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상상하던 다른것을 보게되는 나라

거짓말하는 인도인, 친절한 인도인, 똑똑한 인도인...인도는 한마디로 너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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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상원(wonland)등록 2023.03.02 09:43
"다음 주에 인도로  발령 날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네? 오른손으로 밥 먹는 그 인도요?"
거짓말처럼 일주일 만에 인도 사업 TF로 발령이 났고, 그리고 그후 10년 동안 인도에서 줄기차게 근무를 하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 당시 중국이 G2로 급부상 중이었고 나 또한 '언젠가'있을 그날을 꿈꾸며 2년간 매일 아침 두 시간씩 중국어 공부를 꾸준히 했었는데…

인도로 발령이 난다고 하니 주변의 동료들은 진심으로 많은 위로와 MSG 가득한 괴담을 전해 주었다. 인도로 신혼여행 간 부부가 영화 '화차'처럼 뉴델리에서 생이별을 하고 훗날 남편이 기억이 상실된 아내를 서커스단에서 찾았다는 설, 카스트 제도가 있어서 우리와 닮은 몽골계 외모는 개무시당한다는 설, 거짓말 잘하고 화술이 좋고, 약속을 잘 안 지키시는 인도인들에게 덜(?) 당할 노하우, 여행 가서 식당에서 주는 물 잘못 마셔서 2주간 쉼 없이 설사한 경험 등 다양했다.

때는 2006년 7월 9일. 드디어 첫 출장 D-Day. 대한항공 직항 편을 타고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여덟 시간 반을 이동하여 새벽 2:30에 그 악명 높은 뭄바이 공항에 도착했다. 입국 수속을 밟으며 두려움과 묘한 설렘이 교차했다. 새벽 시간인에도 입국 심사 줄이 매우 길었고, 질문을 꼼꼼히 하는 것인지 손이 느린 것인지 내 기준으론 줄이 줄어드는 속도가 매~우 더뎠다.

뭄바이가 서울보다 3시간 반이 느린 걸 감안하면 이미 한국시간으로 오전 6시이고 밤을 꼬박 새운 것처럼 피로가 몰려왔다. '아 인도 새끼들… 졸라 느리네.' 정말 모든 것이 느렸다. 그토록 긴 기다림 끝에 나왔는데도 아직 수화물 컨베이어 벨트에 내 짐이 보이지 않았다. 대기하는 사람들 모두 수염이 거뭇거뭇하고 매우 피곤한  모습들이었다. 드디어 내 짐이 저 멀리서 나왔다. 놀라울 것도 없이 함께 간  동료의 짐은 한참이 지나서야 나왔다. '이제 제발 나가자. 쫌'

지나친 낙관이었을까? 그렇게 나온 짐을 또다시 스캐너로 검사를 한단다. 호기심 많은 검사관이 두어 개 걸러 하나꼴로 육안검사를 요구했다. 한국인으로 보이는 어떤 분은 노트북이 두대라고 실랑이가 벌어지고, 몇몇 시비가 있었다. '아 몇 불 준비했다가 문제가 생기면 악수하는 것처럼 주라는 얘기가 이거였구나.' 또다시 긴 줄을 기다려서 세 번째 관문을 통과했다. 출구 앞에서 경찰관이 또 여권을 확인한다. 입국 스탬프와 입국증 중 공항에 제출해야 하는 부분을 회수하는 절차가 또 남아있었다. '이 걸 도대체 왜 한번 더 확인할까?' 참을 인자 4번을 세기며 새벽 4시가 넘어서야 입국장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인도 땅 밟기가 만만치 않구나. 지친다 매우.'

당시 공항 밖 풍경은 놀라울 정도로 쾌적하지 못했다. 인도 장마철의(Monsoon) 고온 다습한 공기에서 오는 경험 해 보지 못한 높은 불쾌지수, 침침한 가로등 아래 흡사 동굴의 느낌처럼 반짝거리는 수백 명의 눈동자들은 약간의 공포감마저 주기에 충분했다. '아 이것이 incredable India구나.' 손님을 기다리는 호텔의 기사들, 끊임없는 경적소리, 택시 호객꾼들, 짐 옮기는 것을 도와주겠다는 남루한 차림의 유료 짐꾼들, 불쾌한 소리를 내며 흑우처럼 지나가는 까마귀 떼들… 멀리 출장 온다고 정장차림으로 나온 우리 일행은 마치 1960년대 한 편의 흑백영화 속으로 들어온 외국인 선교사들처럼 비현실적으로 뒤섞였다. '아 진정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첫날부터 정말 찐이구나, 찐…'
"사장님 안녕하십쉐."
"사장님 아침식사 밋시에 하쉽세니까?"
다음날 새벽 5시 30분 즈음 뭄바이 국제공항에서 한국분이 뭄바이 외곽의 신도시 Hyranandani에서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 대기업 출장자들을 대상으로 하루 100달러 정도를 받고 숙식을 제공하는 곳인데, 인도인으로 보이는 한 친구가 재미있는 톤으로 한국말을 제법 할 줄 알았다. 시작은 비슷하게 하는데 뒤가 흐지부지하다. 공항에서 너무 오래 기다리고, 말로만 듣던 인도의 첫인상이 예상보다 강렬했던 터라 친절한 직원들에게 농담 한마디 건넬 여유도 없이 짐을 풀고 잠시 눈을 붙였다.

