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 다큐멘터리 영화 <고양이 케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속에서 공존과 공생에 대해 우리에게 보내는 숙제

무분별한 도시 개발의 소음 속에서 도시 주민과 고양이들과의 사랑스러운 관계에 대한 우리의 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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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민(koshka04)등록 2023.06.12 11:23
현대의 애묘인들에게 보내는 이스탄불 도시 속 일곱 마리 길고양이들이 보내는 편지

오늘날 유투브에는 수많은 고양이이 관심을 받으며 영상이 공유되고 있고, 우리는 매일 화면에서 보는 보통은 귀엽고, 종종 어리석은 고양이를 볼 수 있다. 한때 장엄하거나 심지어 신으로 여겨졌던 이 고귀한 고양이에 대한 우리의 소비 방식은 달라졌지만 고양이는 같은 얼굴을 하고는 애묘인들을 맞이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고양이 케디'는 고양이를 좋아하는 현대의 애묘인들에게 이스탄불의 일곱 마리 길고양이들이 보내는 편지다.  
 

영화 [고양이 케디] 포스터 ⓒ Kedi film Official

   
'고양이의 눈'이 아닌 '고양이의 각도'에서 도시를 탐험하는 고양이들. 길들여지지 않는 상태에서 이스탄불의 길 위를 자유롭게 걷는 일곱 마리의 고양이들은 도시의 사람들과 함께 서로를 길들이고, 이해하며, 이스탄불의 영혼을 길러낸다

영화 속 카메라는 고양이의 눈이 아니라 고양이의 각도에서 지상에서 경험한 도시를 탐험한다. 도시의 길고양이들과 동정심 많은 주민들의 달콤하고 수수께끼 같고 때로는 복잡한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적어도 그동안 봐온 다른 종류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고양이의 세계에서 감독 제이다 토룬은 수염 달린 이 귀여운 피실험자들이 그들의 목에 달린 카메라를 무시하고 그들이 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내 우리가 보는 이스탄불이 도심 속 고양이의 관점에서 얼마나 극단적으로 다른 지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카페 테이블 아래부터 길거리 곳곳을 뛰어다니는 야생성의 길고양이들은 이스탄불을 인간의 각도와 고양이의 각도 사이를 수식적으로 돌아다니며, 나무에 오르고, 옥상의 지붕선을 건너거나 때때로 햇볕이 잘 드는 대지에서 졸고 있다. 해질녘에 보스포러스 해협 옆에서 포즈를 취하는 고양이와 이스탄불의 풍부한 장면이 담겨있다. 안으로, 밖으로, 아래로, 위로 고양이의 움직임에 따라 카메라는 뒤로 물러나 주변의 도시를 드러냈다. 이슬람 모스크의 첨탑과 돔, 이스탄불 특유의 붉은 기와지붕과 수목, 끝없이 펼쳐진 이스탄불의 바다와 하늘의 영원한 풍경을 발견한다. 

이렇듯 도시는 주로 낭만적인 데코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르렁거리는 무릎 고양이의 모습과도 흡사하다. 각각의 새로운 샷으로 영화를 보는 이들의 눈은 스크린 위로 돌진하며 고양이들이 말하는 이야기의 퍼즐을 맞춘다. 이스탄불의 거리 위의 자유로운 일곱 마리의 고양이들의 각도에서 길들여지지 않는 상태의 길고양이들과 도시의 사람들이 함께 서로를 길들이고, 이해하고, 이스탄불 도시의 영혼을 길러낸다.   

이스탄불 여행 중에 만난 길고양이 ⓒ 강경민

   
프레임은 우리가 무분별한 도시 개발의 소음에서 무엇을 잃었는가를 상기시켜준다
"고양이는 오늘날의 이스탄불인 이곳에서 수천 년 동안 살아 오면서 여러 제국과 도시의 흥망성쇠를 지켜봐 왔습니다. 
많은 사람의 보살핌을 받고 있지만 주인은 없죠. 
이들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혹은 무시하든 이곳에서 고양이는 사람들 삶의 일부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고양이 케디] 중에서

식당의 쉐프, 빌라촌 단지 사람들, 도시 중심가의 상인들과 시장을 찾는 도시 사람들조차 매혹할 수 있는 장난기 있는 찰리 채플리 같은 매력을 가진 도시 고양이들의 삶을 목격한다. 고양이들끼리의 힘든 거리에서의 싸움, 출생과 죽음의 롤러코스터같은 인생 속에서 진행되는 이스탄불 도시 개발로 인해 쫓겨나는 원주민들과 고양이들. 감독은 이스탄불의 시민 인터뷰를 통해 고양이의 이야기는 젠트리피케이션과 도시재생이라는 모든 인간의 정치사회와 교차하며 이 영화의 본질을 밝힌다. 시장의 노점, 빈집, 퇴거, 저소득층, 부서진 집과 버려진 토지는 옛 동네의 정리와 개발을 위해 예정되어 있는 도시 개발은 인간과 고양이의 공동적인 현재화의 자본에 의한 위협적인 존재라는 걸 영화 속 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Recep Tayyip Erdoğan) 튀르키예 대통령의 풍자 낙서와 교차하는 고양이의 포호를 통해 이해시킨다. 
 

