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의 유사역사학 검토

검토 완료

조성훈(bbondd)등록 2023.06.01 15:34

 
1. 서
 
강단과 재야는 서로를 '유사역사학'이라 칭한다. 물론 재야는 강단을 '식민사학'이라 칭하나, 그 내용은 일제의 조작을 역사라고 한다는 것이므로, 강단이 재야에 대해 사용하는 '유사역사학'과 재야가 강단에 대해 사용하는 '식민사학'은 그 의미 내용이 동일하다. 이문영은 강단의 편에서 재야를 유사역사학이라 칭하며 「유사역사학 비판」이라는 책까지 썼다. 그는 로버트 캐롤과 로널드 프리츠를 인용하여, 유사역사학은 사료나 증거를 선택적으로 사용하며 개연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외적인 것에 주목하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지극히 타당한 말이다. 본고에서는 이문영이 인용한 유사역사학의 기준을 이용하여 강단의 유사사학성을 검토하고자 한다.
 
2. 현 평양이 고구려의 멸망 시 평양이었는가?
 
『수서(隋書)』는 고구려에 평양성 國內城 漢城의 세 도회지가 있다고 한다. 강단은 현재의 평양이 고구려의 멸망 시 평양이었고, 황해도 재령이 고구려의 한성이었다고 한다. 재야는 고구려 평양이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까지 나타난 실증으로 현재의 평양을 고구려 평양으로 보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가능하다.
 
(1) '漢城' 표기 각자성석
 
현재의 평양에서 漢城이라 기록된 고구려의 각자성석(刻字城石)이 출토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의하면, 각자성석의 문구는 "丙戌十二月中 漢城下後卩 小兄文達節 自此西北行涉之" [병술(년) 12월 중, 한성하후부(漢城下後部) 소형(小兄) 문달(文達)이 맡아, 여기서부터 서북쪽 방향으로 나아갔다.]
평양성 쌓으면서 각지에서 사람들을 동원하였을 수도 있으므로 평양에서 한성이라는 각자성석이 나왔다고 현 평양을 한성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성을 쌓는 지역에서 사람들을 동원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더구나 각자성석에 小兄 文達이라는 책임자가 기재되어 있는데, 노동자들을 동원했더라도 그 지역의 관료가 지휘할 것이므로, 각자성석이라는 객관적 사료에 의하면 현 평양을 고구려의 평양이라 보기는 어렵다. 현 평양을 고구려 평양이라 주장하려면 왜 漢城의 관리가 감독을 했는가에 대한 합리적 설명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설명 없이 무턱대고 현 평양이 고구려 평양이라 주장하는 것은 유사사학의 기준에 부합하는 행태이다.
 
(2) 고려의 서경
 
고려는 고구려 평양을 서경으로 하여 중시하였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김부식이 묘청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서경으로 가면서 안북대도호부에 이르러 다른 부대와 합류하는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안북대도호부가 지금의 안주이다. 고려의 서경을 지금의 평양이라 하면 모든 토벌군이 서경으로부터 북쪽으로 직선거리 70km까지 간 것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반란군이 바로 개경으로 남하하여 임금을 모시면 순식간에 반란군과 토벌군의 위치가 바뀌게 된다.
​김부식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런 상황을 만들 리 없으며 김부식은 서경 진압에 1년이 넘게 걸릴 정도로 신중하였는데 토벌 대상 북쪽으로 직선거리 70km까지 갈 리가 없다. 아주 이례적인 경우여야 진압군 책임자가 평양성 북쪽으로 70km나 갈 것이다. 고려의 서경을 현재의 평양으로 볼 개연성이 있는가?
 
(3) 상식적 사고
 
강단의 주장대로 안북대도호부를 안주라고 본다면, 고구려의 평양을 현재의 평양으로 볼 수는 없고, 재야의 요양설이 훨씬 더 개연성이 있다. 현재의 평양은 각자성석에 쓰인 대로 고구려의 漢城이라고 보는 것이 더 그럴듯하다. 강단은 특별한 반증도 제시하지 않고, 각자성석에 나오는 한성을 부인하고, 김부식이 서경을 진압하러 가면서 서경 북쪽 70km까지 갔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문영의 기준에 의하면 그들은 개연성 있는 결론 대신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상정하여 현 평양이 고구려의 평양이라 주장하고 있다.
고구려의 평양 즉 고려의 서경이 현재의 평양인가 아닌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이는 고구려의 강역, 고려의 북방경계 등 우리 역사의 모든 중요문제와 직접 연결된다. 강단의 주장은 현재 상태로는 재야보다 더 유사사학에 가깝다. 강단의 주장에 대한 반증으로 각자성석이 발굴되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기록이 제시된 만큼, 고구려의 평양과 한성의 위치에 대해 과학적 방법에 의한 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다.
 
