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스키여행 / 운동을 못해도 보드를 타는 이유

운동은 못하지만 남편과 아이를 위해 함께 보드를 즐기는 엄마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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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진(clairecho)등록 2023.01.16 17:26
내가 이십대였을 때 꼭두새벽에 스키장 셔틀버스를 타고서라도 스키를 타러다니는 사람은 흔했다.
그런 일은 젊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내게 요즘 남편은 식지않는 열정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우리 가족은 올 겨울, 벌써 세번째 스키를 타고 돌아왔다.
한번은 당일치기, 한번은 일박을 하고, 지난 주말 또 일박을 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 여름, 그는 내게 시즌권을 살 것이라는 걸 알려준 다음 겨울 준비를 시작했다.
2020년엔 생각보다 많이 타진 못했지만 그 해에 강습을 몇번 받은 아이는 '겨울 = 스키타는 계절'이라고 인식한 것 같다. 2021년에도 스키 여행은 계속 되었고 2022년엔 나조차 스키가 좀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스키장, 하면 내게는 정신이 하나도 없는 곳이라는 생각 뿐이었다.
1차로 옷을 갈아입고 장비를 대여하느라 또 무거운 장비를 운반하느라 바쁘다. (이 과정에서 이미 지친다.)
2차로는 기다려야 한다. 리프트를 기다리느라 무거운 보드를 들고 추운데 줄을 서서 시간을 허비하고 올라간다.
마지막으로 내려오다가 넘어지기 쉽상이며 넘어질 때면 보호대를 해도 어마무시한 고통을 겪어야한다.
그럼에도 실력은 좀처럼 늘지 않으나 사람들이 다 가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가볼 수 밖에 없는 곳이 내가 기억하는 스키장이었다.

그런 내가 스키를 좋아하는 남편과 결혼을 하고 또 그를 닮아 스키에 열광하는 아들과 살다보니...
나도 자꾸 스키를 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2020년에도, 2021년에도, 2022년에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 듯 보였다.
왜냐하면 내 보드실력에는 변화가 없었으므로...
왜 그런지 모르겠다. 나에게는 운동신경 따위 전혀 없는 걸까?
사람들이 보드를 타는 모습을 보면 거침이 없다.
아이와 남편도 마찬가지다. 숏턴을 하며 줄기차게 언덕을 내려간다.
하지만 나는 턴을 하는 순간이 매번 두렵다.
나도 그들처럼 줄기차게 턴을 하다가는 틱 하고 말도 안되게 쪼끄만 얼음덩어리에 걸려 뒤로 나자빠져 뒷통수를 바닥에 정통으로 부딪치고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볼 것만 같다.
겁이 많으니까 패트롤이 끌고가는 들 것에 실려 눈밭을 내려갈 정도로 다치진 않겠지만 그래도 온 몸이 아플거다.
겁쟁이요정이 쉴새없이 말한다, 조심해서 타라!!!!!

그럼에도 나는 보드를 탄다.
가만히 있기 보다는 뭐라도 해보자는 생각으로.
강습을 받을 돈도, 내가 본받을만큼 보드 잘 타는 주변인도 없지만.
스키타는 남편과 아이의 뒷꽁무니를 하염없이 쫓아다닐 뿐이지만.
​​
신기하게도 지난번 스키트립 땐 약간의 재미를 느꼈다.
너른 설원, 상쾌한 공기, 탁트인 시야, 주전부리와 커피타임, 운동 후의 꿀맛 같은 식사...
여전히 다칠까봐 무섭지만 보드의 공포와 맞바꿀만큼 좋은 것들이 많다는 생각이 든 것 같다.
그러고나니 보딩이 나쁘지 않았다.
​​
첫날에 내린 비로 처음 탈 땐 스키장 눈이 슬러쉬 같았다.
수분을 머금어 엣지가 전혀 먹히지 않아서 넘어지는 사람들 투성이였다.
밤이 되어 심야스키를 탈 때도 눈이 내리긴 했지만 슬러쉬같았던 얼음 위로 내린 눈은 여전히 미끄러웠다.
하지만 처음으로 아이와 함께하는 심야스키는 즐거웠다.
리프트를 타고 어두운 조명 속에 속마음을 터놓는 대화가 좋았다.
아이 곁에서 자잘한 것들을 챙기는 부모 역할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즐겁게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스키라는 매개를 통해 아빠의 사랑을 느끼고 (무심한 줄 알았던) 아빠가 좋다고 표현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는 것이 기뻤다.

그리고 다음날,
우리는 선물처럼 함박눈이 내리는 설원에서 스키를 탔다.
펑펑 내리는 눈을 온 몸으로 맞는 건 마흔을 넘긴 내게도 흔한 일이 아니다.
이제 갓 열살이 되는, 만으로는 여전히 아홉살인 아이가 설중 스키에 열중하는 것이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얗게 눈 쌓인 산을 바라보며 할 말을 잃은 우리 부부는 여유를 찾을 때마다, "우와, 경치 정말 좋다." "우와, 텔레비젼에서만 보던 그 설산이야!" 온 세상에 공평하게 쌓인 눈을 바라보며 감탄사를 연발할 뿐이다.
소나무에 소복이 쌓인 눈이 평범한 소나무를 흰수염이 무성한 할아버지처럼 보이게 한다.
정신 없이 놀고 있는 우리에게 문득 너털웃음을 지으며 새하얀 눈수염 할아버지가 말을 걸 것만 같다.
"스키가 그렇게 재미있느냐~?" 하고. ㅎㅎ

내게 삶이란 절박한 포즈 이외에는 허락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가득했다.
하지만 스키 좋아하는 남편이 그가 좋아하는 것에 재화를 사용하고
그 소비가 휘발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가치 있는 좋은 추억을 선물했다는 것,
우리가 나이 들어서도 함박눈 내린 날 타던 스키를 기억할 거라는 것,
남편이 나와 아이의 뒤를 따라다니며 정신 없이 촬영해준 동영상이 있다는 것,
그 모든 것을 통해 지금 현재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삶이 다정한 얼굴을 하고 다가올 때도 있다는 걸 받아들인다.
​​
우리 인생은 여전히 좌충우돌 진행중이지만
뾰족한 바위산만 오르는 것이 아니라 야트막한 언덕도 걷게 된다는 걸 생각하게 했다.
겁쟁이 요정은 또 다시 '조심해! 이러다가 이 행복이 순식간에 날아가고 힘든 일이 닥칠지도 몰라!' 하고 귓전에 속삭였지만 언제까지나 긴장만 하고 살수는 없는 존재가 사람인 걸 안다.
내 부모님도 그랬겠지, 나보다 더 젊고 더 가진게 없었지만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만은 나보다 훨씬 더 컸을 나의 부모도 그랬겠지... 그 결과물이 나의 삶인 거겠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새벽글쓰기 시간이 끝난지 한참 되었건만 내 글은 끝날줄을 모른다.
머릿속에 하루 종일 줄글들이 떠다니겠지,
부디 내일 아침에 예쁜 모습으로 모니터에 정렬해주렴...
이제 다시 기지개를 켜고 어느새 평범해진 하루를 시작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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