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검성은 낙랑군이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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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훈(bbondd)등록 2024.03.14 15:24

1. 서
『사기』와 『한서』에 의하면 왕검성과 낙랑군의 위치는 다르다. 『한서』 「지리지」의 주석자들은 왕검성에 요동군을 설치했다고 한다. 즉 예맥조선이 망한 후 왕검성은 요동군 검독현이 되었다. 그러나 일제·강단유사사학은 왕검성에 낙랑군이 설치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합리적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고 그냥 우긴다. 최초로 사료적 근거를 제시하려고 시도한 이가 서영수이다. 그러나 서영수의 글엔 전혀 논리가 없어, 그의 글은 그냥 우기는 것과 거의 차이가 없다. 본고는 왕검성과 낙랑군의 위치가 명백히 다름을 논증하고, 서영수 글의 유사사학성을 제시한다. 낙랑군 평양설이 왕검성 낙랑군설에 근거하고 있어, 왕검성 낙랑군설이 무너지면 낙랑군 평양설도 당연히 근거를 상실한다.
2. 왕검성과 낙랑군은 다른 곳
漢은 요동고새를 수리하고 패수를 예맥조선과의 경계로 하였다. 위만은 요동고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동쪽 예맥조선으로 들어갔다. 섭하도 비왕장을 죽이고 패수를 건너 요새 안으로 들어갔다. 즉 요동고새 너머 패수가 있고 패수 건너에 왕검성이 있다. 그런데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낙랑군에는 요동고새가 있다.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도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다고 한다. 『상서』에 의하면, 갈석산은 황하 어귀의 서쪽에 있는 산이다. 『사기』도 황하 가에 갈석산이 있다고 하며 연 지역이 발해와 갈석 사이라 한다. 『기주협우갈석도』도 황하 어귀에 갈석산이 있다고 한다. 서기전 시기에는 발해가 태행산맥 쪽으로 들어와 있었고 황하도 보정시쪽을 지나 발해로 빠져나갔다. 즉 서기 전에는 보정시에 황하에서부터 태행산맥까지의 짧은 거리만 요새를 쌓으면 북방을 방어할 수 있었다. 이 요새가 요동고새이고, 그 북쪽 영정하가 패수였을 것이다. 따라서 패수 동쪽에 있는 왕검성과 요동고새가 있는 낙랑군이 같은 위치일 수는 없다.
秦도 회수와 사수의 조선인들을 이주시켰는데 이러한 이주정책은 토착세력을 약화시켜 점령지를 실효지배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漢의 입장에선 골머리를 썩혔던 예맥조선에 대해서도 이주정책을 실시하는 것이 당연하였다. 왕검성 주민들을 요동고새 내부로 이주시켜 낙랑군을 설치하였다고 보는 것이 사료에도 부합하고 당시 상황에서의 개연성도 매우 크다.
낙랑군에도 패수가 있는데 이는 왕검성의 패수와는 다른 강이다. 당시 사람들은 거주지 주변에 흐르는 강을 패수라 하였으므로 낙랑군으로 이주된 사람들은 낙랑군으로 흐르는 강을 패수라 하였을 것이다.
3. 왕검성과 검독현에 관한 사료
왕검성과 검독현에 관한 사료는 다음과 같다.
① 『한서』 「지리지」 요동군 검독현 주석
險瀆, 應劭曰 :「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曰險瀆.」 臣瓚曰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 師古曰 :「瓚說是也. 浿音普大反.」 [응소는, "조선왕(朝鮮王) 만(滿)의 도읍이다. 물이 험하게 흐르므로 험독(險瀆)이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신찬은, "왕검성(王險城)은 낙랑군(樂浪郡) 패수(浿水) 동쪽에 있다. 이곳은 그냥 원래 검독(險瀆)이다."라고 하였다. 안사고는, "신찬의 설이 맞다. 패(浿)는 음이 보(普)와 대(大)의 반절이다."라고 하였다.]
