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한번 크게 쉬고 기다리면, 비가 그칠거에요

자식 앞에서 부서지는 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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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완(nanletter)등록 2024.05.07 11:45
사람이 되는 일은 내 삶의 큰 목표이다. 좋은 사람, 사람 냄새가 나는 사람 그런 사람 말이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고 이 욕구는 나이가 들어도 여전한 듯싶다. 타인의 기분을 살피고 모임의 분위기를 밝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데, 그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열망은 관계 속에서 강화됐겠지만 근원적 갈망과 더 가까운 것 같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잘 먹고 잘 사는 일을 삶의 목표로 삼기에는(그럴 자신도 없었지만) 뭔가 부족해 보였다. 불공정하고 불의한 세상에서 한 점 부끄럼 없이 올곧게 살지는 못해도 그런 세상에 편승하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직장에서 내 몫을 책임 있게 감당하고 싶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품 넓은 어른으로 익어가는 좋은 어른이고 싶다. 하지만 나의 이 거룩한 갈망이 그녀 앞에서는 쉬이 부서진다. 요즘 나를 절망 속에 주저 앉히는 그녀는 나의 보물 1호 중2 딸이다. 

출발은 기대감에 가득했다. 딸도 자신의 인생에 대한 애정이 있었고 자신만의 길을 찾기를 원했다. 딸의 진로를 함께 고민하며 우리는 경쟁적 교육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행학습을 택하지 않기로 했다.

남들보다 일이 년 늦더라도 시험을 위한 공부가 아닌 진짜 공부를 해보기로 했다. 딸이 관심을 보인 음악 분야부터 시작해서 미술, 역사 등으로 공부의 영역을 넓혀 가기로 했다. 주입식 교육이 아닌 자발적 교육, 경쟁의 교육이 아닌 상생의 교육을 가치로 삼았다.

첫 걸음으로 노래 만들기를 시작했다. 비전공자들도 유튜브와 앱을 통해서 작곡을 직접 하는 경우가 많고, 나 역시도 최근에 지인의 도움을 받아 노래를 만들어본 경험이 있어서 자신이 있었다.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 수고를 자처했다. 자료들을 선별하고 정리해서 강의안을 만들었다. 열의를 다해 준비한 첫 강의는 내 기대 같지 않았다. 딸의 자세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개의치 않고 딸을 위해 작곡 과정을 미리 정리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결국 딸의 한 마디에 폭발했다. 

"졸리다."
 
삐딱하게 앉아 있는 것도 참고 있었는데, 누르고 있던 내 속의 용암이 폭발했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노래 만들기 네가 하자고 했잖아. 그런데 네 자세가 지금 배움의 자세야?"

아내는 옆에서 한숨을 내쉬고 딸은 대답도 없다. 인간은 스스로를 위대한 존재로 여기며 살아왔다. 인류는 지구상의 다른 어떤 존재와는 비교될 수 없는 존재로 스스로를 여겨왔다. 아니 지구뿐만 아니라, 온 우주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중심으로 여기며 만물이 인간을 중심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가 온 우주의 중심이라는 진리는 결코 깨질 수 없는 불변의 진리였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는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고작 우주의 먼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 진리를 우리 인간이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긴 역사만큼이나 꽤 길게 서술한다. 잊히지 않는 대목은 마르틴 루터의 연약함이 드러난 부분이었다. 종교 개혁자 루터는 코페르니쿠스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바보가 천문학이라는 과학을 통째로 뒤엎어 놓으려 한다. 그러나 성서에 분명히 쓰여 있듯이, 여호수아가 멈춰라 하고 명한 것은 태양이지 지구가 아니라." 가톨릭교회는 코페르티쿠스의 저술을 1616년 금서 목록에 포함해 1835년까지 유지했다(123p, 코스모스). 

기독교가 처음부터 이렇게 어리석은 것은 아니었다. 성경의 첫 번째 책 창세기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흙으로 창조한다.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은 하나님이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서 생명의 존재가 된다. 이 이야기를 과학적 명제로 받아들이는 어른들은 흔치 않을 것이다. 시적 표현에 더 가까운 이 이야기는 인간이 얼마나 쉽게 부서질 수 있는지 비유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아이를 키우면서 인정할 수밖에 없고 또한 인정하기 싫은 일이 내 약함을 마주하는 일이다. 아이 앞에서만은 약함을 들키지 않고 싶은데, 오히려 더 바닥을 쉽게 드러낸다. 좋은 부모로서 부드럽게 타이르고 싶지만, 딸은 이제 절대 순순히 백기를 들지 않는다. 딸이 사춘기라는 시기를 마치 무슨 절대 반지처럼 쓰는가 싶어, 부모로서, 연장자로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힘을 휘두른다. 그렇게 한참을 대치하며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다. 약자일 수밖에 없는 딸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물을 쏟고, 그제야 난 정신이 돌아온다. 아무것도 아닌 일을 뭘 그렇게 큰일로 만들었을까. 불같이 타올랐던 화는 혹여 딸에게 없어지지 않는 상흔이 생기지는 않을지 걱정으로 바뀐다. 

세상에서 우리의 존재는 먼지처럼 작다. 흙으로 만들어진 우리는 모두 흙으로 돌아갈 유한한 존재들이다. 샤사 세이건은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 책에서 '인간은 궁벽한 곳에 있는 작은 행성에서 눈 한 번 깜박할 순간 동안을 살아가는 아주 작은 존재'라고 그녀의 아버지 칼 세이건에게 배웠다고 했다. 하지만 또 그녀는 부모로부터 '우리처럼 작은 존재가 이 광대함을 견디는 방법은 오직 사랑뿐'이라는 사실도 배웠다고 했다. 지금도 딸과 나는 어려운 대화를 반복하고 있다. 

"아빠가 미안해"
"나도 하기 싫어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습관처럼 나온 말이었어"
"아빠가 너한테 화내고 뒤돌아서 후회할 때 많아. 미안해. 그래도 우리 서로 사랑하는 거 잊지 말자. 알았지."

딸이 울었고 나도 울었다. 내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욕심은 아이에게만큼은 꼭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오늘처럼 감정이 주체가 안 될 때는 잠깐 숨을 크게 쉰다. 서로를 살리는 숨을.

"아빠, 아직도 비가 와. 근데 우산 안 쓰는 사람들도 있어"
밖에 나가고 싶은 막내가 거실에서 소리친다.
"응. 좀 있으면 곧 개겠네."
덧붙이는 글 첫번째 도전은 내 노래 만들기(작사작곡 직접 해보기) 두번째 도전은 그림책 만들기(이야기와 삽화를 직접 만들기) 세번째 도전은 역사 탐방기(국내외 역사를 통해 지금의 정치, 사회를 이해하기) 이런 식으로 아이들과 함께하는 공부의 이야기를 글로 담아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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