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만족말살정책에 대항한 용감한 두 학생, 김수환과 김재순

105주년 3?1절을 맞는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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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서광(skh5612)등록 2024.02.16 10:30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던가. 이름난 사람들의 어린 시절은 남달랐던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떡잎'이 비록 '될성부른 나무'의 충분조건은 아닐지언정 적어도 필요조건임에는 틀림없다. 우연은 필연의 가면일 뿐인지도 모른다. 떡잎이 튼실하게 커가는 모습은 때론 경외심마저 느끼게 한다. 특히 역사적 비운의 시기에 여린 떡잎의 몸으로 몰아치는 비바람에 맞서 대항하며 마침내 거목으로 성장한 모습은 두고두고 회자될 수밖에 없다.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일제는 우리 민족에 대한 말살정책을 본격화했다. '내선일체(內鮮一體)'로 가장한 황국신민화정책을 실시해 천황에 충성할 것을 강제했다. 소위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라는 구호를 만들어 항상 제창하게 하고 궁성요배(宮城遙拜)라는 명목으로 아침마다 천황이 사는 궁을 향해 절하게 했다. 또한 부분적으로 실시하던 조선어 교육을 1938년 4월 전면 폐지하고 일본어 상용(常用)을 강요했다. 심지어 '상용카드'를 발급해 초등학생들의 조선어 사용까지 금지했다. 전쟁이 궁지에 몰리자 이번에는 '창씨개명'을 단행해 횡포를 더해갔다. 약 80%의 조선인이 이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필자는 1927년생인 장인의 초등학교 성적표(당시 '통지표')를 본 적이 있다. 1937년도 성적표 표지1면에는 학교명, 학년‧성명이, 내지2면에는 출석일수와 학업성적이 기재돼 있다. 교과목으로는 수신(修身)‧국어(일본어)‧조선어‧산술 등이 열거돼 있다. 반면에 1941년도 성적표 표지1면에는 '황국신민서사'가 새로 등장하고 '창씨개명'한 이름(鳥山〇〇)으로 기재돼 있다. 또 내지2면의 교과목에는 조선어가 빠져 있다〈사진 참조〉. 이 성적표는 민족말살정책의 축소판이자 그 만행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생생한 증거다. 더욱 가관인 것은 표지4면이다. 두 성적표 모두 성적과 전혀 관계없는 일본의 축일(祝日)‧대제일(大祭日)‧기념일 날짜를 표기한 점이다.
 
아예 민족혼의 싹을 잘라버리겠다는 심산이었을까. 말살정책은 교육현장에서 기승을 부렸다. 엄혹한 현실은 학생들도 피해갈 수 없는 폭풍우 같았다. 감수성이 예민한 학창시절 조금이라도 일제를 경험한 사람은 결코 그 잔학성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역사책을 통해서만 배운 필자 같은 사람은 감히 헤아린다고 말하기조차 힘든 그들의 아픔은 그대로 집단 트라우마(trauma)가 돼버렸다. 군사강국으로 치닫는 일본의 욱일기(旭日旗)를 볼 때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단다.
 
105주년 3‧1절이 보름 남짓 앞으로 다가왔다. 100년이 넘는 세월의 퇴적은 대체 무엇을 남겼을까. 최근 한 작가는 작금의 우리 현실을 걱정하는 가운데 '기대어 따를 곳 없이 천박해진 사회의식'을 지적했다. 광기 어린 말살정책의 와중에 경성과 평양에서 각각 학생 시절을 보냈던 김수환(金壽煥, 1922~2009) 추기경과 김재순(金在淳, 1923~2016; 실제 출생년도 1926년) 전 국회의장의 증언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민족의식과 기개를 타산지석으로 삼고 싶다.
 
김수환은 대구 성유스티노신학교 예비과를 졸업하고 1935년 경성 동성상업학교(현 서울 동성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이 학교는 당시 두 조로 편성돼 있었다. 갑조(甲組)는 일반 상업학교였고 을조(乙組)는 김수환과 같은 신학생들이 다니는 소신학교(小神學校)였다.
 