"굿모닝 프렌드. 웰컴 투 인디아."
인도 생활의 5복 중 하나는 좋은 기사를 만나는 것이다. Sunny라는 이름의 우리의 첫 기사는 어디서 관광가이드 알바를 하다 왔는지 매우 활기차고, 영어가 유창하고, 오지랖이 넓었다. 낯선 나라 그것도 시차가 세 시간 이상 나는 곳에서 잠시나마 숙면을 취하기가 쉽지 않았던 터라 그 친구의 높은 텐션과 TMI에 대한 호불호가 갈렸다. 나는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영어를 못하는 기사보다는 오히려 덜 답답하다는 생각이었는데 인도 경험이 나보다는 많은 선배는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기사는 운전만 잘하면 돼. 말 많으면 사고나. 근데 이 친구 조금 불안하다. "

분위기가 그랬을까? 말하기 좋아하던 Sunny는 한동안 우리가 어떤 솔깃한 얘기를 하던 질문 하기 전에는 조용히 운전을 했다. 며칠 후 나만 이 친구와 외근 일정이 생겼다. 내가 별다른 거부감이 없다는 걸 알았는지, 차에 타자 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본인의 가족 얘기를 시작했다. 아내가 최근에 수술받았고, 마취를 못해서 통증이 매우 심한 상태라고… 출장자 신분으로 한국에 있는 집사람 생각이 났다. 빈부격차가 워낙 심하고 의료 인프라가 워낙 낙후돼있다 보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론 짠한 마음에 팁도 조금 더 주고, 어느 날은 인도 현지화 100루피(한화 약 1700원)와 지갑에 있던 미화 100달러가 헷갈려서 팁으로 100달러를 주기도 하고 '이미 준걸 다시 돌려 달라고 할 수도 없고, 이누마는 알았을 텐데... 통 큰 한국 형으로 생각했으려나'. 그 이후로도 이 친구는 이런저런 이유로 나의 감성을 적절히 자극했고 큰돈은 아니더라도 나는 팁 명목으로 몇 푼씩 자주 챙겨주곤 했다.

한 달이 채 못 돼서 새로운 기사가 인사를 했다. 게스트하우스의 설명은 어제부터 이전 기사는 연락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것이었고, 이런저런 얘기 끝에 이 친구 이름이 Sunny가 아니었고 미혼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아, 이맛인가. 서울에서 듣던 거짓말 잘 하는 인도 친구들에 대한 소문이 헛소문은 아니었었네.'

이후 약 10명 넘는 기사를 만났다. Sunny와 비슷한 레퍼토리로 시도하는 친구들도 두어 명 있었고 '이것들이 같은 거짓말 학원을 다니나...', 3년 넘게 함께한 기사는 두어 달에 한 번쯤 카에어컨 등 수리비 명목으로 10~15만 원 정도를 기술적으로 받아갔었고, 나이가 좀 많았던 기사분은 공부 잘하는 본인의 큰 아들의 자랑을 1년 동안 빌드업하여 아이의 대학교 등록금을 내가 기꺼이 내도록 잘 설득(?)해냈다.

고온다습한 나라에서의 에어컨 고장, 인류 공동 관심사인 대학입시, 병원비 등은 알고도 외면하기 어려운 썩 괜찮은 아이템들이기는 했다. K-호구가 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는 진정성 있는 노력(?)들은 한눈을 감아 줄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 직후 폐허가 된 나라에서 우리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미군이나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이들과 똑같은 시도들을 했었겠지. 그렇게 얻어낸 눈먼 돈들로 정말로 누군가의 아이는 대학 등록금도 보태고, 생활비로도 쓰고, 치료도 하고 했겠지. 영화 국제시장에서 황정민이 열연한 K-아버지처럼.

