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길이 만나보지 않고도 알아본 천재, 김종영

'예술가와-농부; 김종영의 조각과 글 part 2, 희대의 천재, 그의 속마음과 무수한 소묘들'(2023.11.17.-2024.3.24.)에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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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서광(skh5612)등록 2024.03.29 10:56
"상설관(常設館)에서의 소규모 전시였지만 뒤울림[殘響]이 오래 남는 전시회."
 
지난 24일 막을 내린 김종영미술관의 '예술가와-농부'에 다녀온 한 줄 소감이다. '한국 현대조각의 이정표'로 자리매김 되는 김종영(金鍾瑛, 1915~1982)은 1960년대 후반 경 「예술가와 농부」라는 아주 짤막한 글을 남겼다. 전시회 타이틀(title)은 거기서 유래한 것이다. 그 글은 한편으로 김종영의 탐구 역정과 조형의 근거를 살펴보고 또 이를 주위에 알리고 싶은 마음의 계기가 됐다.
 
글의 내용은 이렇다. 부지런히 일하고 정직한 것은 예술가와 농부의 미덕이고 그들의 수확은 인간에게 삶의 기쁨과 희망을 갖게 한다. 하지만 우리들은 수확한 열매만 맛보면 그만이고 그들의 말은 굳이 들으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조형언어인 작품에만 관심을 두지 말고 작가의 말도 경청해 달라는 약간의 투정 섞인 주문 같다. 혹은 작가의 의도와 무관한, 작품에 대한 자의적(恣意的)인 해석에만 급급한 세태를 꼬집은 것일 수도 있다. 전시회 타이틀을 빌어 말하면 예술가의 속마음도 알아달라는 것이다. 마치 드라마와 흡사한 연보(年譜) 중심의 일화(逸話)들만으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한 천재의 생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도법자연(道法自然, 『도덕경』 제25장)이라고 했다. 길은 자연에 있었다. 김종영은 '영원한 스승'인 대자연의 질서를 본받아 조각가로서 자신의 길을 가고자 했다. 예술을 '자연의 법칙을 통해서 나타나는 개성'이라고 생각한 그는 자연을 열심히 관찰했다. 1958년1월8일 작 드로잉(drawing) 왼쪽 귀퉁이에 그는 이례적으로 메모(memo)를 해 두었다. 한겨울 잎이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드러낸 나무를 펜으로 그린 것이다.
 
"수목(樹木)은 인체혈관의 분포상태를 연상시킨다. 인체의 입체적 구조를 이해하는데 있어 공간에서 자유롭게 뻗은 수목을 면밀히 관찰할 필요가 있다. 양자는 결국 생명체로서 형태와 구성에서 많은 공통성을 갖는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지들이 제멋대로 각각의 공간을 설정하면서도 질서를 갖추고 있는 생명체로서의 겨울 수목. 그는 거기서 인체혈관의 분포를 연상하게 됐고 마침내 인체의 입체적 구조를 꿰뚫어 봤다. '겉모습'[形]인 형태와 '본바탕'[體]인 구성은 구조의 원리였다.
 
통찰, 그리고 초월
 
통찰은 김종영 예술의 일관된 목표였다.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환히 꿰뚫어 보는 것이다. 통찰(pațivedha)은 원래 인도불교에서 교학으로 무장된 사람이 도를 닦은 후에 들어가는 구경(究竟)의 지혜(paññā)를 말한다. 이런 높은 경지를 목표로 삼은 것이다. 예술가에게 '일종의 금욕적 수행'까지 요구한 김종영을 '양괴(量塊, 흙덩이)에서 생명을 찾는 미의 수도자'라고 부르는 것은 괜한 허언이 아니었다. 제자인 최종태(崔鍾泰) 서울대 명예교수는 '꿰뚫음'을 스승의 조형이념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인생이 되었건 자연이 되었건 김종영은 그 모든 것을 꿰뚫어 보려고 했다.
 