② 『사기』 「조선열전」 都王險 주석
都王險。【集解】 徐廣曰:「昌黎有險瀆縣也」 【索隱】 韋昭云「古邑名」 徐廣曰「昌黎有險瀆縣」 應劭注「地理志遼東險瀆縣,朝鮮王舊都」 臣瓚云「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也.
[【集解】 서광(徐廣)은 "창려(昌黎)에 검독현(險瀆縣)이 있다."라고 하였다. 【索隱】 위소(韋昭)는 "옛 읍의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서광(徐廣)은 "창려(昌黎)에 검독현(險瀆縣)이 있다."라고 하였다. 응소는 『한서』 「지리지」 요동군 검독현이 조선왕의 옛 도읍이라고 주석하였다. 신찬은 "왕검성(王險城)은 낙랑군(樂浪郡) 패수(浿水) 동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한서』 「지리지」 요동군 검독현 지명에 대해, 후한말 사람인 응소는 물이 급하게 흘러서 지명이 험독이 되었다고 하는데, 서진 사람인 신찬은 검독현이라는 명칭이 강이 흐르는 양태와는 무관하다고 말한다. 7세기에 활동한 안사고는 신찬의 견해에 동의하고 있다. 그런데 셋 모두 요동군 검독현이 왕검성 자리라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유사사학은 『한서』 「지리지」 요동군 검독현에 대한 신찬의 견해를 근거로 예맥조선이 망할 때의 왕검성에 낙랑군이 설치되었다고 주장한다. 서영수도 신찬의 견해를 근거로 왕검성에 낙랑군이 설치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유사사학의 주장은 사료 날조하기에 불과하다. 신찬과 안사고가 응소에 반대한 것은 검독현의 지명 유래에 대한 것이다. 만약 신찬과 안사고가 왕검성이 요동군에 있지 않고 낙랑군에 있었다고 생각했다면 왕검성은 패수 동쪽 낙랑군에 있었다라고 명확히 말해야 한다. 요동군 검독현 주석에서 낙랑군 패수 동쪽에 왕검성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낙랑군과 왕검성의 위치관계를 명확히 하는 것 즉 낙랑군 패수 동쪽의 요동군 검독현에 왕검성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에 불과하며 왕검성 자리가 요동군 검독현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유사사학은 이러한 명백한 사실을 사기치기 위해 오역이라는 사기 수단을 사용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는 신찬의 견해를 "왕검성(王險城)이 낙랑군(樂浪郡) 패수(浿水) 동쪽에 있으니, 이는 자연히 검독(險瀆)이 된다."라고 번역한다. 전혀 말이 되지 않게 번역을 하며 원문을 무시한다. 패수 동쪽에 있으니 검독이 된다는 그들의 심오한 사고를 그 누가 이해할 수 있겠으며 원문 어디에 이런 말이 있는가? 사기 치기 위해서는 대중이 진실을 보지 못해야 하므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여 사실을 모호하게 하려 한다. 그들의 행태는 조선총독부 교시에 대한 그들의 무한한 충성을 전제하지 않으면 결코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4. 서영수의 궤변
이상으로 왕검성 낙랑군설의 무근거성은 논증되었다. 그러나 강단유사사학의 유사사학성을 감상하기 위해 아래의 논의를 지속한다. 서영수의 글은 궤변의 연속이다. 서영수의 핵심 논지는 다음과 같다.
즉, 『史記索隱』에 인용된 응소의 주는 三國時代 吳나라 사람 韋昭의 말을 인용한 것인데 비하여, 『한서』 지리지에 인용된 응소의 주는 보다 늦은 唐代의 顏師古에 의한 것이다. 안사고의 「漢書叙例」에 의하면 "漢書는 후인이 습독하는 과정에서 임의로 고치거나, 전사하는 과정에서 달라진 곳이 많이 생겼다"고 한다. 이로 보아 안사고가 본 『한서』보다는 위소가 본 『한서』가 원형에 가까울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나 문헌의 성립연대로 보거나 응소의 요동군 험독현에 대한 주석은 위소가 인용한 "조선왕의 옛 도읍이다"라는 것이 본래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응소는 요동군 험독을 '조선왕의 舊都'로, 낙랑군 조선현을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도읍으로 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였던 사람들이 '舊都'를 '滿都'로 고친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된다. 즉, 응소가 살았던 後漢代까지는 요동군의 險讀이 '고조선의 옛 도읍'이라는 전승이 남아 있었는데, 南北朝시대를 거치면서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였던 후인들에 의해 『한서」 지리지에 인용된 응소의 주석 '舊都'가 '滿都'로 고쳐지고, 唐代의 안사고가 본 것은 후대에 개작된 기록이라는 점이다.
