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 마무리는 아픔과 슬픔을 말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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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민(amelie2023)등록 2024.01.02 08:00

매주 화요일, 아이들 하교 시간이면 우리 집 거실에서 두 개의 수업이 동시에 열린다. 내 친구는 나의 아홉 살 큰 아이에게 뜨개질을 가르치고, 나는 친구의 아홉 살 딸아이와 나의 작은 아이에게 한글을 가르친다. 한 쪽에서 칠판에 쓰인 ‘가나다라’를 소리 내어 읽으며 익히는 동안 한 쪽에서는 우리의 목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 뜨개질 수업이 한창이다. 일종의 공동 육아인 셈이다. 수업이 끝나면 나와 친구는 밑반찬을 나누고, 폭풍 수다를 떨다 저녁 준비할 시간이 다가오면 눈썹을 휘날리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아이는 파란색 털실로 목도리를 짜서 담임 선생님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드렸다. ⓒ 김보민

 

“난 한국인 입양아야.”

지난 1월 아이들 학교에서 열린 다문화의 날(Multicultural Day)에서 아이들과 한국 부스를 차렸다. 나 말고 또 다른 가족이 한국 부스를 차리고 있어 다가가 인사를 했다. 아이의 엄마는 한국인을 연상케 하는 외모를 가진 아시아인이지만 영어 발음이 영락없는 현지인이라 미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 생각했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서로의 이름과 아이들의 이름, 학년 등을 소개하던 중 그녀는 자신을 한국인 입양아라 했다. 미국에 한국인 입양아가 많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었고, 당황하지는 않았지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생각할 찰나는 필요했다. 친구는 환한 웃음으로 상대방의 기분까지 좋아지게 만드는 사람이었고, 그녀의 밝고 적극적인 화법에 끌려 우린 곧 자주 만나 서로를 보여주는 사이가 되었다.    

그녀는 여덟 살이 되던 해 미국에 입양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입양 부모가 이혼을 했고, 새엄마를 맞이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는 경제적으로 부모에게서 독립했고,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며 산다. 그녀의 지금 모습을 보면 아이를 키우는 여느 엄마와 다른 게 없다. 아이들 뒤치다꺼리에 정신 없이 바쁘고, 고단해하면서도 아이들 키우는 맛에 행복감도 맛본다. 

한해 가까이 친구와 자주 왕래하며 서로의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되었다. 이야기가 깊어지면 내가 이해하려 애써도 닿기 어렵고, 어떨 때에는 이해하기조차 어려운 그녀의 어린 시절, 미국으로 입양을 와서 겪었던 이야기, 입양 부모가 이혼을 하고 새엄마를 만난 이야기가 이어진다. 

내가 겪지 않은 일이라도 그녀의 이야기에 내 마음을 포개는 일은 어렵지 않다. 보스턴 로건 공항에서 처음으로 입양 부모를 만나 태극기를 흔들며 ‘태극기가 바람에 흔들립니다’를 부르던 여덟 살 아이의 모습을 담은 영상을 보면서 마음 한쪽이 저릿해지지 않을 사람이 또 있을까.

그녀의 입양과 방황, 친모와의 만남과 몸과 마음이 혼란스러워 고통스러웠다는 그녀의 과거사를 아무리 들어도 지겹지가 않다.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녀가 왜 살림살이를 쟁이고 사는지 이해할 수 없다. (입양 엄마의 알코올 중독으로 그녀는 필요한 돌봄을 받지 못했고, 열세 살이 될 때까지 제대로 옷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고 했다)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면 내 친구가 아이들의 대학 자금을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입양 부모의 경제적 도움이 늘 빠듯해 고등학생때부터 아주 열심히 일을 했다고 했다) 그리고 엄마가 세 명이고, 영어를 배우느라 힘들었다는 것도, 한국어를 모두 잊어 안타깝다는 것도 계속 들어도 지겹지 않다.

아니, 내 친구는 그녀의 이야기를 계속해야 한다. 우리는 어떠한 슬픔, 어떠한 공포, 어떠한 충격을 떨치고 일어날 수 없다. 이건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고, 우리 마음대로 할 수도 없는 일이다. 다만 그러한 슬픔과 공포, 충격을 마음 한구석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먼지가 쌓일 만하면 다시 끄집어내 그 먼지를 털어내듯 말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하루 삼시 세끼 밥을 먹고, 주변 사람들을 마음으로 보듬고, 남들 눈에 평안하고 별일 없는 평안한 일상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을 친구를 통해 느낀다. 
 

