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성모의 <러브헌터-개정판>이 지난 8월 2일 출간됐다. ⓒ 야릇
로맨스 소설 집필 도전기는 계속될 수 있을까. 어느덧 로맨스 소설을 쓴지 5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로맨스 소설을 잘 쓰려는 방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닐 것이다. 다른 작품들 열심히 읽고, 충실히 분석하는 게 선행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그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다. 읽는 걸 게을리하고 오로지 쓰는데 열중했던 거 같다. 그리고 나름대로는, 로맨스 소설을 잘 쓰기 위해선 사랑에 대한 성찰이 우선시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리타분한 작가가 되지 않기 위해 사랑에 대한 성찰과 나름의 연구를 했지만, 그 결과는 아직은 실패로 귀결된 거 같다. 독자들의 반응이 별로 좋지 않았다.
사랑을 글로 예쁘게 표현하는 게 힘들었다. 사랑은 의학적으론 호르몬의 영향이라고 하고, 사회과학적으로 사회문화적 현상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사랑을 그렇게 짧고 단편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도 던지는 이야기들은 정말로 많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시대를 막론하고, 부모님들의 자식에 대한 사랑만 보면, 그 사랑을 호르몬의 영향과 사회문화적 현상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본다.
사랑이란 감정을 수학 공식처럼 대입해 정답을 구하려는 시도는 우리 사회의 발전에 어떤 도움이 될지 물음을 던져본다. 사랑의 감정을 분석하려는 시도는 그만큼 사랑이 인류 보편적 가치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성가의 가사처럼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가사가 공감되는 건, 그만큼 사랑이란 감정이 인간이 추구하는 최상의 가치이면서, 당연히 누려야 하는 권리이기 때문이 아닐까.
사랑에 대해 분석하면 할수록, 그것에 대해 쉽게 정의하기 어려운 이유는 사랑의 감정을 생물학적으로나 사회 제도적으로, 마치 정의하듯 정답을 찾는 게 어렵기 때문이다. 만약 사랑이 없다면 이 세상에 그 어떤 생명체도 존재하지 못했다고 감히 생각한다. 우리는 사랑에 대해 철학적 접근에 익숙하다. 그만큼 난해하고 복잡한 게 사랑이니까 말이다. 앞으로도 이 복잡한 감정을 끊임없이 연구하며, 사랑에 대해 정의하고, 자신들의 연구영역으로 사랑을 끌어들여 해석하려는 시도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로맨스 소설을 쓰면서 사랑에 대한 나름의 고뇌가 있었다. 과연 독자들은 어떤 내용과 소재를 좋아할까. 물론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오래전부터 동화습작은 했다. 하지만 로맨스 소설 집필은 동화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영역이었다. 처음에 로맨스 소설을 집필했을 때에는 독자의 관점에서 소설을 집필하지 않았다. 내가 느낀 사랑, 원하는 사랑, 그리고 사랑에 대한 판타지 등, 이에 대한 생각들이 고스란히 글로 표출됐다.
그런데, 글을 쓰면서 내가 알던 사랑이 점차 변해갔다. 그러니까, 사랑에 대해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면 할수록 현실에서 멀어질 뿐이란 걸 깨달았다. 특히 개인적으로 육체적 사랑에 대한 생각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육체적 사랑을 선정적인 거, 본능적인 거, 낮고 좁은 영역의 사랑으로 치부한 것이, 얼마나 편협하고 좁은 식견인지 깨닫게 됐다. 육체적 사랑은 사랑의 감정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또 이렇게 표현하면 어떤 학자는 사랑의 목적은 성이라는 관점으로 주장한 것으로 아는데, 이와는 궤를 달리한다.
로맨스 소설을 쓰면서, 사랑을 갈망하는 순수한 독자들이 많다는 사실에 나는 반성을 하게 됐다. 로맨스 장르를 좋아하는 독자들에 대한 생각이 처음 로맨스 소설을 쓸 때와 완전히 변했다. 왜냐하면, 반쪽짜리 사랑은 미완성일 테니까. 육체적 사랑이 제외된 플라토닉 사랑이 더 크고 높은 가치의 사랑이라고 받아들여 져서는 안 된다고 본다. 사랑은 인간 삶의 일부분이지, 독특하고 특별한 영역이 아니다. 독자들을 존중하게 되면서, 왜 그동안 쓴 작품들이 독자들의 큰 호응을 못 이끌었는지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다.