3. 낙랑군
 
(1) 재야의 유사사학성
 
재야는 낙랑군이 난하 하류에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상서』에 나오는 갈석산이 난하 하구에 있는 현재의 갈석산이라 주장하나, 『상서』는 황하 가에 갈석산이 있다고 한다. 『상서』의 내용은 도이가 황하로 가죽옷을 가져와 무역을 한다는 것이고, 우가 황하를 치수하였다는 내용이다. 난하로 들어와서는 물건을 팔 수 없고, 난하는 농사가 어려운 북방 산악지역을 흐르는 강이므로 우가 치수할 필요가 없는 곳이다. 결정적으로 그들의 주장은 기경량의 "난하 갈석산설에 의하면, 낙랑군 남쪽의 삼한이 바다에 빠지게 된다"는 한마디에 그 유사사학성이 밝혀진다. 그들은 기경량의 반박에 한마디 대응도 못하면서 난하 갈석산설을 주장한다. 학문의 기준은 합리적 토론의 가능성이라는 사실에 별 이론은 없을 것이다. 반박이 제시되었을 때 그에 대한 반론을 할 수 없으면 틀렸음을 자인해야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재야는 기경량의 간단한 언급에 한마디도 반론을 할 수 없으면서 그들의 주장을 고수하기 때문에 유사사학이다.

(2) 강단의 유사사학성
 
강단은 문헌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낙랑군은 현재의 평양에 설치되었다가 313년 어딘가로 이동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강단의 주장에는 실증적 근거가 전혀 없다.
 
(가) 왕검성과 낙랑군의 위치가 같은가?
 
강단은 낙랑군이 예맥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에 설치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서에 의하면 낙랑군은 漢나라 영토에 설치되었다. 관련 사료는 다음과 같다.
 
① 『사기』 「조선열전」
朝鮮王 滿은 옛날 燕나라 사람이다. 전 연의 시기에 진정(自) 처음(始)으로, 진번조선을 침략하여 속하게 함을 경험하였다. 관리를 두고 장새를 쌓으려 하였다. 秦이 燕을 멸한 뒤에는 遼東外徼에 소속시켰는데, 漢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浿水에 이르러 경계로 하고 燕에 소속시켰다. 燕王 盧綰이 漢을 배반하고 匈奴로 들어가자 滿도 망명하였다. 무리 千餘人을 모아 북상투에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서, 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동쪽으로 도망하여 秦의 옛 空地인 上下鄣에 살았다.
 
