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훈처 의견에 입각하면 '을미의병 서훈 박탈해야'

-보훈처의 2차 동학봉기 참여자 서훈 반대 의견을 논박함-

검토 완료

박용규(hanbong)등록 2023.05.09 09:20
지난 4월 24일 '보훈처가 국회 정무위원회 의원실로 보내온 검토의견' 전문을 기자는 다음날 입수하였다. 검토의견은 현재 현안으로 떠오른 전봉준 등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서훈과 관련한 내용이었다.
지금 국회 정무위원회에서는 이정문 의원 등 60명이 공동 발의한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이하 일부개정법률안)에 대해 법안 심사를 하고 있다. '일부개정법률안'의 내용은 1894년 9월 침략자 일본군을 몰아내다가 순국한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한다로 되어 있다. 독립유공 업무를 다루는 국가기관이 국가보훈처이기에, 보훈처가 '일부개정법률안'에 대한 검토의견을 국회 정무위원회 의원실로 보냈다. 아래는 '보훈처가 국회 정무위원회 의원실로 보내온 검토의견'(2023. 4. 24) 전문이다.
 
"독립유공자법(수용 곤란)
ㅇ 동학 2차 봉기의 항일적 성격은 인정하나 독립운동적 성격은 인정할 수 없음
- 독립은 국권침탈 이후 항일운동에 인정할 수 있으나, 국권침탈 시기 의견이 상이
- 동학 2차 봉기를 독립운동으로 인정할 경우, 국권침탈 시기를 봉기가 있었던 1894년 9월로 지정해야 함
- 학계·교과서 집필 자문계에서는 국권침탈 시기를 1904~1905 러일전쟁 직후 또는 1905 을사조약 전후로 보는 것이 다수 의견
- 국권침탈시기를 앞당기면, 을사조약 전의 대한제국의 자주적 근대화 노력을 일제 치하의 근대화 논리로 해석할 우려"
 
위의 보훈처의 검토 의견은 국권침탈 시기를 1905년 러일전쟁 직후와 1905년 을사조약 전후로 본다는 것이며, 독립운동은 1905년 국권침탈이 이루어진 을사조약 이후의 항일운동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보훈처의 검토 의견에 의거하면, 독립유공자 서훈도 '1905년 국권침탈이 이루어진 을사조약 이후의 항일운동'에 참여한 대상자에게만 추서되어야 한다.
그런데 1962년부터 지금까지 보훈처는 보훈처의 검토 의견에 입각하여 '1905년 국권침탈이 이루어진 을사조약 이후의 항일운동'에 참여한 대상자에게만 독립유공자 서훈을 추서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훈처는 을사조약 이전의 항일운동인 을미의병(1895) 참여자에게도 서훈을 추서하여 왔다.
'보훈처가 국회 정무위원회 의원실로 보내온 검토의견'에 입각하면, 을미의병 참여자에게 추서한 독립유공자 서훈은 박탈하여야 한다. 독립유공자 서훈에는 예외가 없는 것이다. 서훈은 공정성과 형평성에 맞아야 정당성이 확보된다.
보훈처는 1962년부터 2022년까지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실시에 맞서 봉기한 을미의병(1895) 참여자 145명을 독립유공자로 아래와 같이 서훈하여 왔다. 아래는 극히 일부의 서훈자와 공적개요이다.
 
