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냥년(還鄕女)" 매트릭스

- 병자호란에서 배워야 할 때

검토 완료

정도원(dutscheong)등록 2023.05.26 09:13
'7년전쟁'이랄 수 있는 임진왜란ㆍ정유재란 양란(1592-1598)의 쓰디쓴 경험으로 조선의 조정은 외적의 침략에 대한 대응책이 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40년이 채 안되어 또 다시 북방의 후금(우리 민족과 시원이 같다는 여진족이 북간도 쯤에 세웠던 나라)과 淸에 의한 두 차례의 침략,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1637)을 당했다. 그때마다 힘없는 백성들, 특히 아녀자들은 필설로 표현이 안될 온갖 곤혹을 치루었음에 주목하고자 한다.


태조 이성계의 조선 개국을 도왔던 삼봉 정도전은 뛰어난 책략가이자 혁명가였지만, 사실 한 시대의 사조와 영향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었던 고려말 조선초의 성리학자였다. 그는 조선의 통치이념으로 중원을 삽시에 삼켰던 몽골족 元이 아니라 신흥강자로 부상한 漢족 明의 유학을 받아들였다. 그는 고려말 요괴승 신돈의 국정농단과 발호하는 부패 호족들로부터 민중들의 삶을 지키고자 혁명적 마스터 플랜인 <조선경국전>을 미친 듯 써내려갔다고 한다. 허나 이방원의 현실 정치에 떼밀려 실각한 채 제대로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짧은 삶을 마감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 조정 대신들은 물론 모든 사대부와 선비들은 성리학에 근거한 숭유억불의 국정기조와 친명배금의 전통적인 사대주의 외교노선으로 이미 뿌리깊은 망국지병에 빠졌던 것 같다. 당시 조선의 선비들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모화사상에 물들여져 있었다. 심지어 시 한 수, 글 한 편의 제목을 붙여도 먼저 큰 나라 明에 대한 겸양을 드러내는 것이 선비의 덕목이었다. 이를테면 송강 정철은 자신이 원 저자임에도 本곡이 아니라 관동別곡, 성산別곡과 같은 식으로 글 제목을 정했다. 거의 병적이었다.



왜국의 호된 침략을 겪은 후에도 조선 조정의 서인 중심 친명파들은 명석하고 유능한 광해군이 임진왜란 후 부국강병과 자주적 중립외교(明과 후금 사이의 등거리 외교)를 펼치자 까닭없이 불만을 가졌다고 한다. 그들은 광해군의 허물을 미끼로 삼아 쿠데타를 일으켜 기어이 광해군을 쫒아내고 인조를 새 군주로 세웠다. 다시 조정은 누르하치의 후금을 오랑캐로 무시하고 홀대하였다. 새로운 임금이 位에 오를 때마다 온갖 선물 보따리를 챙겨 수 개월에 걸쳐 明의 황제를 알현하고 승인을 받는 사실 상의 속국 외교를 당연지사로 받아들였다. 이전 시대인 고구려ㆍ백제ㆍ신라도 고려도 그렇지 않았는데 유독 조선만 그랬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급기야 인조가 통치하던 조선은 후금의 누루하치(청 태조)와 청 태종(홍 타이지)에 의한 두 차례의 침입을 자초한 셈이었고, 이른바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던 것이다. 삼전도는 지금의 송파구 석촌동이라 한다. 인조는 당시 서인들의 조정 기조인 척화배금(斥和排金) 정책에 따라 45일 간 남한산성에서 버티다(당시 예조판서인 김상헌은 주전론을, 이조판서인 최명길은 주화론을 주장했다) 끝내, 우리 민족사 최초의 전쟁 중 항복을 선언하고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 三拜九叩頭: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다는 뜻)를 당하고 말았다. 청의 장수 용골대 앞에서 세 번 허리를 굽혀 무릎을 꿇고 절하며 아홉 번 한겨울 강바닥 얼음판에 이마를 찧는 삼전도의 굴욕은 실로 민족의 비극의 아닐 수 없었다. 오호통제라!



하지만 이보다 더 모욕적인 것은 패전의 댓가로 포로(사실은 첩이나 노비)로 심양에 끌려간 60만 명의 백성 중 50만 명이 아녀자였다는 점이다. 전쟁은 남자들이 치르고 패전의 댓가는 늘 여자들이 몸으로 당해야 하던 시절이었다. 심양에 끌려갔던 여인들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을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이라는 뜻의 환향녀(還鄕女)라 불렀다. 모르긴 해도 이때부터 환향녀-화냥녀-화냥년으로 불리워지지 않았을까, 정설은 아니지만 다수설이다. 어떠한 심리적 기제가 작동하여 '환향녀'에서 "화냥년"에로의 語意(signifier)변천을 가져왔을까.

그 심리적 기저에는 조선의 성리학 즉 유교의 남존여비, 일부종사, 칠거지악과 같은 성차별 인식과 결코 무관하지 않으리라. 조선의 남성 특히 선비들은 군신ㆍ부자ㆍ부부ㆍ반상 간의 유별을 절대적 윤리로 포장한 심각한 불평등 사회의 수혜자, 즉 기득권층이었다. 조선의 조정은 비록 쇠퇴 일로에 접어든 明과는 국가관계를 인격화하여 부자 간의 의리를 중시하듯 아버지의 나라로 섬기는 반면, 한 때 조선의 조공국이었던 후금은 무시하여 홀대하고 배척한 결과 삼전도의 굴욕이란 민족사의 대참사를 자초한 것이 아닐까 싶다. 더욱이 전쟁은 자신들이 수행하고 패전의 댓가는 50만 명이라는 엄청난 수의 무고한 아녀자들을 異邦의 노예로 내어주는 유약한 문신들의 나라 조선! 할 말을 잃는다. 조선이란 거대한 인권부재의 매트릭스가 결국 "화냥년"이란 억압과 소외의 기표(signifiant)를 낳은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모름지기 나라와 겨레의 운명을 걸머진 위정자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국헌을 준수하여 국민의 행복과 나라의 평화를 도모하고 유지해야 할 소명 의식을 지녀야  한다. 이를 소홀히 하거나 방기할 경우 그 책임과 고난은 오롯이 국민들, 그 중 힘없는 서민들의 몫이라는 데 늘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정자는 함부로  전쟁을 입으로 말하지 않아야 하리라. 최선의 전쟁도 최악의 평화만 못하다. 조선 중기나 구한말이나 지금이나 이 땅의 지정학적 위치가 다르지 않다면, 어느 일방을 특별히 우대하고 다른 일방을 적대시할 경우 발생하는 전쟁 리스크를 끝내 회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역사의 교훈으로 되새겨야 한다.
덧붙이는 글 없음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