② 『한서』 「지리지」
낙랑군, 무제 원봉 3년(서기전 108년) 열었다. 왕망은 낙선이라 했다. 유주에 속한다. 호는 62,812, 인구는 406,748명이다. 장새가 있다. 현은 25개이다. 1.조선, 2.남감, 3.패수, 강은 증지의 서쪽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③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조,
樂浪 사람을 阿殘이라 하였는데, 東方 사람들은 나(我)라는 말을 阿라 하였으니, 樂浪人들은 본디 그 중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 『사기』 「조선열전」에 의하면, 漢 영토에서부터 차례로, 요동고새가 있고, 패수가 있고, 위만의 정착지인 왕검성이 있고, 요동외요가 있다. 漢은 요동외요를 지킬 수 없어 요동고새와 패수로 후퇴하였다. 「조선열전」의 문언도 위만이 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갔고, 조선의 비왕장을 죽인 섭하도 패수를 건너 요새 안으로 갔으며, 국경에 강을 해자로 삼아 요새를 두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요동고새가 패수보다 漢 영토에서 안 쪽이다. 위만이 정착한 곳은 요동외요를 넘어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위만의 정착지는 秦의 옛 영토이기 때문이다. 즉 왕검성은 요동외요와 패수 사이이다. 위만의 정착지가 상하장인 것도 요동고새와 요동외요 사이에 있는 땅이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전쟁으로 이민족을 정복하는 경우 그 지역을 파괴하고, 거주자들을 이주시키는 관행이 있었다. 秦도 회수와 사수의 조선인들을 이주시켰는데 이러한 이주정책은 토착세력을 약화시켜 점령지를 실효지배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낙랑군에는 장새가 있는데, 이는 왕검성의 주민을 원래의 漢 영토로 이주시켰음을 의미한다. 먼 곳에는 원래의 漢나라 주민을 보내고 점령한 곳의 주민은 원래의 漢나라 영토로 이주시켜야 통제가 실효적이므로 낙랑군의 장새를 요동외요로 볼 수 없다. 따라서 낙랑군의 장새는 요동고새이고 낙랑군은 원래의 漢 영토에 설치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낙랑군에도 패수가 있는데 이는 조한의 국경이었던 패수와는 다른 강이다. 조선인들은 거주지 주변에 흐르는 강을 패수라 하였으므로 낙랑군이 설치되면서 낙랑군으로 흐르는 강을 조선인들이 패수라 하였을 것이다. 왕검성 사람들이 강제로 낙랑군으로 이주되면서 일부는 韓으로 도망쳐 스스로를 진한이라 하였음을 『삼국지』에서 알 수 있다. 왕검성을 파괴하지 않고, 그대로 낙랑군으로 이름만 바꾸었다면, 왕검성 주민의 韓으로의 대규모 이주는 가능성이 적을 것이다.
물론 필자의 주장도 사실이 아닐 수 있다. 우리가 타임머신을 개발하지 않는 한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객관적 사료상 더 개연성 있는 추측이라 주장할 수 있을 뿐이다. 왕검성에는 요동고새나 요동외요가 없는데, 낙랑군에는 요새가 있어 왕검성 주민이 이주되었음을 개연성 있게 추정할 수 있고, 왕검성 주민의 통제를 위해 이주시키는 경우 요동외요 부근이 아닌 요동고새 부근으로 이주시키는 것이 더 개연성이 있으므로 필자의 주장은 강단에 비해 더 개연성이 있다.
강단은 일제가 성급하게 조작한 소설인, 漢나라가 예맥조선 왕검성에 낙랑군을 설치하였고, 왕검성과 낙랑군은 대동강 남안이라는 주장을 아무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가장 신뢰성 있는 당시의 일차사료인 『사기』 「조선열전」과 『한서』 「지리지」에 의해 왕검성과 낙랑군의 위치가 다르다고 봄이 더 개연적이므로 일제의 주장은 유사사학이다.
 
(나) 낙랑군은 이동하였는가?
 
강단이 제시하는 이동설의 근거는 다음 두 사료이다.
 
① 『삼국사기』 「髙句麗本紀」
313년 겨울 10월 낙랑군을 침략하여 남녀 2천명을 포로로 잡았다, 314년 가을 9월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공했다.
 
② 『자치통감』 권88 진기10 효민황제(孝愍皇帝)
왕준은 조숭을 보내 군사들을 독려하면서 역수에 주둔하게 한 후 단질육권을 불러 그와 같이 석륵을 칠 생각이었다. 그런데 질육권이 오지 않자 왕준은 화가 나서 거액으로 탁발의로를 매수하는 한편 모용외 등에게 격문을 보내 질육권을 함께 토벌하자고 하였다. 탁발의로는 우현왕 육수를 파견하여 병력을 거느리고 그와 맞붙게 했으나 질육권에게 패하였다. 모용외는 모용한을 파견하여 단씨를 공격하고 도하, 신성을 얻고 양락에 이르렀으나 육수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환하고 모용한은 그 일로 남아 도하의 벽청산에 주둔하였다. 당초, -- 요동인 장통은 낙랑, 대방 두 군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는데, 고구려왕 을불리와 서로 공격하면서 수해가 가도 해결되지 않았다. 낙랑인 왕준이 장통에게 말하여 그 백성 1,000여가를 이끌고 모용외에게 귀부하니 모용외가 그들을 위하여 낙랑군을 설치하여 장통을 태수로 삼고 왕준을 참군사로 삼았다.
 