"박근욱(朴根郁, 1838∼미상): 1896년 음력 2월 전남 나주군에서 나주의병 우익장으로 활동함.(2022, 건국포장)
박화실(朴化實, 1839∼미상, 이명 박찬욱(朴贊郁)): 1896년 음력 2월 이후 전남 나주군에서 김창균 등과 함께 나주의병을 지휘함.(2022, 건국포장)
이면수(李勉洙, 1833∼1898): 1896년 1월경 강원 춘천군에서 이소응 등이 의병을 일으킬 때 통문을 돌려 독려하고 이소응 의진에서 군사장으로 활동함.(2020, 건국포장)
김진림(金震林, 1838∼1900): 1896년 경북 안동군에서 권세연이 이끄는 안동의진 내방장으로 활동함.(2018, 대통령표창)
홍사구(洪思九, 1888∼1896): 1896년 을미왜변에 분개하여 그의 스승인 안승우와 함께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제천 남성에서 싸우다가 안승우가 전사하자 그의 뒤를 이어 군사를 지휘하다가 역시 전사함.(1963, 독립장)
안승우(安承禹, 1865∼1896): 1894년 의병으로써 지평군수 이영춘과 함께 지평에서 거의하여 제천으로 달려가 왜적과 항전하다가 1896년 순사하였음.(1962, 독립장)"
 
이상에서 우리는 보훈처가 을사조약(1905) 보다 10년 이전인 을미의병(1895) 참여자에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추서하여 왔음을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보훈처가 국회 정무위원회 의원실로 보내온 검토의견'은 지금까지 보훈처가 시행해 온 을미의병(1895) 참여자 서훈을 스스로 짓밟은 만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보훈처는 을미의병(1895) 참여자 서훈을 박탈할 용기도 없는 국가기관이다.
보훈처는 지금까지 왕비 민비가 시해된 을미사변(1895)을 국권침탈 사건으로 보았고, 을미사변에 맞선 을미의병(1895)을 독립운동의 시작으로 확정하였고, 을미의병(1895) 참여자에게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여 서훈을 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우리 국민은 모두가 알고 있다.
보훈처의 '검토의견'(2023. 4. 24)은 명백한 거짓이고, 국민을 우롱하는 작태이며, 완전 난센스이며, 황당무계하다.
그런데 왜 보훈처는 금방 거짓으로 들통이 날 '검토의견'(2023. 4. 24)을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에 보냈을까? 기자는 최근 우리사회에 현안으로 부각된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에 대해, 보훈처가 이를 방해·훼방하기 위해 거짓 '검토의견'을 보냈다고 판단한다. 기자는 독립운동사를 전공한 역사학자이다.
 
  

일본 대본영 가와카미 소로쿠 병참총감이 보낸 전보 “향후 동학당을 모조리 살육할 것”(1894년 양력 10월 27일) (출처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실 자료 사진) ⓒ 박용규

 
보훈처의 '검토의견'은 아래와 같이 반박이 가능하다. 첫째, 한국 역사학계는 2차 동학농민혁명이 '독립운동사의 범주에 포함된다.'라고 논증하였다. 한국의 독립운동이 갑오의병(1894)과 2차 동학농민혁명(1894)에서 시작되었다고 대학의 한국독립운동사 개설서인 <한국독립운동사 강의>(한울, 1998년∼2023년)에서 가르쳐왔다. 수많은 학술 논문과 저서에서 2차 동학농민혁명이 항일무장투쟁 즉 독립운동이라고 논증하였다. "동학 2차 봉기의 항일적 성격은 인정하나 독립운동적 성격은 인정할 수 없음"이라는 보훈처의 '검토의견'은 황당무계한 의견에 불과하다.
둘째, 일제가 일으킨 1894년 경복궁점령사건(국권침탈사건)에 맞서, 침략자 일본군을 몰아내고자 2차 동학농민혁명(=항일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전봉준 장군과 최시형 선생이 2차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켜 일본군을 몰아내고자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싸웠다.
 
