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멍멍 러닝 크루 성장기 1

포토그래퍼 박동신

검토 완료

부산노동권익센터(bslabor)등록 2023.10.11 10:50
양솔규

겨우내 움츠린 몸을 이제는 일으켜 세울 때다. 봄이 왔음에 마음이 싱숭생숭, 두근두근 거린다. 지난 3월만 해도 기온이 오락가락하기도 하고, 꽃샘추위도 예고 없이 들이닥치더니, 4월에 들어서자 가로수에 새순이 돋아나면서 온 거리가 초록초록 하게 밝아지는 게 자연의 변화가 놀랍고 신기하기만 하다.
30분 남았다. 늦지 않게 서두른 탓에 목적지까지 제법 여유가 있지만 더욱 발걸음을 바짝 땡긴다. 챙겨가는 장비며 돗자리며 셋팅을 해 놓으려면 빨라서 나쁠 건 없다. 음료수는 녹산공단에서 퇴근해서 오는 영록이가 담당하기로 했다. 명지 울림공원 주차장에서 그 짐도 같이 날라야 한다. 주차장이 보인다. 늦을 수도 있다던 영록이 트렁크에서 짐을 꺼내고 있다. 이제 곧 크루멤버들이 도착할 시간이기에 랩으로 쌓여있는 이온음료 패키지를 풀고 에너지젤과 함께 잽싸게 노느매기 했다.
 
나는 '포토그래퍼'다. 직업으로서의 포토그래퍼는 아니고, 러닝크루(Running Crew)에서 정기런(정기모임)이 있을 때마다 회원들의 사진을 찍는다. 회원들은 나를 '찰칵이'라고 부른다. 대학 다닐 때 잠깐 사진강좌를 들은 적이 있고, 그 뒤 독학으로 공부하면서 출사를 나가기도 했었다. 보통 회원들이 달릴 때, 앞에서 정면 샷을 찍어야 하기 때문에 달리기 실력은 기본이다. 빠르게 달리다가 멈춰서 찍고, 다시 또 빠르게 달리다가 멈춰서 찍고 하면서, 강제적으로 '인터벌 훈련(interval training)'을 하게 된다. 그러면 다시 또 실력이 는다. 그래도 혼자 많은 회원들을 찍는 건 벅차기 때문에 영록이도 같이 역할을 맡았다. 속성으로 러닝크루에 맞는 간단한 촬영술을 가르쳐 주었는데, 눈썰미 있고, 눈치도 빠른 영록이는 카메라 다루는 법을 어렵지 않게 습득해 나갔다. 무엇보다 달리기 실력이 좋아 러닝크루의 포토그래퍼로서는 제격이다. 보조 포토가 필요하기도 했지만 제법 큰 키에 다부진 몸과 끈기, 책임감을 갖추고 있는 영록과 친해지고 싶었다. 내게 없는 여러 능력을 채울 수 없다면, 그런 능력을 가진 친구를 사귀면 된다. 나를 확장하는 방법이다. 지금 내가 사용하고 있는 카메라는 호프집 퇴직금으로 샀다. 손떨방(손떨림방지), 스위블 액정 기능까지, 가격은 있지만, 만족도가 높다. 그 전에 쓰던 카메라는 영록에게 넘겼다.
 
우리 러닝크루 이름은 "블루멍멍 crew"(약자 '멍멍이', '멍멍크루')이다. 1994년 갑술(甲戌)년에 태어난 개띠들, 이제 서른 살이 된 사람들이 회원 대상이다. 갑(甲)은 푸른색을 뜻하고, 술(戌)은 개를 뜻한다고 해서 갑=블루, 술=멍멍이로 풀어 작명한 것이다. 부산의 푸른 바다와도 어울리는 이름이어서 만족스럽다. 다른 유명한 크루들은 육상을 전문적으로 배운 코치들이 있어 업힐트레이닝에, 인터벌, 지속주, 변속주, LSD 등 여러 훈련을 체계적으로 하고,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많아 수준별로 조를 나누기도 하지만, 우리 '멍멍이'는 그럴만한 여력은 되지 않는다. 많으면 50명~100명에 달하는 다른 러닝크루에 비하면 30명 남짓으로 회원수도 많지 않고, '정기런'(러닝크루 정기모임. 보통 코스를 미리 공지하고 함께 뛰는 형식)에는 보통 10명에서 15명 내외가 참여한다. 그래도 3년 동안 열심히 달린 탓에 보다 체계적인 훈련이 점점 더 필요해지고 있다. 바야흐로 전환점이다.
 
