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가 되고 싶어요

이번 생에는 안되겠어.

검토 완료

신효주(okspice1)등록 2024.03.20 14:56
공주가 되고 싶어요.
 
화근은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주말마다 열리는 마켓에 들렀을 뿐인데 하필 어린이 패션쇼가 열리는 날이었다. 귀여운 태국 꼬마들이 진한 화장을 하고 화려한 크리스마스 코스프레를 하고 당당히 워킹을 하는 모습에 그만 늘늘이가 푹 빠져버린 것이다. 나나까지 덩달아 패션쇼 참가자 어린이들에게 눈을 떼지 못하더니 둘 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1열 관람을 마쳤다. 돌아오는 길 늘늘이가 꺼낸 첫마디.
 
"나도 공주님 할래. 태국 공주님."
 
태국에 여행을 오기 전에도 종종 뾰족구두를 신고 싶다거나 톡톡 화장하고 싶다거나 드레스를 입고 싶다고 말한 적은 있었다. 지나가는 말처럼 가볍게 해서 나 역시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하지만 태국에서는 조금 달랐다. 늘늘이의 로망이 현실화되어 눈앞에 나타나니 욕망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매일 같이 태국 공주님 타령을 해댔다.
 
여행 오기 전 아이들과 할 수 있는 것들을 인터넷에서 함께 찾을 때 봤던 것 중 하나는 태국 전통의상을 입고 기념사진을 찍는 것이었는데 이게 아이들 눈에는 공주님으로 보였나 보다. 우리 돈으로 3만 원. 태국 물가를 생각하면 저렴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진을 찍고 보정하는 노동을 생각한다면 비싼 가격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의상대여에 메이크업과 헤어까지 포함된 가격이므로. 고민하다가 예약했다. 네 살밖에 안 된 아이들에게 이런 메이크업이 과한가 싶다가도 장난감 한번 사달라고 조르는 법이 없는 늘늘이의 욕망을 채워주고 싶다는 엄마의 마음이 앞섰다.
 
사진을 찍기로 한 날. 설레어서 낮잠도 거른 늘늘이는 거의 내 손을 잡아끌다시피 하며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직원이 먼저 건네준 샘플 사진을 보던 늘늘이는 확고하게 핑크를 골랐다. 내 눈에는 조금 촌스러워 보여서 금색이나 빨강을 추천했는데도 늘늘이는 오로지 핑크! 비로소 핑크색 레이스 천을 몸 위에 두르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늘늘이 만큼 공주에 진심이 아닌 나나는 엄마가 고른 금색과 빨강을 입었다. 어찌 됐든 아이들이 좋아하자 나도 좋았다. 엄마란 아이의 즐거움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는 존재구나! 새삼 느꼈다. 3만 원 곱하기 두 명, 6만 원의 가성비는 거대했다.
 
한국에 돌아온 후 인스타그램을 하던 어느 날 알고리즘 때문인지 '우리 아이 공주 되는 법' 이라는 게시물이 떴다. 한국에도 없을 리가 없지 하며 무심코 게시물을 넘겨보다가 깜짝 놀랐다. 놀이공원 드레스 대여점에서 진행하는 공주 프로그램은 태국 스튜디오 공주와는 차원이 달랐다. 레이스 천을 아무렇게나 둘러서 드레스를 만들지도 않았고 어른과 함께 사용하는 큐빅 빠진 액세서리도 없었다. 시설도 월등했지만 진짜 차이는 비용이었다. 20만 원부터 시작되는 참가비는 그마저 드레스 라벨, 메이크업 디테일, 액세서리 추가 여부에 따라 55만 원까지 가격이 올랐다. 화려해질수록 비용이 올라가는 것이다. 맙소사. 공주에도 등급이 있다니. 이 프로그램의 참가자들은 놀이공원의 퍼레이드에도 참여할 수 있는데 맨 마지막에 서서 퍼레이드에 참여하는 것은 무료이지만 퍼레이드 카에 탑승하거나 앞 열에서 퍼레이드에 참여하고 싶다면 추가 비용을 내야 한다. 세부적으로 등급을 나누고 그에 따라 가격을 매긴 것이 지나쳐 보였다. 돈이 없으면 공주도 불가이지만 돈이 있어도 얼마나 낼 수 있느냐에 따라 어떤 공주가 될 수 있는지도 정할 수 있는 것이다. 놀이공원은 원래 꿈과 환상의 나라 아니었던가. 후덜덜한 가격에 부들부들 떨며 늘늘이가 놀이공원 공주는 영원히 모르길 바랐다.
 
워낙 부담되는 비용인지라 부모들도 아이 생일 같은 날에 큰맘 먹고 선물로 해주는 모양인데 만족도는 높았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즐거워하는 아이의 모습만으로도 행복했으리라. 화려한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서서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모습이 어찌 귀엽지 않을 수 있을까. 아이 자존감이 높아지는 것 같다며 n차 구매한 부모들도 있었다. 예약 현황을 보니 방학은 대부분 마감이고 주말도 몇 자리 빼고 거의 마감일 정도로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불편했다. 욕망의 철저한 자본주의화. 과거의 공주가 왕자의 구출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존재였다면 현재의 공주는 돈! 아마 자본 없이는 그릴 수 없을 것이다. 공주가 되고 싶은 아이를 위해 해주어야 하는 것이 돈이라는 사실이 화가 나면서도 슬펐다.
 
레이스 원피스를 입고 어린이집에 가고 싶다는 늘늘이는, 소파에서 점프하기와 자전거 타기를 좋아한다. 잠자기 전 몇 번이고 구르기를 하며 '엄마, 나 요가 구르기 잘하지?'라며 묻는다. 워낙 뛰어노는 걸 좋아하는 아이라 오른쪽 이마에 멍든 혹이 사라질 즈음에는 왼쪽 이마에 혹을 달고 온다. 레이스 원피스를 입어도 놀다가 불편하다며 벗어버리는 아이라 내 눈에는 뻔하지만 늘늘이도 어떤 공주가 될지 스스로 깨닫고 결정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공주되기의 거대한 장벽에 부딪혀 실망하지도 모를 일이다.
 
늘늘아, 미리 말할게. 놀이공원 공주는 이번 생엔 아니야.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