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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기억돼야 할, 독립운동 이끈 안동의 쓸쓸한 혁명가들

[황광우의 역사산책25] 선비의 고장이자 항일의 고장, 안동

등록 2023.11.30 11:53수정 2023.11.30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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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시는 '선비의 마을'이다. 안동에 가면 퇴계 이황도 있고, 서애 유성룡도 있다. 안동은 '항일의 고장'이기도 하다. 안동에 가면 이육사도 있고, 권오설도 있다.

나는 안동과 여러모로 인연을 맺고 산다. 젊은 시절부터 형, 아우라고 호칭하며 지내온 문화재 수리 전문가가 있다. 이름은 허경도인데, 그는 나에게 고건축의 비밀을 열어준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이번 나의 발걸음을 안동으로 재촉한 이는 허경도가 아닌, 1980년 5월 20일 광주역의 심야 시위를 이끈 여성 차명숙이다. 전옥주와 차명숙은 조직도, 지도자도 없는 그야말로 외로운 민중의 싸움을 선두에 서서 이끈 오월의 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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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사적지 ⓒ 황광우

   
도착한 곳은 풍산장터였다. 1923년 11월 권오설과 그의 동무들은 이 장터에서 풍산소작인회를 묶어 세웠다. 딱 100년 전의 일이다. 소작인회의 창립 대회를 구경하기 위해 모여든 군중의 수가 자그만치 3000명이었다고 한다. 일경이 그렇게 추계했으니, 그 날 장터에 모여든 백의민족의 수는 1만여 명에 이르고도 남았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장터로 몰려갔을까? 선조들은 참 호기심이 많은 민족이었다. 제주도에 표류한 하멜의 푸른 눈을 구경하기 위해 장안의 여성들이 몰려들었다고 하지 않던가? 그날도 안동의 인민들은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을 '난리의 현장'을 구경하러 장터로 몰려갔을 것이다.

묶는다는 것은 조직한다는 것이다. 조직한다는 것은 작은 힘을 큰 힘으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이 힘을 어디에 쓸까?

작은 힘이 큰 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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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설 선생 ⓒ 안동대박물관 편 <근대 안동>

       
권오설과 그의 동무들은 이 힘을 모아 민족의 굴레를 벗어던지는 데 쓸 요량이었다. 그런데 하필 소작인의 힘을 모았던 것이냐? 땅 한 뙈기가 없어 남의 논을 빌어야 하는 소작인의 가슴 깊숙한 곳엔 해방을 향한 열정이 용암처럼 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권오설은 풍산소작인회를 결성하고 그 대표의 자격으로 서울에 갔다. 이번에는 조선노농총동맹을 묶어 세웠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인쇄직공조합을 묶어 세웠고, 양말직공, 고무직공, 양화직공의 파업을 이끌었다. 6.10만세운동 1년 전에 권오설이 벌인 활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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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태 표지석 ⓒ 황광우


점심은 풍산장터의 어느 허름한 식당에서 불고기로 맞춤했다. 늦가을의 햇볕이 따스하면서도 약간은 슬픈 기운이 감돌았다. 조금 걸으니 연못이 나왔고, 연못 건너편에 아담한 정자가 서 있었다. 연못이 있는 이곳 정원을 체화당이라고 부르고, 연못 건너편 정자를 담락재라고 부른다. 담락재(湛樂齋)의 현판은 김홍도의 작품이란다. 연못에는 바람에 휩쓸린 잎새들이 부초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조선공산당 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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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태 선생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는 이준태 선생의 생가터를 방문하였다. 생가터에 들어서니 저기 어디에선가 곧 선생이 나타날 것만 같았다. 옥중에서도 그물뜨기만 했지 말이 없던 분이었다. 함께 온 동료가 나에게 물었다.

"이준태 선생이 누구시죠?"

"조선공산당을 창당한 분이세요. 책에서는 조선공산당하면 파쟁이 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어느 나라에서나 혁명가들이 분파를 만들어 자신의 주장을 앞세웠던 것은 보편적인 현상이었습니다.