지난 땡스기빙 연휴에 친구네와 캠핑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좋은 시간이었다. ⓒ 김보민

 

우리의 슬픔과 고통과 아픔은 끊임없이 이야기되어야 한다.

생각에 여기에 이르니 우리 엄마의 상황 역시 다를 바 없다 싶다. 엄마는 쉰둘이 되던 봄에 교통사고로 장애를 얻은 막내아들을 병실에서 돌봐야 했다. 쉰둘이라는 나이를 다시 돌아본다. 아이들이 대부분 학교를 다니거나 독립을 하려던 때, 어쩌면 인제야 한숨 돌리고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거라 기대하던 때였을 것이다. 그리 젊진 않지만 그리 늙지 않은 나이라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롭고 자유로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좋은 나이에 엄마는 몇 해를 병실에서 보냈다. 본인의 몸이 아파 병원 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거동이 불편한 부모를 돌본 게 아니라 걸을 수도 일어설 수도 앉을 수도 없는 자식을 돌보았다. 그렇게 몸과 마음을 갈아 넣어 아이를 일으켜 세웠고, 병원 밖을 나서게 만들었다. 속절없이 흐른 시간은 엄마는 일흔을 내다보고 있다.

막내아들이 뭐라도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도 잠시, 그 아들이 본인이 얻은 장애로 고통받는 모습을, 그 모습을 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좌절감에 빠진 자신을 바라봐야 했다. 그 사이 아무에게도 말 할 수 없는 엄마라는 이름이 가질 수 밖에 없다는 죄책감이 눈덩이처럼 커졌다. 

어느 날 그런 엄마의 죄책감에 대해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눈 밤이 있었다. 죄책감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그 죄책감이 없다면 엄마는 후련할지, 그 죄책감을 없애고 싶은지 물어봤다.
죄책감 또한 나야. 지금 그 죄책감이 없다면 그건 내가 아닌 거지.

그러고는 이런 이야기는 아들에게 사고가 있고 처음으로 나눈다며 말하고 나니 마음 한구석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어떤 이들은 아픔과 눈물은 하루빨리 잊어 버리고, 하루라도 빨리 일상을 다시 찾고, 부정적인 감정은 감추고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고들 한다. 하지만 우리는 장맛비에 논둑이 넘쳐 오르듯, 하천의 보가 터지듯 솟구쳐 오르는 슬픔이나 아픔은 아무리 감추려 애써도 감출 수가 없다.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한다고 감출 수 있는 감정도 아니다. 손끝에서, 눈썹 끝에서 그 슬픔과 아픔은 아우성친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슬픔과 아픔을 시나브로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해야 한다. 거기서부터 치유는 시작되고, 새로운 시작도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과거를 모두 없는 셈 치고 살 수 없다. 과거에 대한 기억을 지운다고 지워지지 않는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가장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지워지지 않고 잊으려 애쓰면 더 강렬하게 떠오르는 기억이 아닐까. 이 기억을 우리의 뇌 속에서 지우고 없앤다고 몸과 마음이 모두 없는 셈 치고 살 수 있을까. 살 수 없다. 

누군가의 슬픔과 아픔과 고통을 경청하는 연말이기를...

한 해가 저문다. 한 해 동안 아쉬운 점, 다짐했으나 이루지 못한 점을 돌아보거나, 해내서 기쁜 일들, 성공한 경험을 떠올리곤 한다. 그리고 다가오는 새해의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할 일을 정리해 본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도 혹시 눈물샘을 자극하는 혹은 마음속에서 벅차오르는 슬픔, 절망, 혹은 아픔이 있다면 두서가 없더라도, 지나치게 자주 언급하는 것 같더라도 이야기하자.

이태원 참사를 이야기하고, 세월호를 이야기하고, 518 민주 항쟁을 이야기하고, 김용균 군을 이야기하고, 구의역 사고를 이야기하고, 교단에서 청춘을 잃은 선생님들을 이야기하자. 제각각 가진 슬픔과 고통의 순간을 이야기하고, 이야기하면서 나아가고, 나아가다 엎어지면 그 자리에서 다시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그 힘으로 다시 나아가자.

혹여나 누가 왜 자꾸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냐고 신경질을 내면, 이렇게 말하자. 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는 지금의 나를 이야기할 방법이 없다고, 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는 지금을 살아낼 수가 없고 앞으로의 나를 상상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자.

우리의 슬픔과 고통과 아픔은 끊임없이 이야기되어야 하고, 그리고 우리는 계속해서 들어야 한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브런치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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