서영수는 『사기색은』 응소의 주가 위소의 말을 인용한 것이라 주장한다. 그는 아마도 '韋昭云'의 '云'에 응소가 주석한 내용까지가 포함된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는 그의 독단에 불과하다. 『사기색은』은 위소 서광 응소 신찬의 견해를 병렬로 나열하고 있다. 서광과 응소의 견해가 위소가 말한 것이라는 것은 원문 어디에도 없고, 서영수 외 다른 누구도 그렇게 이해하지 않고 있다. 서영수가 학자라면, 근거를 제시하면서 서광과 응소가 말한 내용은 위소의 말을 인용한 것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억지를 쓰기 위해 아무렇게나 말하는 것이 유사사학의 중요한 특징이다.
서영수는 응소의 주석이 위소가 말한 것이라고 날조한 후, 『사기색은』에 나오는 응소의 舊都가 맞고, 『한서』 주석에 나오는 응소의 滿都는 舊都가 변조된 표현이라 주장한다. 이는 전혀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사기색은』의 저자인 사마정보다 『한서』를 주석한 안사고가 100년이나 이른 시기의 사람이며, 안사고도 당대의 대학자이다. 서영수의 말은 날조를 위한 억지에 불과하다. 안사고가 서영수의 소리를 들었다면 서영수를 견자라고 욕하였을지도 모른다. 설사 서영수의 주장을 인정해도 변하는 것은 없다. '조선왕의 옛 도읍'이라는 말과 '조선왕 만의 도읍'이라는 말은 동일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서영수와 강단유사사학만 두 표현을 다르게 볼 것이다. '조선왕의 옛 도읍'이라는 말은 타국을 더 존중하는 의미가 있음에 불과하다.
서영수는 같은 말을 다르다고 한 후 요동군 검독현은 조선의 구도로서 요동에 있었고, 예맥조선 멸망 시의 왕검성엔 낙랑군이 설치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강단유사사학이 사기칠 때 항상 하는 표현인 '전승'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요동군의 險讀이 '고조선의 옛 도읍'이라는 전승이 남아 있었는데,"라고 한다. 사기꾼들은 항상 말이 막히면 이동설을 들먹인다. 전승과 이동은 강단유사사학이 사기칠 때 사용하는 전가의 보도이다. 서영수는 궤변을 연속으로 늘어놓은 다음, 갑자기 궤변의 결정판인 "응소는 요동군 험독을 '조선왕의 舊都'로, 낙랑군 조선현을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도읍으로 본 것이다."라고 뜬금없는 소리를 한다. 그가 가진 위대한 고도의 논리적 기법만이 이러한 결론을 도출할 것이다. 필자와 같은 범인은 그가 어떤 논리적 과정을 거쳐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였는지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강단유사사학의 위대성을 다시 한 번 체감하는 순간이다. 응소는 지하에서 미치고 환장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억지를 써도 낙랑군이 원래의 燕나라와 漢나라 영토인 요동고새 남쪽에 설치되었으므로 궤변은 어떤 효과도 발휘할 수 없다. 물론 그들의 조선총독부 소설에 대한 끝없는 충성심을 입증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5. 결론
『한서』의 주석자들이 모두 왕검성은 요동군이라 말하고 있다. 『사기』와 『한서』 등 객관적 사료에 의하면 왕검성과 낙랑군은 동일한 위치일 수가 없다. 강단유사사학은 이러한 명백한 증거가 있어도 조선총독부의 교시와 어긋나면 무시하고 억지로 일관한다. 그들이 그들 주장의 유사사학성을 포장하는 실증이란 말은 억지의 다른 말에 불과하다.