지식과 지혜는 인간에 대한 통찰에서 비롯됐다.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 본 고대 그리스인과 인체의 생리를 음양오행의 질서 속에서 파악한 고대 중국인이 그랬다. 김종영이 꿰뚫어 본 인체 역시 시간과 공간이 갖는 인간의 정서와 대자연의 질서를 다 지닌 소우주였다.
 
십자가야말로 이런 요소를 가장 상징적으로 표시한다고 생각했다. 하지(下肢)의 수직선은 지면의 수평선과 대조되어 높이에서 느끼는 공간적 효과를 갖고 상지(上肢)의 수평선은 넓이에서 느끼는 시간적 효과를 갖는다. 이는 동시에 형이상(形而上)의 천상과 형이하(形而下)의 지상을 의미한다고 했다. 1950년대에 그린 것으로 추정하는 십자가상 <무제>는 이를 잘 보여준다.
 
육체를 '예술가의 재보(財寶)'라고 한 김종영은 인체에서 광의(廣義)의 표정도 읽어냈다. 표정은 외부 자극에 대한 생명의 반사작용이다. 하지에서 의지를, 상지에서는 감정을 봤고 여기에 머리의 지혜까지 더해 일본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가 처음 소개한 이른바 지(知)‧정(情)‧의(意)를 간파한 것이다. 지체(肢體)의 아름다움만 부각된 고대 그리스 조각에서 '지'의 상징인 눈의 표현에도 방점을 찍었다. 그는 마침내 표정을 신체의 에너지이자 영혼의 발로라고 규정했다.
 
통찰을 담아두는 그릇으로서 김종영은 데생(dessin)을 중시했다. 그래서인지 3000여 점에 달하는 대량의 드로잉을 남겼다. 작품에 데생이 없는 것은 생명 없는 박제표본 같다고 했다. 그에게 데생은 단순한 '소묘'가 아니라 작품 이전에 진행되는 정신적 과정 전체의 요약이었다. 소위 데생의 철학적 해석이다. 데생을 '느낄 수 있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에서 눈으로 보이지 않는 철벽을 뚫는 작업'이라고 정의한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가 김종영에게 시사하는 바는 컸다. 정신적 과정이란 곧 철벽을 뚫는 작업을 의미했다.
 
통찰에 기반한 일종의 초월적 행동을 김종영은 예술창작이라고 정의했다. '예술은 사랑의 가공(加工)'이라는 그의 말대로 그 초월은 피초월체에 대한 기피나 부정이 아니라 통찰에 의한 깊은 이해와 사랑의 노력이어야만 했다. 성실한 노력이 동반되지 않는 초월은 관념에 그치는 허구일 뿐이라고 경계했다. 예술의 역사에는 허다한 초월이 있었다. 그러나 '탄소가 굳어서 다이아몬드가 되는 것' 같은 진정한 초월은 아주 드물다고 평가했다.

창작에서 전통의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다. 그는 전통도 초월로 해석했다. 전통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는 뜻이 내포돼 있다는 것이다. 이런 남다른 해석은 영국 시인 T. S.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 1888~1965)에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전통에는 역사적 감각이 포함돼 있고 이 감각은 시간적인 것, 초시간적(超時間的)인 것, 또 양자의 결합에 대한 감각이라고 말했다. 김종영이 중시한 창작의 '시대성'과 '사회성', '보편성'과 '영원성'도 단절이 아닌 초시간적 전통에서 담보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또 "몸 밖에 아무 것도 없다"는 '신외무물(身外無物)'이란 말이 전통에 많은 암시를 준다고 했다. 전통도 결국 외부가 아닌 자신의 내부 문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추상의 길에서 만난 불각의 미
 
심상(心相)을 개념화하는 추상(抽象)은 시공을 초월한 인간 본연의 조형의지(造形意志)다. 김종영은 인간 본래의 욕구에 근거한 하나의 정신적 현실이라고 했다. 더욱이 통찰이 예술의 목표인 이상 '상을 뽑아낸다'는 추상의 길은 필연적 귀결일 수밖에 없었다. 형태를 재현하는 구상(具象)으로는 통찰의 풍부한 정신적 내용을 함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불순(不純)이 없으면서도 종합과 전체가 있다고 믿었던 자연에서도 김종영은 한계를 느꼈다. 각자의 기능과 목적을 위해 종합된 자연의 전체성은 결국 개체적 존재를 보여주는 데 불과하다는 깨달음에 이른 것이다.
 