갑조와 을조 학생들 사이의 교류는 거의 없었지만 갑조 선생들은 두 조를 오가며 가르쳤던 것 같다. 그 선생들은 신부들과 달리 을조 수업에 들어와 3‧1 운동과 일제의 만행 등에 대해 자주 얘기해줬다고 한다. 커다란 용기가 아닐 수 없다. 그 때는 일제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이었다. 일례로 중동학교 교사로 재직(1933~1942)하던 시인 김광섭(金珖燮, 1905~1977)은 강의 내용 문제로 1941년 2월 일경에 체포돼 3년8개월이나 복역했다.
 
김수환은 갑조 선생들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 같이 울분이 치밀고 마음도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정체성은 신학생이 아니라 나라를 빼앗겨 신음하는 백성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였다고 한다. 마음속에서는 이미 독립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고 마침내 그 전쟁은 밖으로까지 비화됐다.

1940년 5학년 졸업반 때의 일이다. 지금의 윤리 과목에 해당하는 수신 시험 시간이었다. 그는 당연히 수업 시간에 배운 현대 철학 사조에 관한 것이 출제될 줄 알았다. 어처구니없게도 "조선 반도의 청소년 학도에게 보내는 천황의 칙유(勅諭)를 받은 황국신민으로서 그 소감을 쓰라"는 문제가 나왔다. 황국신민화정책을 강화하기 위한 조선총독부의 지침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민족적 자존심과 젊은 혈기의 반항심이 불끈 치솟았다고 한다. 한 시간 동안 꼼짝 않고 있다가 종료 종이 울리기 직전 답안지에 이름을 적고 공난에 "① 나는 황국신민이 아님 ② 따라서 소감이 없음"이라고 써서 제출했다. 그 때가 어떤 시절인가. 용기는커녕 차라리 만용에 가깝다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김수환 자신도 "지금 생각해 봐도 그 어린 나이에 뭘 믿고 그런 배짱을 부렸는지 모르겠다"고 회고했다.

이튿날 교장실에서 호출명령이 떨어졌다. 신학생을 담당하는 신부 교장이 아니라 평신도 교장 의 호출이었다.
 
"이거 네가 쓴 것 맞아?"
"네."
"어쩌려고 이런 답안을 쓰냐. 이게 밖에 알려지면 학교는 그날로 문 닫아야 하고 너는 감옥에 가고 교회는 또 박해를 받는다는 걸 모르냐? 엄청난 일이 일어나는 거야."
"그럼 그 답지를 밖으로 내보이지 않으면 되잖습니까."
"이 녀석이, 어른 말 안 듣고 어디서 말대꾸야!"
 
즉석에서 김수환은 따귀를 한대 얻어맞았다. 잔뜩 화난 표정의 교장은 "너는 위험해서 신부가 되면 안 되겠다"고 덧붙였다. 그 교장은 제2대(1950~1952)‧제7대(1960~1961) 국무총리와 제4대(1956~1960) 부통령을 역임한 장면(張勉, 1899~1966)이었다고 한다.
 
훗날 김수환은 장면이 비록 손찌검은 했지만 속으로는 자신을 '괜찮은 녀석'으로 여겼다고 생각했다. 장면이 자신에 대해 교구 주교에게 좋게 얘기해줘서 일본 조치대학(上智大学, Sophia University) 유학이 성사됐다고 추정한 것이다. 김수환다운 호의와 반전이 아닐 수 없다.
 
한편 김재순은 1940년 평양 종로보통학교를 졸업했다. 6년 내내 한 번도 1등을 놓치지 않아 평안남도 대표로 일본 이세신궁(伊勢神宮) 견학을 다녀온 일도 있다. 동기동창으로 음악을 좋아하고 하모니카 두 개를 아래위로 불던 작곡가 길옥윤(吉屋潤, 1927~1995)을 추억했다. 본명이 최치정(崔致禎)인 그는 김재순 때문에 1등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고 늘 투덜거렸단다.

졸업하던 해 평양공립상업학교에 입학했다. 조선어 과목이 폐지된 여파인지 일본인 교사만 있었다. 학생은 조선인과 일본인이 대략 5대5 정도였다고 기억했다. 자신감이 충만해 공부든 운동이든 일본인에게만큼은 지면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비록 나라는 뺏겼지만 민족은 먹히지 않았다는 것을 실력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김재순은 김소월(金素月, 1902~1934)의 시 〈초혼(招魂)〉을 좋아했다. 마지막 구절인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를 '사랑하는 내 조국이여'로 바꿔 자주 낭송했다고 한다. 또한 산정현교회를 다니면서 익힌 애국가를 친구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스코틀랜드 가곡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에 맞춰 불렀던 곡이다. 당시는 애국가를 부르면 큰일 나던 시절이었다. 산정현교회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향년 46세로 순교한 목사 주기철(朱基徹, 1897~1944)이 이끌고 있었다. 과연 그 목사에 그 신도였다.
 
