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개인화시대의 운동회

요즘 운동회는 이렇습디다.

검토 완료

이가은(panadoll)등록 2023.10.20 08:00
더위가 채 가시지 않았던 추석 연휴 전 학교에서 가정통신문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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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문턱입니다. 우리 아이들의 꿈이 가을과 함께 더욱 무르익기를 바라며, 가을 운동회에 교육공동체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날짜:  10월 00일 
시간:  오전 9시-3시
장소:  00초등학교 운동장

00초등학교장  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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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코로나 19로 인해 여러 교내행사들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었다. 운동회을 해도 아이들끼리만 진행되어서 부모들은 참관을 할 수가 없었다. 입학한지 6년 만에 최고 학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학부모가 참관할 수 있는 운동회가 열린다는 것이다. 난생 처음 학교 운동회라 어떻게 준비하고 어떻게 가야할지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가정통신문을 세세히 읽어보니 예전과는 다른 점이 눈에 띄었다.

1. 운동회때 아이들은 급식을 먹습니다.
프로그램에는 학년별로 아이들의 급식 먹는 시간이 표시되어 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엄마가 김밥 도시락과 간식을 싸오셔서 운동장 한켠에서 도시락을 먹었었는데 요즘 운동회는 그렇지가 않았다.
'아니 그럼 도시락을 싸가야하나? 점심은 어째야 하나?' 고민이 시작되었다. 일단 친한 엄마 한 명이랑 상황을 봐서 간단하게 먹기로 했다. 


2. 학년 별로 끝나는 시간이 다릅니다.
개회식은 모든 학년들이 모여서 하지만 1-2학년은 오전에 모든 경기가 종료된다. 폐회식때는 고학년들만 남아서 진행된다. 그도 그럴것이 아이들에게는 하교후의 스케줄이 있으니 말이다. 운동회 날이라고 해서 늦게 끝나면 아이들의 스케줄이 꼬이게 되니 아마 그런 것 같다.

와~~ 뭔가 예전과는 사뭇 다르다. 아이에게는 엄마가 참관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운동회인데, 뭐 일단 가보면 알게되겠지.


드디어 운동회 당일. 전날까지는 비가 와서 운동장이 젖어 있을 까봐 걱정했는데, 걱정이 무색할 지경으로 날씨가 좋았다.

 

윤동회 만국기 학교 운동장에 만국기가 걸려 있다 ⓒ 이가은


오랜만에 만국기가 걸려 있는 운동장을 보니 심장이 두근두근하다. 사람들이 많지 않을거라 예상했는데 웬걸 안내된 시간보다 늦게 갔더니 이미 천막아래 의자들은 만석이고, 돗자리 명당자리는 거의 차 있다. 아빠들도 꽤나 많이 참석했다. 엄마 아빠 할머니까지 가족이 총 출동한 집, 친한 엄마들 끼리 돗자리를 깔고 앉은 무리들 등등 예상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자리가 꽉 채워졌다. 그도 그럴것이 오랜만의 학교 행사 아닌가. 학교의 국룰 스탠드 등나무 그늘 뒷쪽 구석 빈자리에 겨우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학교 운동장 등나무그늘 운동회 명당자리 등나무 그늘 ⓒ 학교 등나무 그늘

   
단체로 무언가를 하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요즘 세대의 운동회는 이전과 비슷하면서도 뭔가 다르다. 청팀과 백팀으로 전 학년이 두 팀으로 나뉘는 것은 같다. 그렇지만 운동회를 진행하는 것은 학교 선생님이 아닌 레크리에이션 전문 진행자이다. 

그래서인지 프로그램들도 어릴적 경험한 운동회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예전에는 무용이나 매스게임 같은 것들을 구슬땀을 흘리며 연습해 운동회날 학부모님들 앞에게 선보이곤 했는데, 그런것들은 하나도 없다. 아이들이 어려움 없이 즐길 수 있는 단체 게임들이 학년별로 수준에 맞추어 순서대로 진행되었다.

 

청팀 백팀 큰공 굴리기 운동회 프로그램 큰공 굴리기 ⓒ 이가은

    중간중간 부모님들이나 조부모님들도 참석 할 수 있는 줄다리기나 큰 공 굴리기 같은 고전적인 순서들도 있었다. 특히 부모님들이 참석한 계주는 아이들의 계주와는 스피드가 달랐다. 비슷한 시기에 열렸던 아시안게임만큼이나 박진감이 넘쳤다. 그 순간 나는 투철한 기자정신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사진 찍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스마트폰을 보는 사람이 없었다. 근래에 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이었다.


 

운동회 배달음식 운동회에서 배달시킨 메뉴 ⓒ 이가은

 

오전 시간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급식을 먹으러 가고 다른 엄마와 함께 음식을 배달시켜 먹었다. 학교에서 안내한대로 먹고 나온 쓰레기는 다 챙겨서 집으로 가지고 와서 버렸다.
왜 예전처럼 부모님과 함께 식사를 안할까 생각해보니 부모님들이 참석하지 못한 아이들도 있을테니 평소대로 급식을 먹고, 식사시간을 따로 하는 것 같다. 선생님도 부모님을 찾아가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아이가 말했었다. 


점심을 먹고 오후 프로그램도 진행되었다. 오후 세 시까지 운동장에서 구경하는 것이 지겹지 않을까 읽을 책도 한 권 챙겼던 것이 무색할 지경으로 운동회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고학년 아이들의 릴레이 계주를 끝으로 모든 경기는 종료되었다.  10점 차이로 청팀의 승리로 끝났다. 폐회식을 하고, 교가를 부르고 드디어 운동회의 대단원의 막이 내렸다. 


오랜만에 구경한 운동회는 의외였다.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아이들이 몸을 움직이며 하는 단체 게임에 몰입하고 각자의 팀을 열띠게 응원하는 모습을 너무 오랜만에 보았기에 더욱 신기했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혼자서 스마트폰이나 게임을 하며 노는 시간이 더 익숙하다. 아이들이 단체로 친구들과 몸을 쓰는 게임을 하며 자신의 팀을 응원하는 경험을 아이는 많이 해 보지 못했다. 이런 아이들에게 운동회는 너무나도 색다른 경험이었을 것이다.

폐회식이 끝나고 아이가 마치기를 잠시 기다려 함께 하교를 했다.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입에 물고 집으로 돌아가며 아이에게 물었다.

"재미있었어?"
"응. 그런데 백팀이 져서 속상해. 우리 학년은 나가면 다 이겼는데, 다른 학년들이 빌런이였어(종알종알)."

아이는 자기 편이 졌다고 너무 속상해했다. 

"그래도 재미있긴 했어." 

아이들이 스마트 폰을 보지 않아도 하루를 이렇게 즐겁게 보내고 놀 수 있다는 경험을 해 본다는 것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나에게도 아이에게도 색다른 경험이었던 초등학교 운동회의 막이 내렸다. 아마도 당분간은 이런 경험을 또 하기 힘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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