프랑스혁명에선 지롱드 당과 자코뱅 당이 싸웠고, 러시아혁명에선 볼셰비키당과 멘셰비키당이 싸웠습니다. 조선공산당 창립 과정에선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가 서로 다투었습니다. '이르쿠츠크파' 낯선 이름이지요. 그냥 김재봉, 이준태, 권오설로 대표되는 안동 청년 그룹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들이 조선공산당 1차당과 2차당을 이끌었어요."
  
해는 기울면서 뜨락에 잔광을 흐트러뜨리고 있었다. 이준태의 호는 일봉(一烽)이었다. 한번 타올라 광야를 불태워버리겠다는 호기였을 것이다. 선생은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1926년 검거됐고, 1935년 출옥했다. 감옥에서 나온 이후에는 이곳 풍산장터에서 가게를 차려놓고 노후를 지냈다. 가끔 찾아오는 김재봉 선생과 수담을 나누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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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봉 선생 ⓒ 안동대박물관

  
1950년 북으로 가던 길에서 자취가 사라졌다는데, 이준태 선생은 박헌영에게 대선배 격의 인물이었으니 만일 북에 도착했더라면 이름이 남았을 터이나, 유족들은 행방을 모른다. 지금은 선생의 손자 이헌붕씨가 조님의 흔적을 돌보고 있다. 우리는 이 쓸쓸한 혁명가의 비석 앞에 국화꽃 한 송이를 바쳤다.  

차는 다시 청음 김상헌의 고택으로 가고 있었다. '병자호란을 대표하는 인물, 주전파의 김상헌.' 교과서에서 배웠던 김상헌의 생가터가 이곳에 있었다니. 과연 그의 고택 현판에는 청원루(淸遠樓)라고 쓰여 있었다.

"청나라를 멀리하겠다"는 그의 결기는 과연 슬기로운 것이었을까? 마당에는 돌 비석이 서 있었다. 익히 들은 시조 한 수가 우리를 맞이하였다.

"가노라 삼각산아/다시 보자 한강수야/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시절이 하 수상하여 올동말동 하리라."

김상헌의 고택이 있는 마을의 뒷동산에 권오설의 묘가 있었다. 권오설에게는 동생 오직이 있었다. 권오직도 유명한 독립운동가였다. 해방 후 북한에서 주중대사를 역임했으나, 박헌영과 함께 숙청됐다.

또 한 명의 동생 오기가 있었다. 권오기의 아들 권대용씨는 철관 속에 묻혀 있는 권오설의 무덤을 파서, 철관은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보내고, 철관이 없는 새 무덤을 만들었다. 권오설이 쓴 자작시 한 편이 묘 옆 오석(烏石, 규산이 풍부한 유리질의 화산암)에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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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설 오석 ⓒ 황광우

  
우리는
서로 갈리어 딴판을 벌리지 말지어다.
서로 얼근거리어 남 보듯 하지 말지어다.
서로 멀그머니 보아 눈살 찌푸리지 말지어다.
갈리면,
얼근거리면
업퍼진다.
잡바진다.
고만이다.
오직, 우리는,
서로 손목을 꽉 잡고 한 곳으로 한 길로 같이 나아갈지며,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한뜻으로 한 일로
늘 힘쓸지며,
서로 언제든지 함께하여, 모지고 굳세인
뭉테기를 이룰지어다.
이리하여야,
일어난다.
살지로다.
오래도록.

- <권오설 2>, 49쪽, 푸른역사
* 얼근거리다: 떨어지다

안동 거리의 명가, '행복한 집'에 당도한 것은 해가 질 무렵이었다. 주인장 차명숙씨는 흑산도 홍어를 잡아다 경상도 분들에게 전라도 홍어 맛을 전파하고 있다. 차명숙씨는 지금도 활동 중이다. 지난 40여 년 전 공수들의 폭력을 당하고도 자신의 아픔을 말하지 못하고 사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었다.

밤은 묵계종택에서 보내기로 했다. 밤하늘의 달은 청아했다. 우리는 모닥불을 피우고, 묵혀온 옛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풍산장터 #권오설 #이준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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