이동설은 『삼국사기』 미천왕의 낙랑군과 대방군 침공 기사를 근거로 주장하지만, 고구려가 두 군을 영토로 만들었다고 쓰여 있지는 않다. 『자치통감』은 고구려와 장통은 계속 싸웠으나 어느 한 쪽이 결정적 승리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결정적 패배를 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근거지를 내준다는 것은 지극히 예외적인 일이다. 또 사람이 국가의 중요자원으로 취급되어 전쟁에서 승리하면 사람을 약취하는 것이 관례인 당시 상황에서, 장통이 1천여 가를 이끌고 지금의 평양으로부터 고구려를 지나 강단이 주장하는 어딘가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강단은 『자치통감』의 기사가 313년의 일이라 주장하나, 初 이하의 문장은 이 사건에서 등장하는 왕준과 모용외와 관련된 사실을 설명하는 부분으로 313년 이전에 일어났던 사건에 관한 이야기이다. 편년체 역사서의 경우 初(당초)에 이어지는 문장은 편년기사의 배경이나 원인, 이미 발생한 관련된 사실을 편년기사에 부기하여, 편년기사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고 관련사실을 통합하여 기술함으로써, 편년체 역사서의 단점을 보완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장통의 모용외에의 귀부는 313년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또한 『자치통감』의 기사 자체가 낙랑군 평양설을 부정하고 있다. '요동의 장통'이라 하여 낙랑군과 대방군이 요동에 있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단은 위 『자치통감』의 기사를 '요동 출신의 장통'이라고 문언과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이동설의 주장과 달리 『진서(晉書)』 「지리지」는 낙랑군이 후한말 공손도 이래 위치 변화가 없다고 한다.
 
​(3) 낙랑군 평양설과 난하설은 유사사학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조는 대방군에서 구야한국까지 7천여리라 하고, 『후한서』 「동이열전」 왜조도 낙랑군의 변경 즉 대방군에서 구야한국까지 7천여리라 한다. 또 덕흥리고분 「태수래조도」에 연국이 낙양에서 2300리로 쓰여 있으므로(州治廣薊今治燕國去洛陽二千三百里) 후한 유주의 군들은 ±2300리로 보아야 타당하다. 낙양에서 보정시 부근까지가 2300리로 볼 수 있고, 보정시 부근에서 김해까지 뱃길로 7천여리라 하면 개연성이 크다. 『삼국지』와 『후한서』는 313년 이전의 일을 기록하였고, 「태수래조도」는 407년의 상황이다. 두 기록의 내용이 일치한다는 것은 낙랑군이 원래 보정시 부근에 설치되었고, 이동도 없었음을 나타낸다.
『설문해자』와 『수경』은 낙랑군의 패수가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고 한다. 『한서』 「지리지」는 증지현의 서쪽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한다. 『설문해자』와 『수경』은 단순하게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여 흐르는 방향만 나타낸 것이고, 『한서』 「지리지」는 중국 동해안의 강들이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당연하여 흐르는 방향은 표시하지 않고, 바다로 들어가는 위치를 구체적으로 표시하여 증지현 서쪽에서 바다로 들어간다고 한 것이다. 낙랑군 증지현은 없다가 새로 생겼던 땅이다. 서해안은 조수간만의 차로 삼각주가 형성되지 않으므로 강단이 패수로 주장하는 대동강 재령강 예성강 하류에는 증지현이 생길 수가 없다. 중국 동해안은 많은 퇴적이 발생한 지역이다.
​ 국가의 영역은 연결되어야 하고 밀집되어야 한다. 밀집된다는 것은 뭉쳐 있다는 것을 말한다. 원이 가장 밀집된 형태이다. 영역의 연결성과 밀집성은 국방과 경제적 효율성은 물론 국민적 일체감의 형성에까지 영향을 준다. 국민적 일체감은 통치의 용이성과 직결된다. 영역이 연결되지 않고 밀집되지 않은 경우엔, 그러한 이상한 영역으로부터 오는 국방과 경제적 정치적 비효율을 상쇄시길 다른 동기가 있어야 한다.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한반도 북부를 지배해야 할 절실한 필요가 있었어야 한다. 그래야 한반도를 지배하는 비효율이 상쇄되기 때문이다. 강단은 이러한 필요성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漢이 흉노와 다투고, 조위가 촉·오와 다툴 때도 한반도 평양까지 차지했다면 무엇 때문인지를 밝혀야 한다. 역사는 사람의 행위이므로 괴상한 것이 나타난다면 반드시 이유가 있어야 한다.
​ 낙랑군이 원래 한반도 평양에 있었다는 강단의 주장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전혀 개연성이 없다. 재야도 삼한을 바다에 빠뜨리므로 개연성이 없다. 낙랑군 보정시설은 객관적 사료들과 부합하여 개연성이 있다. 어느 쪽이 유사사학인가?
 