추상의 길에서 두 사람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영국 비평가 허버트 리드(Herbert Read, 1893~1968)와 미국 철학자 수전 K. 랭어 여사(Mrs. Susanne Langer, 1895~1985)다. 리드는 "예술은 리얼리티(reality)와는 다른 무엇을 창조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확인하는 행위"라며 사실주의의 부적절을 지적했다. 그는 김종영이 입상한 1953년 3월 런던 테이트 갤러리의 국제공모전 '무명 정치수를 위한 기념비'(이하 '국제공모전')를 주관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한걸음 더 나아가 랭어 여사는 "우리는 이해하는 사실을 지각하는 것이고 지각작용은 항상 추상화(抽象化)를 수반한다"라며 추상의 필요불가결성을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추상이 대세인 국제공모전 이후 인체에 한정된 조각의 모티프(motif)에 회의를 느낀 김종영은 그 길에 들어섰다. 1953년 12월 제2회 국전(國展)에 출품한 '새'는 그 출발이었다. 그는 조각을 인체로부터 해방시킨 것이라고 했다. 동경미술학교 선배인 김복진(金復鎭, 1901~1940)을 위시해 로댕(Auguste Rodin, 1840~1917) 일색이었던 당시의 근대조각 문맥에서 벗어나려는 의식의 구현이었다.
 
추상은 일상에서 경험하는 감동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었다. 나아가 개체적 한계를 초월한 개체와 개체의 관계, 개체의 기능을 벗어난 광범위한 질서를 설정할 수도 있었다. "한정된 공간에 무한의 질서를 설정한다"는 김종영의 예술관을 실천할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특히 정신의 포용성과 감각적 경험이 확대된 현대과학 시대에 추상은 '지성의 명령'이라고 치부할 정도였다. "지성은 그 성격에 무한의 계산이란 요소를 가졌기 때문에 화면을 버리기 전에 사실(寫實)을 버리게 되었다"는 그의 말은 지성과 관련해 현대추상의 정곡을 찌른 명언 중의 명언이 아닐 수 없다.
 
작가의 정신적 태도를 중시하는 현대 조형이념에서 김종영은 동양의 '불각(不刻)의 미'를 보게 됐다. 양자는 상통하고 있었다. 불각은 '깎되 깎지 않는다'[刻而不刻]는 의미로서 상대모순인 '각'과 '불각'을 순접(順接)으로 병치(竝置)시켜 양 극단을 벗어난 중도(中道)의 미를 추구하는 것이다. 중국 명대(明代) 스타오(石濤, 1641-1708)가 말한 사이불사(似而不似)의 현묘한 경지와 유사한 맥락이다. 옛 사람들이 불각의 미를 최고로 삼는 것은 형체보다 뜻을 중히 여겼던 터이다. 소위 형사(形似)보다 신사(神似) 내지 사의(寫意)가 우선이었던 것이다. "김종영 작품에 담긴 추상성은 서양의 모던아트에서 지향한 추상미술과는 다른 차원의 해석이 요구된다"고 한 미학자 김윤수(金潤洙, 1936-2018)의 주장은 일리가 있었다. 서구의 추상이론보다는 동양의 예술정신으로 김종영을 이해하는 길을 열어놓았다고 볼 수 있다.
 
