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결국 에피소드로 끝날 것이다" 심리정치 9p. 심리정치는 신자유체제의 통치수단이다. 심리정치는 자유를 수단화한다. 군주권력와 규율권력이 지배하는 사회에서의 자유는 억압과 통제의 대상이었지만,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자유는 지향된다. 지향된 자유는 과잉적으로 확산되고, 주체를 서브젝트가 아닌 프로젝트로 전환시킨다. 자유는 주체를 예속한다. 한병철은 <피로사회>, <투명사회> 등 여러 저작에서와 같은 입장을 유지하며, 디지털 시대를 '긍정성'이 과잉된 시대라 진단한다. 빅데이터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빅브라더이다. 현대의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낸 디지털 판옵티콘 속에 갇힌 채 스스로를 감시한다. 심리정치는 계몽주의의 산물이다. 때문에 심리정치의 수단인 빅데이터는 계몽의 도구로 간주된다. 1차 계몽주의는 '통계학'의 발전으로부터 비롯된다. 빅데이터는 2차 계몽주의를 발현시킨다. 그러나 빅데이터는 주체의 맥락을 무시한다. 전체(Whole)가 아닌 부분(Part)적인 정보를 다루는 빅데이터는 단순한 정보의 나열이고, 축적이다. 따라서 맥락을 무시하는 빅데이터는 계몽의 도구가 아니다. 빅데이터는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속 로토화고이 족의 연꽃 열매처럼 작용한다. 달콤한 독이다. 오뒷세우스는 고향 이타카로의 귀환 도중 로토화고이 족의 연꽃 마을에서 난관에 부딪힌다. 이 마을의 사람들은 연꽃(마약열매)을 먹으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조건은 감내할 수 없는 것을 감내하는 것, 곧 굴종이다. 연꽃 마을에서 오뒷세우스의 대원들은 연꽃을 즐기며 귀환을 포기할 정도로 마을의 규칙에 순응한다. 자기 보존의 가치가 자기 포기의 굴욕을 압도한다. 마약과도 같은 연꽃열매의 독은 자기 보존의 원리에 들어있는, 피할 수 없는 요소들이다. 자기 주체를 내던지고 굴종을 받아들이면 마약에 취하듯 삶을 즐길 수 있지만 이것은 두 가지 대가를 요구한다. 하나는 주체의 자기 포기에 의한 주체적인 삶의 상실이고, 다른 하나는 주체의 자기 포기에 토대를 두어 작동되는 냉엄한 사회질서, 곧 자기 포기를 한 개별 인간들을 항구적으로 지배하는 사회질서의 고착이다. 대원들의 자기 포기는 개별 인간에 대한 사회의 지배를 성립시키는 원리에 해당한다. 사회는 개별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주체를 스스로 포기하도록 강제하며, 개별 인간은 사회의 강제에 저항하지 못하고 자기 주체를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사회가 강제하는 지배에 순응한다. 순응을 거부하는 것은 자기 보존의 상실을 의미한다. 이렇게 해서, 사회는 사회에 예속된 개별 인간들의 삶을 항상 동일한 삶의 반복에 묶어두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하나의 연꽃 마을이다.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의 자본은 자기 증식의 도구로 빅데이터라는 연꽃 열매를 선택하고, 개인에게 열매를 건네며 굴종을 요구한다. 연꽃열매가 주는 쾌락에 취한 개인은 자기를 포기함으로써 주체적인 삶을 상실하고, 주체의 자기 포기를 토대로 작동하는 신자유주의 사회 질서는 냉엄하게 작동하며, 자신의 작동원리를 고착화시킨다. "내가 원하는 것에서 나를 지켜줘"로 압축되는 한병철의 <심리정치>는 자본이 원하는것에서 벗어나 진정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해 사유하는 것을 요구한다. 제대로 된 사유만이 진정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 경험은 주체를 예속 상태에서 벗어나게 한다. 경험은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가 주체를 예속 상태 속에 더 깊이 빠뜨리기 위해 이용하는 체험 또는 기분과 정반대다 심리정치 - 109p 우리에겐 '경험'이 필요하다. 자본이 요구하는 많은 것들에서 탈피해 지폐를 장난감 삼아 찢으며 노는 아이들처럼 '백치'가 되어보는 경험이 필요하다. 나를 억압하고 통제하려는 허울뿐인 자유를 인식하고, 거부함으로써 진정한 자유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삶의 방식이 필요하다. 한병철은 사유를 통해 이런 것들이 가능하다 말한다. 사유는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는 것이다. 구분과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본질적이지 않은 것을 과감하게 끊어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긍정성 과잉의 사회 속에서 부정성을 끌어안는 것 또한 사유의 방식 중 하나이다. 적당한 부정성은 우리 삶의 건강한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로토화고이 부족에서 벗어난 오뒷세우스는 연꽃 마을에서의 행복을 포기하고 지양된 고통을 추구한다. 이것이 진정한 계몽의 원리이다. 계몽은 진보를 추구한다. 진보로의 충돌을 상실케 하는 신자유주의라는 체제 속에서 새로운 계몽이 필요한 시점이다. 덧붙이는 글 기자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심리정치 #서평 #한병철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