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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불교탄압에 저항한 처능

[겨레의 인물 100선 31] 처능

등록 2023.12.01 07:23수정 2023.12.04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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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말]
명색이 민주공화제 정치에서도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면 '싹쓸이'가 자행되고, 전임 정권에 대한 보복성 감찰이 일상화되고 있는 데, 봉건왕조 시대의 상황은 어떠했겠는가.

여기서 긴 설명을 접어두고, 이성계의 왕조교체 이후 고려의 국교인 불교에 대한 탄압과 이에 저항한 대표적 불승에 관해 살펴본다.

조선왕조 500년은 한국 역사상 불교가 가장 심하게 탄압받은 시대였다. 조선조는 숭유척불정책에 따라 철저하게 배불책(排佛策)으로 일관하였다. 불법은 사태(沙汰)를 당하고 승려는 천대를 받았다. 법난이 계속되었으며 도성에서 쫓겨 신중불교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창업 이전부터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그는 태고(太古)·나옹(懶翁) 등 고승을 사사하고 특히 무학대사와 자초(自招) 대사와는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조선왕조 창업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위화도회군 때에는 승장인 신조(神照)의 도움을 입었고, 등극 후에는 무학을 왕사(王師)로 삼아 건국 사업을 지도받았다.

그럼에도 조선왕조는 척불책으로 일관하였다. 고려 말기 불교의 폐악이 극에 달해 이반된 민심을 새 왕조로 돌리기 위해 숭유척불책을 쓴 것이다. 특히 조선조의 이념적 기틀을 마련한 정도전과 같은 척불주의자의 역할이 크게 작용하였다. 숭유억불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3대 태종 때부터이며, 태종에 이어 세종 그리고 연산군 때 절정에 이르렀다.

태종은 즉위와 함께 과격한 척불책에 나서 '척불 7대책'을 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사원의 수를 줄이고 승려를 환속시킬 것 ②사원소유 토지를 국유로 몰수할 것 ③사원 노비를 거두어 군정(軍丁)에 충당할 것 ④도첩제(度牒制)를 엄하게 할 것 ⑤종파를 11종에서 7종으로 병합할 것 ⑥왕사-국사(國師)를 폐지할 것 ⑦능사(陵寺)의 제도를 폐지할 것 등이다.

태종의 뒤를 이어 등극한 세종은 흔히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꼽힌다. 그럼에도 불교에 대해서는 지독한 편견으로 가혹한 척불정책을 단행하였다.


세조는 단종을 폐위하고 수많은 총신을 죽이고 등극한 '업보'를 씻기 위해서였는지 불교에 비교적 관대하였다. 그러나 뒤를 이은 예종과 성종대에는 다시 척불책이 강화되었다. 이들은 새로 승려가 되는 것을 제도적으로 금지하고 기존 승려들에게도 환속하도록 강요하였다.

조선시대 가장 혹독한 불교 탄압을 한 임금은 연산군이다. 선·교 양종과 승과제도를 폐지하고, 사원이 소유하는 모든 농토를 몰수하였다. 삼각산에 있는 모든 사원에서 승려들을 몰아내고 원각사를 폐사(廢寺)한 자리에 기생들을 관장하는 장락원을 만들었다. 또 비구니들이 거처하는 절을 헐고 이들을 노비로 삼기도 했다.


연산군은 척불책뿐만 아니라 유교에 대해서도 탄압하였다. 성균관을 철폐하여 유연지로 만들고 여기에 모셨던 공자상을 고산암 태평관으로 옮겼다. 연산군의 폐악은 척불이나 척유라기보다는 폭군에 의한 광란의 행태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불교의 교맥이 단절되는 탄압을 받았음에도 국난이 닥치자 승려들은 호국전선에 앞장섰다. 임진왜란 때는 서산·사명·처영·전묵·영규 등 승려들이 일어나 왜적 격퇴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에 따라 선조는 서산대사를 제1대 도총섭, 사명대사를 제2대 도총섭에 임명할 정도로 불교지도자들의 공적을 높이 인정하였다. 정묘-병자호란 때에도 두청·각성·명조대사 등이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왜란과 호란이 끝난 뒤에도 정부의 척불책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조선 불교가 태조의 개국과 양대 병란을 이겨내는데 크게 기여했으면서도 배척을 당했지만 교단이나 승려들의 강력한 저항이 없었던 것은 기이한 현상이다.

