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 아니 큰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이가 없던 큰아버지 내외는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작은 집 셋째 딸을 자신들의 아이로 들였다. 하지만 그 아이가 자라 국민학교 2학년 무렵 큰 아버지 내외는 이혼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소식을 전한 그 큰어머니라는 사람과 큰 아버지가 바람을 폈기 때문이다. 친부모님 댁으로, 다시 친할머니 댁으로 전전하던 아이는 제 발로 길러 준 큰 어머니 집을 향했고, 그때부터 아주 오래오래 아버지로써 큰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그렇게 오래오래 큰아버지를 아버지라 여기며 그리워하던 아이가 큰아버지를 다시 만난 건 낼 모레 육십이 될 즈음에서 였다. 구십 줄을 넘은 큰아버지가 사시면 얼마나 더 사시겠냐는 말에 두 아이를 데리고 찾아뵈었다. 여전한 웃음으로 나를 반겨주시던 큰아버지, '이렇게 뵙게 되는구나', 감회와 회한이 오갔다. 그 후로 몇 번, 올 겨울이 막 시작될 즈음, 요양병원으로 가실 것같다는 말에 부랴부랴 찾아뵌 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 석양 ⓒ 이정희 나의 아버지, 큰아버지 큰아버지의 장례식은 단촐하다 못해 적적했다. 큰어머니라는 분과의 사이에서 낳았다는, 큰아버지의 자부심이라는 아들은 부재했다. "아이고, 우리 딸, 우리가 열 살 때까지 키웠지, 아버지가 널 얼마나 예뻐했는데......", 큰어머니라는 분은 자신의 딸에게 눈치가 보였는지 되지도 않는 말을 늘어놓는다. 그래도 '예뻐했는데.....'라는 말이 꼬리를 길게 늘여 나를 휘감는다. 죽지도 않는다며 싸구려 요양병원을 알아보겠다는 큰 어머니 앞에서 고모님과 나는 아직 그 정도는 아니시라며 생각보다 병원비가 많이 든다며 요양병원 행을 말렸다. '한 집안을 뒤집어 엎으며 사신 분의 말년이 참...... ' 돌아나오는 마음이 복잡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 또한 큰아버지가 선택한 길이다 싶었다. 큰 아버지는 자신이 선택한 삶에 충실했다. 자신이 선택한 가족을 위해 오래도록 일했고, 두 아이들을 유학까지 보내며 뒷바라지했다. 그런 아버지의 삶에 한때 딸이었던 내 자리는 없었다. 제 아무리 이뻐했어도, 그래서 두고두고 내 얘기를 했어도, 그 후로 몇 십년 동안, 열 살 먹은 아이가 머리가 허연 나이가 되도록 아버지는 내게 밥 한 끼 사준 적이 없었다. 몇 년 전 처음 찾아 뵌 날 식구들 눈을 피해 구석방으로 데려가 꼭꼭 접은 이십 만 원을 누가 볼까 쉬쉬하며 건넨 게 아버지가 드러낸 마음의 전부였다. 올 한 해 큰 아버지와 큰 어머니 두 분 모두 세상을 떠나셨다. 공교롭게도 같은 화장장에서 세상과의 마지막 통과 의례를 치르신 두 분, 한 해에 떠나가시는 두 분의 뒷모습이 내게 오래오래 그림자로 남는다. 큰 아버지, 큰 어머니라고 했지만, 태어난 오리가 처음 본 이를 자신의 부모로 느끼듯, 나에게 큰 아버지, 큰 어머니는 아버지, 어머니였다. 친부모님이 계셔도 딱히 한 공간에서 부대끼며 산 기억이 없으니 부모로서의 정을 느낄 만한 시간이 없었다. ▲ 석양 2 ⓒ 이정희 그리움은 사랑이 아니다 심리학에는 '내면 아이'라는 용어가 있다. 우리 모두의 무의식 속에는 '아이'가 한 명 살고 있다는 말이다. 주변에 지방 출신이신 분들이 있는데 그 분들 중에는 말 끝마다 내가 '시골 사람'이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다. 따지고 보면 그 분들이 '시골'을 떠나온 건 몇 십 년 전이다. 몇 십 년을 시골을 떠나 도시에서 살아왔어도 그 분들은 여전히 어릴 적 그 시골에서 살던 아이의 마음으로 살아간다. 