4. 요동반도 백제

요동반도가 백제 영토였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그에 대한 사료는 다음과 같다.
 
① 『사기정의』 하본기 주석, 括地志 인용 부분
괄지지에서 이르길, 백제국 서남 발해 중에 큰섬 15개가 있는데 모두 읍락이 있고 사람이 거주한다. 백제에 속한다고 한다.
​② 『삼국사기』 「百濟本紀」
무후(武后)가 또한 그의 손자 경(敬)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하려 했으나 그 지역이 이미 신라·발해말갈에 의하여 분할되었으므로 나라의 계통이 마침내 단절되었다.
③ 『삼국사기』 「신라본기」
그러나 백제 땅을 많이 취하였고, 마침내 고구려 남쪽 지역까지 받아 주군으로 삼았다.
​④ 『구당서』 권199 「百濟傳」
그 땅은 이로부터 신라와 발해말갈이 나누어가진 바 되었다.
⑤ 『신당서』 권220 「百濟傳」
그 땅은 이미 신라와 발해말갈이 나누어가진 바 되었다.
⑥ 『신당서』 권 제220 신라전
그러나 백제 땅을 많이 취하였고, 마침내 고구려 남쪽 지역까지 받았다.
⑦ 『통전』 邊防一 東夷上 百濟
그 옛 땅은 新羅로 되었고, 城과 주변의 남은 무리도 후에 점차 약해져서, 突厥과 靺鞨에게 흩어져 투항하였다. 백제왕 夫餘崇은 끝내 옛 나라로 돌아갈 수 없었고, 土地는 모두 新羅와 靺鞨에 편입되었으며, 夫餘氏 왕가는 마침내 끊어지게 되었다.
⑧ 『당회요(唐會要)』 권제95 신라전
이미 백제의 땅을 모두 차지하였고 고구려 남쪽 지역까지 미쳤다.

​위의 사료를 개연성 있게 해석하면, 발해 중에 서남쪽에 큰 섬이 있는 곳은 요동반도밖에 없다. 한반도 서남부를 대진이 가져갈 수는 없으므로, 『괄지지』의 내용을 『삼국사기』, 『구당서』, 『신당서』, 『통전』이 강력하게 보강하고 있다. 따라서 『당회요』가 신라가 백제 땅을 다 차지하였다고 한 것은 '거의 다'를 간단히 '다'라고 쓴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강단은 『당회요』에만 근거하여 신라가 차지한 백제 땅은 한반도 서남부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당회요』 이외의 모든 사료를 무시한다. 『괄지지』는 638년부터 642년까지 편찬된 책으로 현재 전하여지지는 않지만, 위 『괄지지』의 기사를 인용한 장수절의 『사기정의』가 『사기』의 3가주석으로 인정 받는 권위 있는 사서이고 736년에 저작된 만큼 『사기정의』가 인용한 『괄지지』의 백제 영토 기사는 부인하기 거의 불가능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는 한반도 백제는 665년 이전 완전히 병합하여, 한반도에 파견되었던 당군은 665년 돌아갔다. 670년 이후 신라와 당의 전쟁은 요동반도 백제와 고구려 평양(요양)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강단은 670년 이후 신라가 공격하는 백제도 한반도 백제라 하는 것 같은데, 664년에 신라가 완전히 장악한 지역이 왜 다시 전투를 치러야만 점령할 정도로 신라의 세력권에서 멀어지게 되었는지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 강단은 신라와 대진의 백제 분할 기사들에 대해서는 "한반도에 있던 백제 고지(故地)는 신라 영토가 되고, 唐나라가 옛 백제 땅에 설치하였다가 요동지역으로 옮긴 웅진도독부가 발해 영토에 포함된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강단은 『괄지지』의 기사에 대해선 말이 없다.
강단의 말에 의하면 백제가 아닌 곳에 당나라는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였다는 것이고, 백제가 아닌 곳에 설치한 웅진도독부가 있는 지역이 대진의 영토가 되어, 당시의 사가들이 백제 땅을 대진이 일부 취하였다고 썼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사료가 있는 상태에서 강단의 사료 해석이나 설명에 개연성이 있는가?
 