나는 작품을 집필할 때, 베드신 등을 섬세하게 표현하지 못했다. 프로답지 못했다. 로맨스 소설 장르를 쓰는 작가라면, 독자들이 원하는 글을 써야 할 것이다. 독자들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자기 얘기만 풀어가는 작가가 독자의 선택에서 멀어질 것이다. 물론 아직 문학작품을 써야 한다는 강박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다. 하지만 그동안 노력을 하지 않고, 깊은 성찰 없이 작품을 집필한 것에 대해 충분히 반성하고 있다.
지난 8월 2일 출간한 <러브헌터-개정판>은 글쓴이의 초기 작품을 다시 출간하는 것으로, 베드신 등이 제외돼 있다. 개정판을 쓰려고 결심을 하고, 베드신 등을 첨가하려고 했으나, 등장인물의 캐릭터가 변하는 것 같아 베드신은 넣지 않았다. 하지만, 첫 출간 당시보다 스토리가 따뜻하면서 설득력 있게 썼다, 또 거친 문장들을 가다듬는 작업을 하면서 독자들이 이전보다 읽기 수월하도록 작품을 썼다. 전반적으로, 스토리도 흥미롭게 보강했다. <러브헌터-개정판>이 첫 출간 당시보다 사랑을 많이 받길 소망하지만, 어쩌면 다시 <러브헌터>를 심폐소생술을 해서 다시 세상에 내보낸 것 자체만으로 적지 않은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아울러 로맨스 소설을 쓰면서 알게 된 사실 하나가 있었다. 다른 작가들이 쓴 작품들의 댓글들을 읽어보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로맨스 소설을 좋아하는 마니아 독자층은 남성 작가의 작품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 이유를 물어볼 때가 없어서, 나름 왜 그럴까, 의구심을 가진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이것도 다른 작가 작품의 댓글을 보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남성 작가들이 쓴 작품들이 남성 중심으로 글을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여자는 현모양처로서, 내조를 잘해야 하고, 요리실력도 있어야 한다는, 말 그대로 전통적인 여성관을 가지고 글을 쓰기 때문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고 보니, 글쓴이가 쓴 작품들도 여지없이 전통적인 여성관을 벗어나지 못했다.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남성을 떠받드는 여성상을 일관되게 구현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글쓴이가 쓴 <수호천사>에서는 내조를 위해 남편이 좋아하는 유행 지난 화장을 한다든지, <러브헌터-개정판>에서는 자주 출장 가는 아버지가 집을 비워도 아버지가 좋아하는 반찬을 어머니가 빼놓지 않는다고 서술한 부분은 지극히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의 사고로 비칠 수 있다. 아마도 글쓴이처럼 전통적인 여성관을 벗어나지 못한 남성 작가들이 작품 속에서 여성상을 자기 사고 테두리 안에서 고민 없이 그려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본다. 이는 일부 독자들이 남성 작가를 기피하는 충분한 사유가 된다고 본다.
한편 이따금, '유리천장'에 대한 기사를 접할 때가 있다. 가끔 대기업 대표나 임원으로 여성이 임명됐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전해진다. 왜 우리나라 기업들은 여성에게 좀처럼 기회를 제공하지 못했을까. 물론 글쓴이는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 하지만 로맨스 소설을 쓰면서 여성에 대한 무지를 깨달았듯이, 서로 간의 무관심이나 무지에서 오는 현상이라고 본다.
로맨스 소설을 쓰는 일부 남성 작가들이 여성상을 시대에 맞지 않게 그려내고 있듯이, 이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하다는 생각도 해본다. 무심코 현모양처의 여성상을 그려낸 건, 그만큼 현대 여성에 무관심했다는 방증도 될 것이니까. 우리 사회가 진일보되려면, 적어도 서로 간 알려는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무심코 접한 댓글로 독자들의 마음을 알았듯이, 관찰 및 토론 등으로 남녀 간의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가 많이 만들어져 활발한 교류의 장이 펼쳐졌으면 하는 바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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