리를 앞에 두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1894년 11월 중순 나주성 공략에 실패한 농민군이 민종렬의 수성군에 쫓기다가 고막천을 만났다. 봄이면 동학농민군 추모제를 열고, 전투 장면 재현 행사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1910년대까지는 고막천에 쌀 100석을 실을 수 있는 배가 드나들었다고 전해진다. 60∼70년대까지도 소금과 고기를 실은 배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영산강이 하구언으로 가로막히지 않고, 번창하던 때의 얘기다.
▲ 고막천변의 공적비. 고막대사 등의 비가 세워져 있다. ⓒ 이돈삼
▲ 이익주 전 부산시 국장 추모비. 광주-목포 간 도로변의 고막마을 소공원에 세워져 있다. ⓒ 이돈삼
고막마을은 800여 년 전 해주 최씨가 처음 들어왔다고 전해진다. 뒤를 이어 청주 한씨, 밀양 박씨가 들어와 살았다. 1789년 나온 '호구총수'에는 지명이 '고호(古湖)'로 나와 있다. 영산강의 옛 지명이 '사호(沙湖)'였던 데서, 뜻을 짐작할 수 있다.
'고막'은 돌다리를 놓은 고막대사에서 유래됐다. 고막천 둔치에 고막대사비가 세워져 있다. 고막원(古幕院)은 고려 때 복암사로 가는 사람들이 쉴 수 있게 설치한 원(院)에서 비롯됐다. 1924년 '무안군지'에 의하면 '고막원에 원루(院樓)가 있었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원이나 지방수령이 순시할 때 쉼터로 썼고, 신구 수령의 교대 장소로 썼다'고 나와 있다.
고막마을은 오래된 돌다리를 뒷배 삼아 밝은 미래를 그리고 있다. 돌다리가 놓인 고막천의 둔치를 따라 산책로를 만들었다. 마을회관을 새로 짓고, 고막천에 민물 낚시터도 단장했다. 수령 200년 넘은 천변의 팽나무에서 당산제를 지내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
마을에 있는 소공원이 멋스럽다. 공원에는 쉼터와 함께 고(故) 이익주 전 부산시 행정관리국장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이 국장은 2005년 12월 폭설 때 함평에서 피해복구를 돕고, 부산으로 돌아가다가 순직했다. 추모비는 고인의 희생정신을 기려 전라남도와 함평군이 세웠다.
▲ 돌다리와 고막마을 전경. 고막천변, 나주시 문평면에서 본 모습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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