5. 백제·위 전쟁
 
백제와 위는 세 차례 전쟁을 하였다. 백제와 위의 전쟁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1) 484년 전쟁
① 『건강실록』 永明二年
영명 2년(484년) 위가 백제를 정벌하여 백제왕 변도(弁都)를 크게 깨트렸다.
② 『태평환우기』
효문제가 군사를 보내 백제를 정벌했다.
③ 『통전』 邊防一 東夷上 百濟
효문제가 군사를 보내어 백제를 정벌했다.
 
(2) 488년 전쟁
① 『삼국사기』 「百濟本紀」
동성왕 10년에 위(魏)가 침공하였으나 우리 군사가 그들을 물리쳤다.
② 『자치통감』
영명6년 12월 위나라가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했는데 백제에게 패하였다.
③ 『남제서』 백제조는 324자가 삭제되었는데, 488년 전쟁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삭제된 부분 바로 뒤에서 관작 수여를 요청하는 이유로 나라의 환란을 쓸어 없앴다 하고 있으며, 490년 전쟁에 대해 기술할 때 위 오랑캐가 또다시 기병 수십만을 동원하여 전쟁을 일으켰다고 하기 때문이다.
 
(3) 490년 전쟁
① 『남제서』 「東南夷列傳」 百濟
이 해에 魏 오랑캐가 또다시 騎兵 수십만을 동원하여 百濟를 공격하여 그 地境에 들어가니, 牟大가 장군 사법명(沙法名) 찬수류(賛首流) 해례곤(解禮昆) 목간나(木干那)를 파견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오랑캐군을 기습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무찔렀다.
② 『남제서』 「東南夷列傳」 百濟
建武 2년에 牟大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지난 庚午年에는 獫狁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히 쳐들어 왔습니다. 臣이 沙法名 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역습케 하여 밤에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匈梨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들끓듯 붕괴되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료가 구체적으로 백제와 위가 전쟁을 하였음을 기술해도 강단은 백제와 위의 전쟁을 부인한다. 강단은 대체로 백제와 위의 전쟁이 아닌 백제와 고구려의 전쟁으로 보고 있다. 『남제서』에는 백제가 광양·대방·조선·광릉·청하·낙랑·성양의 태수를 임명하였다는 외교문서를 보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강단이 작성한 『전라도 천년사』에서는 "이 지명이 관칭된 까닭은 백제가 이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다기보다 중국에서 이주해 온 중국계 백제인을 사신단으로 이용했던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합리적일 것이다."라고 하는데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위 사료 이외에도, 『진서』 「모용황재기」에는 전연에 백제의 포로가 있었다고 기재되어 있고, 전연은 336년 예부여를 정복하는데, 『자치통감』에는 예부여가 전연에 망하기 전 백제의 침략을 받아 전연 쪽으로 쫓겨났다고 기술되어 있다. 강단은 백제인 포로를 부여인 포로의 오기라 하며, 백제의 침략은 '백제로 표현된 세력'이라고 주장한다. 포로에 관한 기사는 345년의 기사여서 당시에 예부여는 전연의 영토가 된 상태이다. 따라서 부여인 포로가 있을 턱이 없으므로 백제인 포로를 부여인 포로의 오기라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특별한 근거도 없이 사서의 '백제'를 '백제로 표현된 세력'이라 주장하면 소설과 역사의 차이가 무엇인가?
 
6. 옥저와 환도성의 위치
 
강단은 오늘날 함경남도 함흥 일대는 동옥저, 두만강 하류 유역은 북옥저라 한다. 강단은 고구려의 환도성은 집안 산성자산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다음의 사료와 집안 판석령에서 발견된 관구검 기공비와 부합할 수 없다.
 