소위 한국에서 '인도 놈', '인도 xx'들로 칭해지는 느리고 거짓말하고 약속을 안 지킨다는 인도인들에 대한 부정정인 이미지는 공항이나 외국인 관리 사무소에서 근무하는 하급직원들, 택시기사, 운전기사, 살림을 도와주는 가정부 등 대부분 이 하층민들을 통해 형성된다. 13억 명이 넘는 사람 부자 국가이다 보니 일자리가 많이 필요하고, 일자리 창출을 위한 프로세스들이 조금 과하세 세분화돼있는 면이 있다. 입국 심사 때 충분히 질문하고 승인한 여권을 공항을 나오기 전해 한번 더 확인하면서 하층민을 위한 값싼 일거리가 창출되고 새벽시간 숙소로 빨리 가고픈 외국인들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기에 '아니면 말고 식의' 뒷돈을 받을 다양한 시도를 끊임없이 해보는 것이다.

반면 나와 함께 일했던 인도의 파트너사나 우리 회사의 직원들은 대체로 매우 스마트하고 매너가 좋았다. 어쩌면 '90년대 생이 온다.'로 이미 일반화된 MZ세대들의 개인적인 성향 대비, 충성도나 배려심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었다. 물론 문화 차이가 있다 보니 지각도 잦고, 매사 변명도 많고, 문제가 생겼을 때 맨땅에 헤딩식의 추진력은 K-스탠더드에 비해서는 부족한 편이었지만, 야근이나 밤샘 작업도 함께하고 어쩌면 개도국 시절 대한민국처럼 성장을 위한 에너지가 매우 높았다.

법인 설립을 위해 직원들을 채용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지원자들은 MBA를 나왔고, 이전 직장들이 코카콜라, 마이크로 소프트 등 유명한 외국계 출신들이 적지 않았다. 면접을 보면서 '국내파인 내가 이 친구들 감당할 수 있을까?' 부담이 느껴질 정도였다. 7년간 인도에서 주재원을 생활하며 어쩌면 더 한국인들처럼 성격이 급하고 호전적인 인도 직원들과 한국에도 없을 것 같은 친절하고 높은 역량의 인도인들과 함께 할 수 있었다.  

내 머리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캠페인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내주었던 Kartikeya Patel.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날 때마다 나와 내 가족을 보호해주던 가디언이었던 Manish Lamba. 사짜 냄새가 약간 있지만 믿을 수 없는 인맥과 Network으로 수많은 지역 언론 행사를 최고의 가성비로 치러준 Mahesh Patel. K-수학으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수리력과 암산능력을 보유한 Wharton School출신 천재 Gopi Vaddi.   

인도에는 아마도 3억 명의 인도 놈, 7억 명의 인도인, 3억 명의 인도분들이 있을 것이다.

내 첫 출장에서 만났던 시골 버스터미널 수준도 안돼 보였던, 뭄바이 공항은 8년간의 대 공사를 통해 2014년 신공항으로 천지개벽 수준으로 대 변신을 했다. 인프라가 좋아지다 보니 입출국에 걸리는 시간도 많이 좋아졌다. 2018년 이후론 연간 여객 수송량이 약 5천만 명 수준으로 늘고, 영국 런던의 개트윅 공항을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바쁜 공항이 되었다.  

대국으로써의 인도의 자존심을 얘기할 때 종종 하는 얘기다. 대한민국보다 33배 크고, 지폐에 22개의 언어로 금액이 표시돼있고, 28개의 주와 8개의 자치주가 있는 너무너무 큰 나라 인도. 구글의 순다르 피차이, 마이크로 소프트의 사티아 나델라, 어도비의 샨타 뉴 나라옌, IBM의 아르빈드 크리슈나, 위워크의 샌딥 매스라니 등 초일류 글로벌 기업의 CEO를 지속적으로 배출하고 있는 나라.

눈앞에 보이는 것들로 만 판단하기엔 결코 만만치 않은 인도.
대단히 크고, 깊고, 복잡하고 어렵다. 무엇을 상상하던 다른 것을 보게 된다.   

오래간만에 군대의 추억과 같은 큰 나라 인도의 기억을 떠올려 보니 10여 년간의 일들이 마치 어제 일들처럼 꽤나 선명하게 스쳐간다.

모두 잘 지내고 있겠지.
그때 그 공항에서 내 대형 캐리어를 구석구석 뒤지던 그 아저씨와  Sunny와 친구들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21세기의 인도에서 다들 잘 지내고 있을까? 애들은 내가 준 돈으로 대학들 잘 갔겠지? 혹시 그 중에 유명한 CEO가 하나 나올지도 모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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