'불각도인(不刻道人)'을 낙관(落款)으로 삼을 정도인 김종영은 깎아 만든 조각으로서의 모든 흔적을 지워 버리고 가능한 한 객관체로서 천진(天眞)한 작품을 제작하고 싶어 했다. 마치 오랜 세월 동안 마모되어 저절로 다듬어진 자연석 같은 작품을 염원한 것이다. 그는 루마니아 조각가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 1876~1957)와 국제공모전의 심사위원들 중 총책임자이기도 했던 영국의 헨리 무어(Henry Moore, 1898~1986)를 불각의 미를 잘 보여주는 작가로 여겼다.
 
특히 '현대 추상 조각의 아버지'로 불리는 브랑쿠시는 로댕으로부터 제자가 되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았지만 "거목 밑에 있으면 빛을 가린다"며 거절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럼에도 로댕의 작품이 형태의 재현에 멈춰 있다는 비판이 브랑쿠시의 속마음에 내재됐다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김종영은 세잔(Paul Cezanne, 1839~1906)을 계승한 것으로 평가되는 브랑쿠시가 재료의 모습을 잘 보존하면서도 표현의 대상을 연상시키는 추상을 추구한 점에서 불각의 미와 통한다고 본 것 같다.

미(美)에 대한 김종영의 관점도 독특했다. 그에게 작품이란 미를 창작한 것이라기보다 미에 근접할 수 있는 조건과 방법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의 방법론 중 하나인 이념형(理念型, Ideal Typus)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개체의 미보다 보편적 형식에 더 관심을 기울였던 김종영은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절대적인 미를 본 적도 없고 또 그런 것이 있다고 믿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그것은 전지전능한 조물주에 속하는 문제라고 일축했다. 심지어 '미술'이란 용어도 사용하지 말자고 했다. 그 대신 '조형예술'을 제안했다. 아름다움과 무관한 조형적 노력에서 미의 생태를 볼 수 있다는 역발상이 아닐 수 없다.
 
기술은 단순하게, 정신과 내용은 풍부하게
 
김종영은 그 소양이 기본적으로 동양의 '선비'였다. 휘문고보(徽文高普) 2학년 때인 1932년 동아일보 주최 제3회 전조선학생작품전람회 서예 부문에서 안진경체로 일등상을 받을 정도였다. 그는 "도를 뿌리로 하고 예를 풀뿌리로 한다"는 '근도해예(根道核藝)'를 작품으로 남겼다('核'을 '풀뿌리 해'로 읽었음). 그에게 조각은 기술이 아니라 도와 예였다. 그가 자연을 늘 관찰한 것도 기술의 굴레에서 탈피하려는 노력이었다. 그는 또 썩지 않는, 무한하고 영원한 것에 뜻을 두라는 '지재불후(志在不朽)'를 붓으로 즐겨 썼고 제자들에게 나눠 주었다고 한다. 김종영에게 조각은 존재론적 고민을 던지는 화두이기도 했다.
 
통찰의 정신적 내용보다 기술의 세련에 열중하는 것을 그는 '타락한 시대'의 산물로 여겼다. 고대인의 고졸(古拙)하고 소박한 기교에서 넘쳐흐르는 박력과 기백의 자연미를 발견한 것이다. 예술은 표현이라는 점에서 기술의 작업이 아닐 수 없다. 또 표현도 명확해야 한다. 하지만 기술과 표현은 어디까지나 소박하고 단순해야 하며 대신에 내용과 정신은 풍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중국 송대(宋代) 수쉬(蘇軾, 1037-1101)의 "묘사는 간략하지만 의는 풍부하다"[言簡而意豊]와 일맥상통한다. 더욱이 현대에는 기술이라는 것조차 정신적 행동이 됐다고 주장했다.
 
김종영이 완당 김정희(阮堂 金正喜, 1786~1856)의 작품을 훌륭하다고 칭송한 것은 그 기술이 한결같이 정신의 직접적인 동기에 근거를 뒀기 때문이었다. 고택에 찾아가 절을 올릴 정도로 흠모한 완당에 대해 그는 "조선 오백년에 과연 몇 사람의 예술가를 꼽을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제자인 김세중(金世中, 1928~1986) 교수는 김종영은 완당의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을 온 몸으로 실천했다고 술회했다.
 