튀르키예 대통령의 풍자 낙서와 고양이의 포호 영화 [고양이 케디] 중에서 ⓒ Kedi film Official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 이스탄불의 길고양이들은 약 1,700만명 이상의 도시 주민과 섞여 있다. 이스탄불의 고양이들은 삶을 여행하는 동안 인간의 거주지, 항구의 어민, 도시의 어린이, 낯선 이웃 사람들을 방문하여 머리의 쓰다듬을 허락하기도 하고, 신선한 우유 한 그릇을 도시의 동반자와 교환한다. 이 과정은 공존하는 지역에서의 공생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영화 속 사연 있는 일곱 마리의 길고양이의 시각에서 적절하게 이해하고 이해 받는 동등한 관계를 보여준다. 공존하며 공생하는 공간 속에서 고양이는 각자의 방식대로 인간을 만나 자신 마음대로 자유롭게 이동한다. 

영화에서는 언제부터 이스탄불에서 고양이와 사람이 같은 공간에 공존하여 공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학술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몇 년도부터 고양이가 유입되었나는 기록은 없으나 무역항이던 이스탄불의 도시사와 맞닿아 있을 거라고 설명한다. 오스만튀르크제국 시절 흑해와 지중해를 관통하는 무역항이자 수도였던 이스탄불에는 흑해너머 러시아제국, 크림타타르공국, 불가리아와 루마니아, 코카서스지역내 크고 작은 국가 및 지중해를 마주보고 있던 유럽의 여러 나라의 배가 드나들었다. 당시엔 배의 선원들에게 배에 고양이를 태우면 액운을 막을 수 있다는 미신이 있었고, 이스탄불을 향한 배에 태운 고양이가 이스탄불에 도착 후 도시로 밀항하면서 이스탄불내 고양이 수가 증가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스탄불의 한 예술가를 통해 공존할 수 밖에 없는 배경과 공생을 택한 이스탄불 시민들의 생각을 영상에 담았다.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도시, 이스탄불 이스탄불 여행 중에 촬영 ⓒ 강경민

 
감독 제이다 토룬은 예술가부터 어부, 쉐프와 주민들, 공장의 노동자와 노점 관리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일곱 마리의 고양이들과 그들의 자발적인 관리인인 영화 속 출연진을 강조한다. 그들의 사랑스러운 성찰은 인간과 고양이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일련의 상황을 제공한다. 인터뷰한 시민들은 "고양이와 함께 있는 것은 정신 치료에 효과가 있었다", "스트레스가 있을 때 고양이를 쓰다듬으면 부정적인 에너지를 흡수한다", "고양이에게는 인간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등 도시 속 작은 이웃에 대한 생각도 다양하다. "우리집 팁 항아리에 있는 것은 모두 고양이에게 한다"라고 말하는 만트(튀르키예식 전통 만두, 원어로 Mantı) 판매대의 주인부터 훈제 칠면조를 먹이는 고급 레스토랑의 쉐프까지, 도시의 길고양이를 돌보는 것은 일종의 시민적인 의무라고 묘사한다.
 

예술가와 고양이 영화 [고양이 케디] 중에서 ⓒ Kedi film Official

 
이 영화에는 정치적인 이슈가 영화의 흐릿한 세계에 들어있다. 인터뷰를 한 예술가는 고양이가 공공연히 여성의 자유성을 구현할 수 있는 존재임에 관한 자유에 대한 논평을 하며 도시의 고양이가 사라진다는 것은 결국 자유가 멸종됨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또 다른 장면에서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을 비난하는 거리 예술 스텐실 앞에서 날카로운 송곳니를 들어낸 길고양이가 스트레칭을 하고 하품을 한다. 한 동네 농산물 시장의 상인들은 이 지역의 고층 개발의 확산이 결론적으로 도시의 길 잃은 생명들의 공간을 침범하고 있다고 불평한다. 다시 말해 튀르키예의 이스탄불이 직면하고 있는 젠트리피케이션 문제의 환기는 결국 영화의 각기 다른 사연이 하나의 도시 문제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고 있다. 즉, 인간의 각도에서 이들이 말하는 것은 도시개발로 인한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이는 같은 공간에서 숨쉬는 다른 종족에 관한 무관심이 커지는 증상으로 만들어지고 있음을 꼬집는다.