2020년 1월 코로나19 첫 확진자가 나온 뒤 모든 게 달라졌다. 당시 서면의 호프집 홀 팀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몇 십명이던 확진자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변이가 계속 된다고 하고, 백신을 맞아도 다시 걸릴 수 있다고 하고, 예측도 안되고 기약도 없는 형벌이 이런 것인가 싶었다.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필수불가결하다 했지만, 나는 보호받지 못했다. 사회는 나를 '거리두기' 했다. 영업시간 제한 정책은 호프집에겐 영업정지 명령이나 다름 없었다. 한기가 들 정도로 한산하다가도 저녁 8시 이후로 갑자기 분주해지는 호프집 홀은 '아, 옛날이여'가 되었다. 중국집을 하다가 호프집으로 전업했던 사장님은 나에게 미안하다며 '좋은 날'이 오면 다시 '콜'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코로나19와 마찬가지로 기약 없는 헛약속인걸 그도 알고 나도 알고 있었다. 전해 들은 얘기로 결국 내가 일하던 호프집은 폐업하고 말았다. 코로나19 3년은 사람들의 음주문화도 바꾸었고, 단체손님도 찾기 어렵고, 혼술을 즐기는 문화 속에서 영업을 이어 나기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사장님보다 내 사정이 더 급했다. 밤낮이 바뀐 채로 몇 년을 일하면서 몸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취객들의 폭언도 참기 힘들었다. 반말은 기본이었고, 안주를 얼굴에 던지기도 했다. 진상 손님을 마주한 뒤에는 '오늘은 어떤 손님이 올까?' 출근하기가 두려웠다. 양복을 잘 차려 입은 사람이든, 허름한 작업복을 입은 사람이든 다르지 않았다.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기에 적당한 먹잇감을 발견했다는 듯이 '건수'를 찾아내고 쉴 틈 없이 퍼부어 댔다. 카드로 긁는 술값에는 당연하게도 이런 '손님'의 '권리'가 옵션으로 포함되어 있다는 듯이. 이참에 재충전하고 좀 더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는 기회로 삼자며,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위안했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못했나보다. 그날 이후로 마음은 가라앉았다. 점점 더 무기력해지고 사람들을 만나는 게 두려웠다. 그렇게 몇 달의 시간을 원룸 안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맥주캔은 쌓여만 갔고 컴퓨터 게임에 빠져 여전히 낮과 밤은 바뀌어 있었다. 그러나 우연히 보게 된 유튜브에서 '러닝'을 만났다. 학창시절에 제법 운동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고, 더 이상 이렇게 나를 방치할 수는 없었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알게 된 부산의 몇몇 크루 중에 마침 동갑내기들의 크루가 있었다. 다른 크루들 보다는 더 친밀감도 들었고, 그들의 행복해 보이는 얼굴에 궁금해졌다. 무엇이 그들을 미소 짓게 만드는지.
 
대학 졸업 후 많은 친구들이 자격증 준비와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떠나갔다. 부산을 떠나는 이유로 보통 좋은 일자리와, 문화적 인프라 등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실상은 다른 거 같다. 지방에서 올라간 애들한테는 좋은 일자리 기회는 돌아오지 않는다. 대신 술집, 커피숍, 영화관, 패스트푸드, 계약직, 비정규직 알바 일자리가 제공된다. 저임금에 학원비, 물가, 월세를 감당하면서, 일 년에 한 번도 영화관에 가본 적 없는 애들한테 '문화적 인프라'가 무슨 소용일까. 친구들은 경기도나, 인천에 숙소를 잡거나, 서울에 진입하더라도 찾아가보면 대학가 고시촌, 저지대 반지하, 산동네 옥탑방이다. 그런데도 해가 지날 때마다 점점 더 많이 떠나갔다. 나 역시 가끔 '서울로 가야되나?' 생각이 들기도 했다. 수도권으로 빨려 들어가는 또래들을 바라보며, 흡입구에서 남겨진 쭉정이가 되어버린 기분이 들 때면 마음 한구석에 구멍이 뚫린다. 이대로 바람이 불면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매주 화요일,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모여 뛰는 '멍멍이'들은 오늘은 갈맷길 5-1구간이기도 한 명지~신호대교 왕복 7.6km를 뛰기로 했다. 낙동강 하구와 맞닿는 서부산 바다가 자아내는 고요한 아취(雅趣)는 동부산 바다에선 볼 수 없는 매력이다. 지난주 황사와 미세먼지, 초미세먼지가 겹치면서 정기런을 건너뛴 관계로 2주 만에 보는 얼굴들이 반갑다.
 
근 30년을 알지 못한 채로 살아온 우리. 하나부터 열까지 나와는 다른 나영은 크루에서의 첫 만남 이후로 이리저리 살펴보고, 한 발짝 정도 다가와 보고 하다가, 부지불식간에 내 마음을 흠뻑 적시며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래도 내 앞으로 다가왔을 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강요하지 않으며 귀기울여 주었다. 언제나 난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다가도 타인의 적극성을 마주할 때면 두려워서 서서히 뒷걸음 치곤 했다. 완벽한 내 자신이 되어야 한다며 미흡한 내 자신에 주저하곤 했다. 그런 날 기다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이번에는 나영의 친밀한 다가섬에 똑같이 맞이하겠다고 다짐하며 양 장딴지근에 힘을 주었다. 이런 내 마음이 잘 전달되었는지 불안해 안절부절 하다가도 한번씩 적절한 타이밍에 긍정의 대꾸가 올 때면 쾌재의 미소가 떠올랐다. 강가 바람을 타고 환한 웃음을 날리며 나영이 다가오고 있다. 내 얼굴에도 웃음이 번진다. 발걸음은 빨라지는데 점점 가벼워지는 건 왜일까?
 
덧붙이는 글 부산노동권익센터가 올해 개최한 2023년 제1회 감정, 비정규노동자 수기 공모전에서 16편의 작품이 당선됐다. 이번에 실리는 글을 우수상을 받은 작품이다. 꽁트형식의 글이며, 실재하는 인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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