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당신은 무엇을 '약탈'해 왔는지요?

지극히 사적인 네팔 여행기(1)

검토 완료

오정오(seodanggol66)등록 2023.08.27 20:08
▪지극히 사적인 네팔 여행기의 시작

포카라(네팔 휴양 도시이자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위한 관문)에서 싱잉볼(Singing Bowl)을 충동적으로 사버렸습니다. 똥바(Thongba) 때문입니다. 똥바는 발효된 기장에 뜨거운 물을 부어서 대나무 빨대를 꽂아 빨아먹는 티베트 전통술입니다. 쌀쌀한 추위에 똥바 한 잔을 마시면 금새 언 몸이 풀립니다. 두어 번 뜨거운 물을 부어가며 마시다 그만 뚱바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습니다. 기분 좋게 숙소로 돌아오는데 싱잉볼이 제 눈에 걸려든 겁니다. 가게 아저씨가 싱잉볼을 살살 문질러주는데, 딱 그만 제 몸과 마음을 빼앗겨버렸습니다. 가볍게 웅∼ 소리를 내는 진동이 공기를 타고 제 몸속 깊이 들어와 세포 하나하나를 살살 어루만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이게 취기 탓인지 싱잉볼 탓인지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살짝 황홀한 경험이었습니다. 

똥바 티베트 전통주 ⓒ 오정오

 
싱잉볼은 '노래하는 그릇'이란 뜻으로, 우리나라 목탁처럼 티베트 불교에서 사용하던 도구입니다. 소리가 아름다워 명상에도 자주 이용합니다. 소리는 표면을 문지르거나 두들기면 됩니다. 나중에 검색해보니, 싱잉볼 소리는 몸과 마음을 이완하는 데 도움이 된답니다. "에너지 균형이 깨진 몸을 원래대로 돌려주고 뇌파를 마음이 안정됐을 때 나오는 알파파로 만드는 효과"가 있다네요.
지난 네팔 추억을 오며가며 떠올리고자, 거실 잘 보이는 곳에 싱잉볼을 고이 모셔뒀습니다. 그리고 오늘 집에 돌아와보니, 발도 없는 싱잉볼이 부엌 식탁까지 와 있었습니다.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고 했나요. 가까이서 본 싱잉볼에 경악했습니다.
 

싱잉볼 절구로 사용된 싱잉볼 ⓒ 오정오

 
되돌아서면 배고픈 아들이 뭔 요리를 했는지 모르나, 고명으로 깨를 뿌려 먹고 싶었나 봅니다. 싱잉볼을 명상이 아닌 절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 나이 남자아이의 미친 호르몬을 탓하며, 욕지기가 나오는 것을 꾹 참았습니다. 화는 났지만, 그 덕에 지난 겨울에 다녀온 네팔과 히말라야가 새록새록 다시 떠올랐습니다. 

▪질문하는 여행자

철학자 니체는 여행에 다섯 등급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는 눈먼 여행자로, 여행했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여행자입니다. 이들은 정해진 코스를 따라다니며 모두가 보는 것을 똑같이 보고 똑같은 음식을 먹고 비슷한 사진을 남깁니다. 관광객입니다. 두 번째는 여행하면서 관찰하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관찰하면서 무엇을 느끼고 경험한 사람입니다. 네 번째는 그 경험을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여행 전과 후가 달라진다고 합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여행에서 배운 지혜를 자신의 삶에 녹여내고 실천하는 사람으로, 여행의 진정한 고수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번 여행이 도망에 가까웠습니다. 지난 몇 년, 일상은 피로에 찌들고 이런저런 고민이 덕지덕지했습니다. 벗어나고 싶었고, 일상의 부재를 느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어떤 이유나 목적을 가지지 않고 따라나선 여행이었습니다. '히말라야 오지학교 탐사대' 뒤꽁무니나 졸래졸래 쫓아다니며, 좋은 거 보고 맛난 거 먹고 좋은 사람들과 이런저런 농이나 주고받으면서, 그저 아프지 않고 잘 놀다오는 것이 계획이라면 계획이었습니다. 저는 니체가 말한 여행자 등급 중 맨 아래였을 겁니다.
저처럼 일상에서 벗어나려고만 한 사람도 있지만, 제 일행 중 누구는 여행에서 뭔가를 찾고자 했습니다. 그는 무거운 질문을 가지고 왔다고 했습니다. 롯지에 어둠이 내리며 자신의 고민을 퍼즐마냥 한 조각씩 드러냈습니다.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계획했던 일들이 교육감 선거 이후(진보에서 보수로 바뀌었습니다) 헝클어지고 뒤틀리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더 나아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듯했습니다. 어쩌면 지난 수년간 쌓은 그의 공든 탑이 무너질 수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마음을 추스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는 저에게 말하고 있었으나, 어쩌면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이캠프에서 내려오던 날, 그는 결국 그 일에 다시 "몰입"하게 될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결의였습니다. 그는 답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왔지만, 스스로 다짐하는 것으로 질문에 대한 답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아무 생각 없이 떠난 여행이었지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니 여러 질문을 가지고 온 기분이 듭니다. '지극히 사적인 네팔 여행기'를 쓰면서 내가 가져온 질문이 무엇이었을지 생각해 볼 참입니다.
 