​①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 過沃沮千有餘里,至肅慎氏南界,刻石紀功
② 『양서』 「동이전」,고구려조, 絕 沃沮千餘里,到肅慎南界,刻石紀功
③ 『북사』 「고구려전」 絕 沃沮千餘里,到肅慎南,刻石紀功
④ 『資治通鑑』 卷75, 魏紀 7, 正始7年, 過沃沮千有餘里, 至肅愼氏南界, 刻石紀功而還
 
​ 모든 사서가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옥저를 지나(過) 또는 가로질러(絕) 천여리를 가서 숙신의 남계에 공을 기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관구검기공비가 집안 판석령에서 발견되었다. 동천왕은 환도성에서 옥저로 도망가므로, 강단에 의하면 집안의 산성자산성에서 한반도 동해안으로 가는 것이 된다. 추격군은 옥저를 가로지르면 동해바다로 가게 되는데 어떻게 바다로 천리를 가는지 궁금하다. 바다로 천리를 갔는데 집안에서 관구검기공비가 발견되므로 그들은 처음 왔던 곳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갑작스런 시공간의 변형으로 생긴 웜홀을 통과했는지 모른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집안 서쪽 1,000여 리에 옥저가 있었고 그 서쪽에 환도성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강단의 주장이 어떻게 개연성을 가지는가?
 
7. 백제 신라 낙랑군 대방군 사이의 위치 모순
 
강단은 백제는 경기도, 신라는 경상도, 낙랑군은 평안도, 낙랑군 동부도위는 함경도, 대방군은 황해도라고 한다. 그러나 강단의 위치 비정은 『삼국사기』와 『삼국지』의 기사와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온조왕은 백제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고 말하며, 신라는 서기전 28년, 서기 4년, 서기 14년, 서기 36년 네 차례나 낙랑군의 공격을 받는다. 『삼국지』에 의하면 공손강은 군대를 일으켜 倭와 韓을 공격하여 帶方에 복속시켰고, 245년경 조위는 공손씨를 멸하고, 공손씨에게 복속되어 있었던 辰韓 팔국을 낙랑군에 귀속시키려 하였는데 이들이 거부하자, 진한 팔국을 멸하였다.
백제 동쪽에 낙랑이 없으므로, 강단은 춘천에 맥국이 있었고, 이들이 낙랑을 참칭했다고 하며, 백제 북쪽의 말갈에 대해선 동예설, 고구려 내 말갈설, 영서예설, 마한의 소국인 신분고국설 등을 별다른 근거 없이 주장한다. 강단에 의하면 온조왕이 참칭하는 것도 모르는 무능한 왕이 된다. 황해도의 대방군과 다채로운 그들의 말갈과는 어떻게 관련되는지도 알 수 없다. 낙랑군이 평안도, 낙랑 동부도위가 함경도이면, 낙랑과 경주 사이를 낙랑군이 점령하지 않는 한 경주에 있는 신라가 낙랑군의 공격을 받을 이유가 없다. 강단은 낙랑의 신라 침략 기사에 대해 날조기사설, 상인집단설, 북진한설, 시기 혼동설, 낙랑 참칭 옥저설, 최리 낙랑국설, 편찬자 실수설 등을 주장하나 모두 설득력은 없다. 무려 4차례의 침략이 기록되어 있어 신라를 침략한 세력은 낙랑군이나 낙랑군 동부도위가 아닌 다른 세력이라 볼 수는 없다. 진한이 경상도라면 공손씨는 경상도를 대방군에 편입하였고, 조위는 경상도를 멸하고 영토로 만들었어야 하며, 경상도에 왜가 있어야 한다.
후삼한을 한반도 남부에 비정하는 재야도 이러한 위치 모순에 대해선 강단과 유사하다.
 
8. 결론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객관적 사료와 강단의 주장이 불부합하는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강단의 해명은 없거나, 극히 예외적이고 특이한 상황을 가정하는 것이다. 민족사관이나 식민사관 등 관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역사학은 거의 다 유사사학이다. 신뢰성 있는 사료에 부합하게 해석해야 하고, 그것이 안 되면 모른다고 해야 한다.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의 소설을 유지하기 위해 사료가 틀렸다고 하거나, 사료를 오역하거나, 사료의 문언이 문언과 다른 것을 의미한다고 근거 없이 주장하거나, 자신의 주장이 사료에 반함을 알면서도 침묵하는 행위는 유사사학적 행태이다. 역사학이 과학으로 되기 위해선 국뽕도 해롭지만, 일제의 소설을 검증 없이 옳다고 하는 행위는 더 해롭다. 강단은 이문영이 인용한 유사사학의 기준에서 보면 유사사학이 확실하다. 재야가 유사사학이더라도 힘이 없으므로 사회에 악영향은 강단보다는 적다. 유사사학인 강단이 사학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우리 역사를 창작하는 현실은 시급히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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