1인1기(一人一技)의 강조도 '천박한 이기심'이라고 질타했다. 그리고 그 이기심을 '혈안(血眼)'으로 불렀다. 대교약졸(大巧若拙, 『도덕경』 제45장)이라고 했듯이 큰 기교는 졸렬함과 같은 것이다. 김종영은 역설적으로 "기교가 치졸하면 할수록 맛이 진진(津津, 넘쳐흐를 정도로 매우 많음)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대예술가의 개성이나 독창성은 기법의 특이성이 아니라 오랜 수련과 경험으로 이루어진 자각과 달관의 경지에서만 나온다고 믿었다. 사람과 사람 간의 차이는 1%에 불과하다며 개성이나 독창성보다는 자연이나 사물의 질서에 대한 관찰과 이해에 더 관심을 가질 것을 요구했다. 20세기 화성(畵聖)이라 불릴 정도로 세잔의 예술이 위대한 것 역시 그의 인격에서 비롯된 의지와 성실성에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정된 시간에 무한의 가치를 생활하는 것." 그것은 인생에 대한 김종영의 격률(格率)이기도 했다.
 
타락과 천박은 부정직(不正直)에 그 원인이 있었다. 그는 권력의 거짓을 자신의 양심에 따라 정직하게 폭로한 러시아 문호 솔제니친(Aleksandr Isayevich Solzhenitsyn, 1918~2008)을 존경했다. 모든 허위와 가면을 고발하고 인간 본연의 성정(性情)에 호소하는 행동을 진정한 예술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김종영에게 정직은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기만하지 않는 것이었다. 작품에 대한 진정한 관중은 예술가 자신이라고 했다. 실용을 전제로 한 '무엇을 위한 예술'이란 김종영에게 있을 수 없었다. 오직 '예술을 위한 예술'만이 존재했다. 즉 작가만이 작품의 용도를 만든다는 것이다. 예술은 결국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라고 못 박았다. 철학자 박갑성(朴甲成, 1915~2009)은 "열 권의 책을 쓴들 이런 통찰이 어디 있겠느냐"며 감탄했다. 그는 휘문고보 때부터 동경유학 시절까지, 또 서울대 동료교수로 평생을 같이 한 김종영의 지기(知己)였다. 그 통찰은 끝내 윤리로 승화됐다. "자기한테 관대한 사람은 남에게 가혹하고 자기한테 가혹한 사람은 남에게 관대하다"는 것이 김종영의 지론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술을 실용적 가치 이전에 하나의 유희(遊戲)로 봤던 사실도 상기시켰다. 과묵하면서도 때론 촌철살인의 유머도 구사했던 김종영은 "쓸 데 없는 일을 하는 사람이 중요하다"라며 우회적으로 유희를 대변했다. 유희가 아무런 목적 없는 순수한 즐거움과 아무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다분히 예술의 바탕과 상통한다고 본 것이다. 그 자유는 자기로부터의 해방이기도 했다.
 
그는 정신이 위대해 질 때 행동이 자유로워진다고 했다. 또 위대한 예술적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모두 자유롭게 '헛된 노력(勞力)'에 일생을 바친 사람들이라며 유희삼매(遊戲三昧)를 원용한 완당을 우러렀다. 삼매는 산스크리트어 'śamatha'의 음사어(音寫語)로 마음을 한 대상에 집중시키는 심일경성(心一境性)을 의미한다. 예술은 이렇게 현실적 이해를 떠난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유희적 태도와 여유에서 진전된다고 했다.
 