1940년 1학년 어느 날 250명 정도 되는 전교생이 1933년 개관한 평양부립박물관을 견학했다. 그 박물관은 당시 을밀대 부근에 자리하고 있었다. 고구려가 쌓은 평양성은 4개의 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을밀대는 고구려왕의 궁궐이 있던 내성(內城) 북쪽 장대(將臺)에 세운 누각이다. 자연히 운치가 대단한 박물관일 수밖에 없었다.
 
견학 후 아라키 고지로(荒木孝次郞) 교장은 학생들을 강당에 모아놓고 김재순을 지목해 소감을 물었다. "아, 슬프도다. 흥했던 고구려는 황폐해지고, 남은 것은 기왓장과 부러진 화살촉뿐이구나"라고 답했다. 소감은 간 곳 없고 일순간 가슴속에 맺힌 한의 응어리가 자기도 모르게 시구(詩句)가 돼 흘러나온 것이다. 말문이 막혀 어안이 벙벙해진 교장은 "그만해"라고 버럭 고함만 질렀을 뿐이다.
 
김재순은 이 일로 교장에게 미움을 샀고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돼버렸다. 그 대신 전교생에게 이름이 알려졌다. 선배들은 그를 볼 때마다 '재순아, 공부 잘 하거라'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후일 북한에서 주체사상 이론을 정립하고 김일성종합대학 총장까지 지낸 황장엽(黃長燁, 1923~2010)도 그 중 한 명이었다고 회상했다. 그 사건을 계기로 3년 선배인 황장엽과 가까운 사이가 된 것이다.
 
5학년이던 1944년 12월8일의 일이다. 매달 8일에는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왕의 선전포고문을 교장이 전교생 앞에서 낭독하는 기념식이 있었다. 친구 하나가 그만 방귀를 뀌고 말았다. 김재순이 웃었더니 식이 끝나고 교장이 달려와 다짜고짜 발길질을 퍼부었다. 그것도 모자라 교장실에 불려가 새끼로 마룻바닥을 닦는 벌까지 받았다. 그 이후 어이없게도 요주의 인물이 돼 1945년 2월에는 헌병대에 끌려가 목검으로 피멍이 들도록 맞았다고 한다. 가택수색에서 나온 책들을 문제 삼은 것이다.
 
해방 직후 학생들이 악명 높던 아라키 교장에게 몰려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재순도 교장실로 달려갔다. 교장을 보고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을 보자 갑자기 연민이 생겼다고 한다. 그때 한 친구가 교장에게 주먹질을 하려는 것이 보였다. 순간 김재순이 소리쳤다. "그만하지 못해! 교장을 때리려면 해방 전에 때렸어야지. 비겁하게 이게 뭐하는 짓이야! 아무리 못된 선생이라도 한 자라도 배웠으면 선생이야."
 
김재순다운 용서와 반전이 함축된 명장면이다. 감동의 눈물이 절로 흘러나온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18:21-22). 김재순이 믿는 예수의 말씀이다. 현명한 자는 용서하되 잊지는 않는다.
 
사방이 꽉 막힌 섬나라 안에 갇혀 늘 답답한 민족. 끊임없이 반복되는 지진으로 항상 불안한 민족. 그래서일까. 수많은 전쟁을 도발하여 영토 확장과 대륙 진출을 꾀한 민족. 그러면서도 사죄는커녕 버젓이 전범이 합사(合祀)된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를 꼬박꼬박 참배하는 위정자들. 역사를 왜곡하고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며 위안부를 부정하는 위정자들. ‧‧‧‧‧‧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할까. 3‧1절을 앞에 두고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볼 일이다.
 
 
 
참고문헌
 
김수환 추기경 구술‧평화신문 엮음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2004
김재순‧안병훈 〈어느 노 정객과의 시간여행〉 2016
강만길 〈고쳐 쓴 한국현대사〉 2006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덧붙이는 글 파일로 첨부한 통지표를 꼭 넣어 주시고
김수환과 김재순의 사진(어릴 적 사진이 있으면 더 좋고요)
평양부립박물관 사진을 넣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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