즉 자기 삶에서 '애착'이 형성된, 혹은 그 '애착'을 상실한 그 시절에 우리는 머무르곤 한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가장 가슴아픈 순간으로 기억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올 한 해 함께 산 시간이야 어떻든 나에게는 '부모'로 각인되었던 두 분을 함께 떠나보내고 나니, 새삼 '고아'가 되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던 내 마음 속 '아이'를 새삼 들여다보게 되었다. 낼 모레 육십이 되어도 여전히 자꾸 열 살 무렵 그 시절로 돌아가려는 그 '아이'를. 지난 봄 큰어머니가 갑작스레 돌아가셨었다. 몇 번의 고비를 넘기시면서도 그래도 그럭저럭 버티시나보다 했는데 거기까지가 어머니에게 허락된 삶인듯 저녁 무렵 조용히 돌아가셨었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던 어머니의 모습은 평생 그 어느 때보다도 편해보이셨다. 평생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줄 그 누군가를 기대고 바라느라 주변 사람들을 지치게 만들고 떠나가게 만드셨던 어머니, 그래서 늘 그런 어머니를 '반면교사'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리고 이 한 해가 저물기 전 큰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비로소 아버지와 나의 관계가 제대로 보였다. 난 오래오래 아버지를 그리워했지만, 아버지랑 나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예뻐했던 마음만으로는, 혹은 그리움만으로는 아무 것도 될 수 없다. 그건 아주 오래전의 일, 지나간 시간일 뿐이었다. 그 열 살 무렵의 시간에 관성처럼 자꾸 회귀했던 나는, 그 시간에 대한 그리움'으로 방황했고, '아버지'같은 대상에 천착했으며, 때론 아버지가 몰래 준 이십 만원같은 관계에 연연했던 것같다. 큰어머니를 반면교사로 삼는다 하면서도 나는 또 다른 버전의 큰어머니로 오랜 시간 살아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낼 모레 육십에 독립선언을 한다면서 뭔 아버지, 어머닌가 싶겠다. 하지만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 큰 어머니는 그렇게 당신의 어머니, 아버지를 찾으셨었다. 노년이 되어서도 당신을 무조건 사랑해주고 받아주던 그 '애착'의 대상에 대한 끝없는 갈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눈을 감고나서야 비로소 어머니는 편해지신 것 같았다. 큰아버지를 보내며 비로소 나의 그리움이 사랑이 아니었음을 시인하게 되었다. 사랑은 서로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 역시도 어머니처럼 아주 오랫동안 그리움만으로 이제는 그림자만 남은 관계들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돌아보게 되었다. 두 분이 남긴 소중한 유산이다. 심리학자 에릭 번은 사람들은 저마다의 '인생 각본'으로 세상을 살아간다고 말한다. 말 그대로 자신만의 인생 시나리오이다. 그런데 자신이 살아가는 인생 시나리오인데, 여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부모'이다. 우리는 아니다 하면서도 부모가 살던 대로, 혹은 부모와의 관계에서 형성된 자아의 모습 그대로 인생을 살아가기 십상이다. 나 역시도 자유롭지 않았다. 그리고 그 누구도 쉬이 자유롭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나만의 인생 시나리오를 쓰려 애써보는 것이다. 인생은 살아지는 게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라는 말처럼. 그리 길지 않을 인생 이젠 그만 열 살의 아이를 떠나보내고 어른의 삶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브런치(https://brunch.co.kr/@5252-jh)에도 실립니다. #<낼 모레 육십, 독립선언서>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