구성, 공간과 아심메트리(Asymmetry, 비대칭)
 
비형제일체(非形第一體, 『금강반야론』)라고 했다. 형태가 아닌 것이 최고의 구성이다. 불각의 미를 추구한 김종영이 형태보다 구성을 중시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예술가의 사상, 역사적 자각, 창의성 등이 모두 다 구성 속에 나타나고 작품의 세부(細部) 또한 구성의 통제 안에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돌 속에 잠자고 있는 형태를 일깨운다"는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의 말처럼 조각은 회화와 달리 매재(媒材, 매개가 되는 재료)가 형태를 유도한다고 이야기한다. 김종영은 작품을 하나의 전체로서 있게 하고 또 정착시키는 방법은 결국 구성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구성이 없는 형태는 동양인의 과학성 부족에 기인한다고 분석했다.
 
그에게 대상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무엇을 그리느냐보다 '어떻게' 그리느냐는 구성의 문제가 늘 고민거리였다. 단순한 재현이 아닌, 대상에서 받은 감동을 작품에 실현한다는 것은 지난(至難)한 정신작업이 아닐 수 없다. 국제공모전 출품작에 대해 "여인의 나상(裸像)은 표현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정신의 기록이 남아있다면 정치수에게 모조리 제공하고 싶다"고 말했다. 구성은 곧 정신의 기록을 함의했다.
 
조각이 건축의 예속물에서 벗어난 르네상스 이후 구성은 공간의 문제이기도 했다. 공간은 언제나 인간의 꿈의 대상이었다. 김종영은 끝없는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산과 바다의 양과 구성을 위대하다고 말했다. 산과 바다가 영원한 감동을 주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조각을 입체로써 공간을 설정하는 작업이라고 정의한 그에게 공간은 조각의 본질적 요소였다. 공간의 처리 방법은 기본적으로 예술의 양식에 속하는 사안이지만 한편으로 역사상 정신적 변천의 중심을 이루는 철학적 사유이기도 했다.
 
서양미술에서 공간은 물리학적 대상인데 반해 동양미술에서는 여백으로서의 무(無)의 상태를 가리킨다고 했다. 또 "유는 무에서 태어난다"는 유생어무(有生於無, 『도덕경』 제40장)라는 구절로 무를 해석했다. 무를 절대 능력자로서 모든 존재의 근원이라고 본 것이다. 서양미술에서도 공간은 종종 무로 취급되어 20세기에 들어와 형이상학적 회화가 생기기도 했지만 그 무는 '유'의 근원이 아니라 '무' 자체라고 해석했다. 박갑성은 김종영의 철학을 식물이 태양 쪽으로 머리를 향하며 자라듯 '유' 쪽을 향하여 명상하는 것이라고 했다.
 
김종영은 자신의 작품이 "공간에 있으면서 공간을 호흡하고 언제든지 공간에서 죽어 없어질 수 있는 이러한 생명을 갖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작품의 생명감은 공간적 효과에서 나온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또 조각은 운동과 힘의 작용이 원심적일 때 공간적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최종태는 국제공모전에 등단한 대부분의 작품들이 공간에 대한 탐구의 형태였던 탓인지 1950년대 말까지 김종영의 작품은 공간적 구성의 탐구였다고 회고했다. 평론가 오광수는 1950년대 김종영의 추상작품은 넓은 의미에서 공간의 실험이라는 차원에 연대되고 1960년대 이후에는 형태의 중심에 뚫린 공간을 설정하는 본격적인 모습이 보인다고 했다.
 
공간적 효과와 더불어 아심메트리(Asymmetry, 비대칭)도 중시했다. 어느 날 김종영은 전시회를 보러 가서 예쁘게 그린 새 한 마리를 보고 곧 바로 최종태에게 '날지 못하는 새!'라는 한 마디만 던졌다고 한다. 생명을 파악하는 박진력이 없다는 의미였다. 질책에 가까운 추상(秋霜) 같은 촌평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생명감과 동세(動勢)를 핵심적인 미의 요소로 간주한 김종영에게는 당연지사였다. '생명이 돌 속에서 움직이는 것 같다'는 말대로 무기적인 물체를 유기적인 생명체로 환원하는 것은 그의 조형예술의 본질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명의 동적인 상태는 항상 아심메트리였다.
 