영화에서 도시 이웃의 모든 사람들은 가장 좋아하는 고양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고양이들에게 이름, 성격, 모든 이야기를 관람객들에게 들려준다. 이상하게도, 고양이들은 의인화되어 주민 스스로의 삶과 공생한다. 이스탄불은 이러한 도시의 네발 달린 길잡이들의 영향 덕분에 더 배려심이 많고, 공동적이며, 기능적인 도시라는 것을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감지 시켜준다. 고양이는 정신적으로는 독립적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사회적인 동물이다. 그만큼 그들은 완벽한 도시의 거주자이며, 사냥으로 자급자족하지만 인간의 배려 속에 신뢰한다. 모험적이고 대담하지만 여전히 신중하고 조심스럽고, 호기심이 배려와 섞여 있다.

도심 속 길고양이의 각도에서 바라본 젠트리피케이션, 도시 주민들과 고양이들과의 사랑스러운 관계에 대한 우리의 반성

감독 제이다 토룬은 이스탄불의 일곱 마리의 길고양이의 시선으로 이스탄불이란 도시의 삶을 추적한다. 로마제국의 변방 어촌도시에서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변했고, 오스만튀르크제국의 수도 이스탄불로 지칭하는 명칭이 바뀌는 만큼 도시의 규모도 거대 해졌다. 튀르키예 공화국의 심장부 이스탄불의 오늘날은 정신적,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인 빈민가와 그렇지 않는 구역으로 양분화 되었다. 도시는 모두에게 적합한 도시계획 없이 도시의 확장이란 슬로건 아래 탐욕스러운 젠트리피케이션의 장소가 되었다. 영화 말미에서 감독 제이다 토룬은 '도시의 녹지와 토양이 줄어들 수록 더 도시는 평범하게 신도시화로 포장되어가고, 도시의 길고양이들에게 더 매몰차고 불친절 해진다'고 말한다.  

<Gentry + fy + cation = Gentrification(젠트리피케이션)>은 기존의 낡은 도시를 새롭게 재생시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낙후한 도시가 개발되면 지역내 투자를 유치하여 주택과 상권의 리모델링을 통한 도시 미관이 좋아져 지역이 활성화되어 결론적으로 도시 개선과 발전을 꾀할 수 있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오류가 숨어 있다. 낙후된 지역은 외부 주체의 참여 없이 자발적인 재생이 불가하다. 외부 투자를 통해 주택과 상권이 개발되면 임대료가 증가하게 되고, 이만큼의 외부 수익이 없다면 결국 지역에서 쫓겨나고서 결국 쫓겨나갈 수 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고등학교 시기 미국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유년기를 보낸 튀르키예의 젊은 감독 제이다 토룬(Ceyda Torun)은 2017 DOC NYC Film Festival에서 고양이 케디 영화 상영을 앞두고 영화 잡지 Women and Hollywood와의 인터뷰에서 "고양이 케디는 다른 동물과의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통찰력을 통해 인간과의 복잡성을 탐구한다"고 말했다. 영화의 관객인 인간은 길고양이들과의 관계와 그들의 통찰력을 통해 인간과의 복잡성인 이스탄불의 젠트리피케이션을 문제를 탐구한다. 도시의 기획자와 도시주의자들은 도시를 운영하기 위해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은 조합이며, 한쪽의 덕목을 강조하지 않고 균형이 잡혀야만 도시 개발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잊고 있다. 감독은 고양이의 모험가 적이며 탐색적이고 본능적인 민첩성을 살려 <고양이 케디> 영화 속 길고양이의 각도로 평형을 직관적으로 관찰하고 향해 했다. 

영화 <고양이 케디>는 이스탄불, 그 속의 주민들과 고양이들의 모습을 엽서 같은 이미지로 제공한다. 모든 다큐멘터리는 권위주의 정부의 기소나 인도주의적 위기의 기록이 되어야 하는 필요가 없다. 한 도시에 관한 영화계 부당성을 주장하며 까다로워지지 않아도 현실 문제를 꼬집고 반성할 수 있음을 영화 고양이 케디는 증명한다. 결국 <고양이 케디>는 이 도시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오랜 주인인 이스탄불의 길고양이의 각도로 바라본 젠트리피케이션 속에서 공존과 공생에 대한 우리 스스로에게 보내는 숙제이다.
"이스탄불에서 고양이는 단순히 고양이가 아닙니다. 
고양이는 도시의 상징이며 이스탄불의 본질인 고유한 문화를 한 몸에 담고 있죠. 
고양이가 없다면 이스탄불의 영혼 일부도 없어지는 겁니다. 
지구 상 어디에도 이러한 곳이 없습니다"

영화 [고양이 케디] 중에서

사진 출처: 
영화 속 장면 스크린샷, 
kedi film 홈페이지 (https://www.imdb.com/title/tt4420704/mediaindex/?ref_=tt_mv_cl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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