필자는 『한상고사』에서 漢의 요동군과 낙랑군의 위치를 논증하였다. 본고의 목적은 강단유사사학 주장의 유사사학성을 밝히는 것이므로, 여기에선 간단히 『한상고사』의 논증 결과와 『한서』 주석자들이 말하는 위치만 제시하여 결론에 가름하고자 한다.
요동고새는 보정시에 있는 장성이다. 보정시의 장성이 진나라 만리장성 동단의 기점이다. 연나라는 연소왕 때 진번조선을 물리치고 북경까지 북진하여 요동고새 북쪽에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의 5군을 설치하였다. 연나라는 상곡군의 조양에서 요동군 양평까지 요새를 쌓으려 하였고, 진나라는 이를 보완하여 요동외요라 하였다. 요동고새와 요동외요 사이가 상하장이다. 漢은 요동고새를 수리하고 패수(영정하)를 경계로 예맥조선과 접하였다. 漢은 요동외요까지 실효지배하기 어려워 패수 북쪽의 요서군과 요동군은 각각 중역수 상류와 하류로 이동시켰다. 패수 북쪽과 요동외요 사이를 진고공지라 하였는데 여기에 위만이 정착하였다. 漢이 예맥조선을 정벌하고 조백하 부근까지 진출한 후에는 조백하 서쪽은 요서군, 조백하 동쪽은 요동군이고 북경 부근은 현도군이 되었다.
왕검성은 조백하의 동쪽에 있었지만, 조백하 서쪽에 있는 왕검성 맞은편도 왕검성이라 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서광이 창려에 검독현이 있다고 한 것은 요서군 교려현(창려현) 자리에 있었던 조백하 서쪽 검독(왕검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검독현의 현은 잘못 추가된 글자로 추측된다. 『한서』 「지리지」가 검독현은 요동군 소속임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응소가 요동군 검독현이 왕검성이 있었던 곳이라 하는 것은 조백하 동쪽의 왕검성을 의미한다. 전한 말 혼란기 이후 후한은 다시 패수로 후퇴하여 요동군 요서군 현도군은 남쪽으로 이동한다. 신찬이 말하는 낙랑군 패수의 동쪽 검독현은 요동군의 남하 이후의 상황이다. 따라서 이 때의 검독현은 왕검성 자리가 아니다.
조선총독부 사기꾼들과 강단유사사학은 漢나라가 북쪽이고 예맥조선은 남쪽이라 한다. 서영수도 漢에 망하는 예맥조선의 왕검성은 진고공지 이남에 있는 것이므로 현재의 평양임이 확실하다고 하여, 漢나라가 북쪽이고 예맥조선은 남쪽이라 한다. 그러나 이는 완전한 거짓말이다. 위만은 요동고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동쪽으로 도주하였으며, 진한 교체기에 예맥조선에 중국인 망명자들이 모여들자 준왕은 이들을 서부에 살게 하였으며, 위만도 서쪽에 거주하게 해주면 서쪽을 지키는 번병이 되겠다고 하였다. 예맥조선이 한반도 내라면 서쪽을 지킨다는 것은 바다를 지킨다는 말밖에는 되지 않는다. 『사기』 「흉노열전」은 서기전 200년 경 흉노의 상황에 대해 "모든 좌방의 왕과 장수는 동쪽에 위치하여 상곡을 지난 동쪽을 맡아 예맥조선에 접했다"라고 한다. 흉노의 동쪽이 예맥조선이므로, 漢이 북쪽에서 예맥조선과 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말도 안 되는 위치 구조에서 도출된 왕검성의 위치가 타당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모든 객관적 사료를 무시하고 낙랑군을 평양에 집어넣기 위해 온갖 억지를 부리는 강단은 이미 유사사학을 초월하였다. 그들은 조선총독부 소설 추종자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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