김종영은 작품의 유기적인 구조와 효과적인 입체를 위해 심메트리(Symmetry)를 깨뜨리기에 힘쓴다고 했다. 심메트리는 작품을 평면화시키고 운동성과 입체의 생기를 잃게 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비례 관념으로는 형이상학적 공간을 획득하기 어렵다는 근원적인 문제도 있었다. 최종태는 아심메트리에 의구심을 품다가 후일 완당의 서체가 모두 아심메트리인 것을 발견하고 "아차! 이것이었구나!"하고 그 뜻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고의로 균형을 깨뜨려놓고서 가까스로 균형 잡는 아슬아슬한 매력이었다고 회고했다. 실로 스승이 세상을 떠난 후 25년 만의 일이었다.
 
각백(刻伯)은 김종영의 애칭이다. 휘문고보 은사인 우석 장발(雨石 張勃, 1901~2001)이 서울대 미대 학장 시절에 농담 삼아 불렀던 호칭이라고 한다. 조각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이라는 뜻이다. 김종영이 영면에 들자 박갑성은 이제 각백(覺伯)으로 바꿔 불러야겠다고 했다. "'무한한 가치' 이것은 인간의 자각이다"라고 말한 김종영은 깨달음에서도 일가를 이룬 사람으로 추모됐다. 말년에 최종태에게 거두절미하고 불쑥 던졌다는 "신(神)과의 대화가 아닌가"는 그 해석의 시비를 떠나 각백만이 할 수 있는 언사였다. 또 "신성(神性)에 가까워지고 그 빛을 인류 위에 펼치는 일 이상에 아름다운 것은 없다"는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의 말을 좋아했던 각백에게 지극히 합당한 독백이기도 했다.
 
실제로 김종영은 두 점의 <자각상>을 남겼다. 각각 1964년과 1971년에 제작한 것으로 지혜의 표정을 상징하는 간결한 두상(頭像)이다. 오광수는 전자가 고뇌하는 예술가의 상이라면 후자는 관조적이면서도 명상적인 분위기가 짙다고 평했다. 자성과 명상을 벗 삼았던 김종영의 자각이 1971년 작에 잘 드러난 것이다.
 
<작품 80-5>도 자각상으로 알려져 있다. 작품이 아닌 줄 알고 버리려는 것을 최종태가 챙겼다는 일화가 말해주듯이 최소한의 가공을 한 것이다. "나무 조각하나만 붙여 코만 만들었다"는 설명을 통해서만 자각상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이다. '망아(忘我)' 혹은 '자기심화'라고 해석하는 이 작품은 만년의 자각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김종영의 나이 50세가 되던 1964년은 1월1일 일기를 통해 '실험과정'과 '종합'의 분기점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 작품의 변화는 종합의 과정을 말해주는 것 같다.
 
김종영은 "예술의 미명을 팔아서 예술가의 흉내를 내는 사람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제법 비장한 결의와 노력을 쌓아가며 예술에 정진하는 사람일지라도 견식이 얕거나 평범한 고집으로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념이나 사회적 지각 없이 단지 속된 기술이나 형식에 얽매여 진전을 보지 못하는 것도 딱한 일이다"고 말했다. 김동길(金東吉, 1928~2022) 교수는 이를 "천재가 아니라면 예술을 전공하지 말라"라는 뜻이라고 해석하고 싶다고 했다. 김동길이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으면서도 단번에 알아본 천재. 김종영은 '희대의 천재'였다.
 
 
참고문헌
 
김종영 『초월과 창조를 향하여』 1983
김종영 『조각가 김종영의 글과 그림』 2023
최종태 『한 예술가의 회상』 2009
오광수 『김종영』 2013
김수진 「김종영의 사의적(寫意的) 조형미학 연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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