히말라야 마르디히말에서 바라본 안나푸르나 ⓒ 오정오

 
▪여행의 이유

여행은 영어로 'travel(트레블)'입니다. 소설가 김영하는 그의 산문집 『여행의 이유』에서 그 어원을 고대 프랑스어 'travail(트레베일)'에서 파생했다고 말합니다. 현대의 우리가 '여행'하면 떠올리는 즐거움과 해방감과는 거리가 먼 단어로 '노동과 수고, 고통' 같은 의미가 담긴 말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 20세기 이전에는 재미로 먼 곳을 여행하는 일이 거의 없었답니다. 멀리 떠나야 하는 경우는 자신이 살던 공동체에서 추방당하거나, 외부 침략이나 전쟁 등으로 삶의 터전을 빼앗겼을 때 어쩔 수 없이 당하는 일이었습니다. 스스로 먼 여행을 떠나는 경우는 순례자 정도였습니다. 그 긴 여정에 뜻하지 않게 강도를 만날 수도, 병에 걸릴 수도 있는 것이어서 여행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일이었습니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고, 옛 개념으로 보면 여행은 즐거움과는 거리가 먼, 고통일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현대에 와서는 여행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프랑스 작가인 실뱅 테송은 『여행의 기쁨』에서 현대인의 유행병처럼 번진 '유랑생활'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유행이다. 사람들은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일을 그만둔다. 문신을 하고, 모두가 세계화되고 있다. 아프리카 부족처럼 보이려고 피어싱을 한다. 어떤 여행자는 2천만 달러의 비용을 들여 우주공간으로 날아간다."
그는 사람들이 계속 유랑하다 보니 여기저기 도로가 깔리고 심지어는 "하늘은 좁아져 비행기 충돌이 일어날 지경"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것을 "아벨의 복수"로 설명합니다. 성경에 따르면, 농부인 카인이 목동인 동생 아벨의 머리를 돌로 쳐서 살해합니다. 이 사건은 농부(정착민)와 유목민 사이의 적대감을 뜻하며, 이후 세상은 카인으로 대표되는 농부의 시대로 전환하게 됩니다. 그런데 다시 현대로 와서는 쟁기가 다스리던 시대는 저물고, 이동과 여행으로 대표되는 목동의 시대가 열린 겁니다. 바로 아벨의 시대(복수)라는 것입니다.
이제 여행은 기쁨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설 연휴에 고향으로 가지 않고, 멀리 해외로 떠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굳이 고향이 아니더라도 가족끼리 즐겁게 보내면 그게 명절이고, 그곳이 해외면 더 기쁘고 즐거운 일이 되었습니다. 여행에서 겪는 고초도 이제는 즐거운 추억 중 하나가 된 듯합니다. 저를 포함해서 사람들이 여행을 이렇게 좋아하게 된 이유가 궁금해졌습니다.
김영하는 같은 책에서 "어둠이 빛의 부재라면, 여행은 일상의 부재다"고 말했습니다. "풀리지 않은 난제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 소란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홀로 고요하고 싶을 때, 예기치 못한 마주침과 깨달음이 절실하게 느껴질 때, 그리하여 매순간, 우리는 여행을 소망한다"고 여행의 이유를 말합니다. 귀찮고 복잡한 일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제 여행의 의도와 비슷해서 이 말이 반가웠습니다.
실뱅 테송은 여행의 이유를 "세상을 관조하고 세상이라는 잔으로 세상으로 마시고 그것을 마음껏 즐기기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괴테의 "여행을 할 때 나는 언제나 가능한 한, 모든 것을 낚아챈다"는 말을 인용하며 "여행은 여행자가 외부 세계에 감행하는 습격이며, 여행자는 언젠가 노획물을 잔뜩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약탈자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여행 약탈자! 참으로 멋진 말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여행들에서 무엇을 "약탈"해 왔는지요?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월간 옥이네에도 실렸습니다. 월간 옥이네는 자치와 자급, 생태를 기본 가치로 삼아 지역의 공동체와 문화, 역사, 사람을 담습니다. '정기 구독'으로 월간 옥이네를 응원해주세요! 구독문의 043-732-8116. https://goo.gl/WXgTF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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