승려들의 저항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전후 세 차례에 걸쳐 '저항'이 시도되었는데, 첫 번째는 태종 6년에 조계종 승려 성민(省敏)이 조정의 가혹한 불교 탄압정책의 시정을 촉구하였다. 성민은 조정이 사원의 토지와 노비를 삭감하자 수백 명의 승도들을 이끌고 궁궐에 가서 신문고를 쳐 임금에게 직접 호소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끝내 이를 들어 주지 않아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였다.

두 번째는 세종 원년에 승려 30여 명이 비밀리에 국경을 넘어 명나라로 가서 명제(明帝)에게 본국의 불교 탄압을 호소하여 국제적으로 문제가 되었다. 이들은 불심이 돈독한 명제를 찾아가 조선 조정이 불교 탄압을 중지하도록 조처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불교판 '황사영 백서' 사건이라 하겠다.

이 일로 명나라의 압력으로 약간의 완화 조처가 이루어졌다. 명제의 사신이 왔을 때는 그를 영접하는 의식에 왕이 군신 외에 승려들을 거느렸으며, 이때는 승려들도 말을 타도록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명나라에 대한 눈가림이고 일회용이었을 뿐이다.

세 번째는 세종 3년의 일이다. 묘향산의 승려 적휴(適休)가 도반 8명과 함께 명나라에 건너가 명제에게 고국의 척불 중지를 소청하였다. 두 번째와 비슷한 사건이었다.
앞의 세 사건이 국왕에게 호소하거나 외세를 이용하여 상황을 개선하려는 일종의 사대적 행동이었다면, 저술을 통해 이를 시정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기화(己和, 1376~1433)는 저서 <현정론(顯正論)>을 통해 불교의 우수성과 유교의 상통성을 동시에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는 불교 탄압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호불론'을 제기하는 수단이었다.

또 보우(普雨, ~1565)는 <일정론(一正論)>에서 불교와 유교를 하나로 조화시키는 '유불조화사상'을 제시하여 불교에 대한 이해를 넓히려 하였다. <일정론> 역시 척불에 저항하기보다는 불교 자구책의 일환이라 할 것이다.

이밖에 저자와 연대 미상의 저술 <유석질의론(儒釋質疑論)>이 나왔다. 이 책은 척불에 대한 반론서로서 불교와 유교, 도교가 서로 상통하여 일치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이런 주장 탓으로 저자가 이름을 밝히지 못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왕조의 혹독한 불교 탄압에 당당하게 저항한 이는 현종 때의 백곡(白谷) 처능(處能, 1617~1680)이다. 속성이 김씨인 처능은 15살에 출가하여 벽암 각성(覺性, 1575~1660)의 문하에서 법문을 익혔다. 64살로 입적할 때까지 그는 대둔산 안심사 등에서 기거하며 <대각등계집(大覺登階集)> 등의 저술을 남겼다. 그의 시와 문사가 유려하고 호방하여 당시 이름난 유학자들의 상찬(賞讚)을 받았으며, 효종은 세자로 있을 때 처능의 문덕이 높은 경지에 있음을 극찬하였다.

처능은 조정의 척불이 날로 더해 감을 지켜보면서 전국의 승려를 대표하여 현종에게 상소문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를 올렸다. 국가의 부당한 배불정책에 대해 대부분의 승려들이 저항할 기력을 상실한 채 참담한 현실을 묵수할 때 처능 만이 장장 9만 자에 달하는 '간소(諫疏)'를 통해 폐불론자들의 논거를 반박하고 척불정책의 부당함을 이론적으로 비판하였다. 그의 '간소'는 조선왕조 시대의 상소문 중 가장 긴 내용으로서 필력과 논리에서도 빠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척불정책 500년의 역사에서 불도의 저항다운 저항이었다. 이 '간소'가 현종에 의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조선 불교를 전폐시키려던 효종의 폐불책을 막을 수 있었다.
 
#겨레의인물10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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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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