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대보름에 관한 다섯 가지 소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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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혜은(redeun7)등록 2024.02.22 08:54
보름달 그리고 빵
초등학교 때 내 별명은 '보름달'이었다. 어찌나 얼굴이 복스럽고 빵빵했는지…. 30대까지도 달덩이 사이즈는 외모의 핸디캡이었지만, 40대가 되니 '동안'이라며 별스럽게 장점이 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보름달' 하면 떠오르는 친구가 있다. 죽마고우이자 금붙이를 좋아하는 골드미스 유희다. 초등학교 때부터 '유똥'이라 불린 그 친구는 1년에 서너 번은 평택에 놀러 온다. 어린 시절 유똥은 나름 부르주아로, 2층 양옥집에 사는 슈퍼집 딸이었다. 유똥 집에 놀러 가면 나는 으레껏 "보름달빵 하나만 갖다주라"고 애원했다. 동그랗고 촉촉한 카스테라 속 새하얀 크림은 정말이지 환상 궁합이다. 빵과 빵 사이 그 달콤한 블랙홀에 혀를 담고 있노라면 모든 시름이 다 녹는 듯했다.
하지만 짜장면집 아들은 짜장면을 싫어한다고 했던가. 슈퍼집 유똥도 과자나 군것질을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행동도 굼떠 나의 간곡한 부탁을 매우 귀찮아했다. 그래도 두 번에 한 번은 공짜 빵을 먹는 호사를 누렸으니, 지금 우리집에 와도 설거지 한 번 안 하는 유똥을 미워하지는 말자.
 
쥐불놀이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 댁에서 지냈다. 고산 윤선도가 전주 현감을 지낸 선조 할아버지에게 권했다는 그 터에서 대대로 13대째 살았다. 북풍을 막아주는 대나무숲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어, 서걱이는 댓잎과 올빼미 소리를 들으며 잠들곤 했기에 지금도 꿈에 나올 정도로 정겨운 장소다.
특히, 너른 마당에서 돌리던 쥐불 깡통 맛은 잊을 수 없다. 정월대보름이 다가오면 남동생과 나는 동네 쓰레기장을 뒤져 가장 깨끗한 분유 깡통을 찾았다. 그리고 망치로 못을 내리쳐 밑바닥에 구멍을 낸 후, 옆면에 철사 끈을 달아매면 쥐불놀이통이 완성된다. 부엌 아궁이에서 눈물콧물 흘리며 군불을 피워 잘 익은 숯을 골라내 그 통에 신문지와 함께 넣고 돌리면 벌건 불이 쉭쉭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그 기세에 멈칫하다가 머리 위로 숯이 떨어져 머리카락이 홀라당 타버린 적도 있었다.
그래도 나는 양반이다. 남동생의 쥐불놀이통은 대나무숲 속에 던져져 평화롭던 시골 마을에 119 소방차가 출동한 적도 있고, 들판에 나가 돌리다 다른 집 딸기밭 비닐하우스를 태워 변상한 적도 있었다.
 
나물비빔밥
정월대보름 날 밤은 동네 아이들의 쥐불놀이 쇼가 장관을 이룬다. 다들 공터에 모여 한바탕 불놀이를 끝내면 골목대장 오빠가 깡통을 두드리며 온 동네 집들을 방문한다. 그러면 어르신들이 대문 앞까지 나와 찰밥과 나물을 챙겨 주었다. 서양에 할로윈 사탕패가 있다면, 내가 살던 고향에는 정월대보름 쥐불패가 있던 셈이다.
그렇게 얻어 온 나물과 밥은 공터에 대기 중인 동네 언니들에게 넘겨진다. 큰 대야에 한데 담은 후, 참기름과 고추장을 팍팍 넣고 비비면 둘러선 아이들 입에서는 꼴딱꼴딱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언니들은 어린아이 순으로 비빔밥을 나눠 주었고, 다들 흙바닥에 궁둥이를 붙이고 보름달을 조명 삼아 정신 없이 먹어댔다.
한 번은 어디선가 방귀 냄새가 난 적이 있었다. 범인을 찾을 길 없는 무소음 방귀에 기분이 몹시 상해 다 먹지 못하고 남긴 게 두고두고 아쉬웠던 기억이 난다.
 
도둑놈 순경 찾기
배도 채웠겠다, 이제 놀이 시간이다. 골목대장 오빠 둘이 가위바위보를 해서 도둑놈 팀과 순경 팀으로 패를 나눈다. 순경 팀이 숫자 100까지 큰 소리로 천천히 세는 동안, 도둑놈들은 삼삼오오 몸을 숨긴다. 하나의 룰이 있다면, 집으로 들어가 숨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으슥한 밤이라 도둑놈 팀의 어린아이들은 듬직한 오빠와 언니들을 따라나선다. 어떤 때는 들판 한가운데 볏단 뒤로, 또 어떤 때는 과수원길 바위 너머로 숨었다. 제일 무서웠던 장소는 마을회관 변소와 도랑물이 흐르는 하수구관 안이었다. 파란종이 빨간종이를 든 귀신이 나올 것도 같고, 찍찍 생쥐가 내 다리를 타고 올라올 것도 같아 숨죽여 울기도 했다. 그럴 때면 속으로 하나님, 부처님, 알라신에게 순경들이 빨리 찾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래도 찾지 못하면 순경들이 '못 찾겠다 꾀꼬리'를 외치고 한판 게임은 끝난다.
나중에 변소와 하수구관 안에 숨게 한 오빠와 또 팀이 되자, 나는 비빔밥을 많이 먹어 배가 아프다고 하고는 집으로 돌아와 명절 특선 프로그램을 보았다.
 
보름달 그리고 2024년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리다 보니 내 마음도 덩달아 달뜬다. 곧 있으면 정월대보름이다. 아줌마가 된 나에게 정월대보름은 찰밥과 나물 반찬을 하는 날이다. 사실, 안 해도 되는데 시부모님이 꼭 정우한테 전화해 찰밥에 나물을 먹었냐고 물어보시기 때문이다. 올해는 그 덕에 동네 친구들을 떠올리며 나물비빔밥을 먹을 수 있으니 감사한 일이다.
정월 밤이라 해도 이제는 달보다는 TV를 보며 시간을 보낸다. 아파트에 살면서 달이 떴는지, 비가 오는지, 계절이 가는지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이번 대보름에는 밖에 나가 둥근 달이라도 봐볼까. 바로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한 주 날씨를 검색해 본다. 흐림이다. 그냥 집에 있을까…. 이놈의 디지털 세상은 아날로그 감성을 확 집어치우게 만든다. 부러 모른 척 불편하게 사는 것이 행복임을 되새기며, 오늘도 더 움직이고 더 아끼고 더 사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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