 

전봉준 장군이 일본영사관에서 심문을 받은 뒤에 찍은 마지막 모습 (1895년 2월 27일) ⓒ 양상현

 
1894년 경복궁 점령사건은 일제가 일으킨 국권침탈 사건이었다. 1894년 경복궁 점령사건은 일본군이 1894년 6월 21일(양력 7월 23일) 경복궁을 점령하여, 국왕 고종을 포로로 잡고, 조선군대의 무장을 해제하였으며, 민씨 정권을 타도하고 친일개화파 정권을 세워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한 사건을 가리킨다.
이 경복궁 점령사건 때에 조선군 궁궐 수비대는 17명이 전사하였고, 60여 명이 부상하였다. 1894년 경복궁 점령사건은 1895년 을미사변 보다 더 규모가 컸고, 더 폭력적이었다. 을미사변으로 일본군에 의해 경복궁이 점령되었고, 조선군 궁궐 수비대 11명이 전사하였으며, 민비가 시해되었으며, 궁녀 2명이 사망하였다. 1894년 경복궁 점령사건과 1895년 을미사변은 일제가 일으킨 똑같은 국권침탈 사건이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보훈처는 "동학 2차 봉기를 독립운동으로 인정할 경우, 국권침탈 시기를 봉기가 있었던 1894년 9월로 지정해야 함"이라는 검토의견을 냈다. 이 검토의견은 명백한 거짓 주장이다. 보훈처는 1962년부터 을사조약(1905)에서 10년을 앞당겨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에 일어난 을미사변부터를 국권침탈 시기로 규정해, 그해에 일어난 을미의병(1895)을 독립운동으로 보아, 을미의병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하여 왔다. 보훈처는 '검토의견'에서 을사조약(1905) 이전으로 국권침탈 시기를 앞당길 수 없다고 강변하고 있으나, 이미 보훈처는 국권침탈 시기를 '을미사변'(1895)부터 이루어졌다고 판정하였다.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가 독립유공자로 서훈이 이루어진다면, 국권침탈 시기가 을미사변(1895)에서 1년이 앞당겨져 1894년 6월 21일(양력 7월 23일)에 일어난 경복궁 점령 사건으로 지정될 뿐이다. 한국 역사학계는 1894년 경복궁 점령 사건을 국권 침탈 사건으로 보고 있다.
셋째, 보훈처는 "국권침탈시기를 앞당기면, 을사조약 전의 대한제국의 자주적 근대화 노력을 일제 치하의 근대화 논리로 해석할 우려"가 있다는 '검토의견'을 냈다. 이 검토의견도 궤변이다.
대한제국(1897∼1910)의 자주적 근대화 노력은 그 자체로 역사적 의미가 있다. 대한제국의 자주적 개혁과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서훈이 무슨 관련을 가지고 있는가? 독립유공자 서훈은 항일투쟁, 반일투쟁을 가지고 서훈하였다.
을사조약 이전의 대한제국의 자주적 근대화 노력 때문에, 보훈처가 국권침탈 시기를 앞당길 수 없다면, 1895년 을미의병 145명 서훈을 박탈해야 한다. 2022년 작년까지 수여한 을미의병 서훈 145명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보훈처가 답변해야 한다.
1895년 을미의병 145명 서훈을 박탈하지 않을 것이면, 보훈처는 2차 동학 봉기 참여자를 똑같이 서훈해야 한다. 왜냐하면 을미의병과 2차 동학 봉기 참여자가 똑같은 항일 독립운동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보훈처는 1962년부터 을미의병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해 왔다. 1895년 을미의병 서훈이 합당하다면,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도 독립유공자로 서훈해야 한다. 양반 유생이 주류를 이룬 을미의병은 서훈에서도 우대를 받아왔다. 농민 출신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서훈에서 차별과 천대를 받아왔다. 이제는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에게도 서훈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
현재(2023년 3월)까지 서훈을 받은 전체 독립유공자는 17,748명이다. 의병(을미의병·을사의병·병오의병·정미의병) 참여자는 2,715명 서훈을 받았다. 그 가운데 을미의병 참여자는 145명 서훈을 받았다.
유족이 있는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470명에 불과하다.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단 한 명도 서훈 받지 못하였다. 이제는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도 서훈하여야 한다.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해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 형성은 법률('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2004)) 제정과 2019년 2월 국가기념일 제정으로 완결되었다. 결자해지는 보훈처가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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