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적인 어버이날을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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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현(seohyeonlee2020)등록 2024.05.08 09:27
나는 어버이날이 달갑지 않다. 폭력적인 가족문화는 외면하면서 부모와 어르신을 공경하는 분위기에 동참하라고 강요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가정폭력에 시달려본 사람들에게 어버이날은 고통을 떠올리게 만들고, 가해자에게 감사하라고 강요하는 잔인한 날이다. 정상가족의 틀에서 벗어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먼 가족구성권을 부정당하는 날이기도 하다. 기존 어버이날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폭력적이지 않은 5월 8일을 제안하려고 한다. 

폭력적인 가족문화에 눈을 감는 어버이날
우리나라 가족문화에는 성차별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악습이 깊게 박혀있다. 명절만 되면 여자들은 부엌에서 집안일을 떠맡는데 남자들은 쉬면서 여자들이 지은 밥을 얻어먹는다. 여자는 아이를 낳으면 질 좋은 일자리에 재취업하기 어려워서 불안정한 일저리를 전전하지만, 남자는 아이가 생겨도 경력에 타격을 받는 일이 드물다. 이성애 부부가 아이를 낳으면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 않는 이상 남자 쪽의 성을 따른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직계 가족이라면 누구나 다른 직계가족의 주민등록등본을 발급받아 주소지와 같은 개인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중요한 개인정보를 본인 동의 없이 타인에게 공개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우리나라 가족주의의 어두운 면을 보여준다. 가정폭력 가해자가 피해자를 감시할 길을 열어주는 제도이기도 하다[1]. 

잔인한 어버이날
가정폭력 피해를 본 사람에게 어버이날은 가해자에게 감사하라는 압박에 시달리는 날이다. 특히 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나 청소년이라면 부모에게 감사 편지를 쓰고 카네이션을 만드는 행사에 참가해야 한다. 감사를 받을 자격 없는 폭력 부모라도 예외는 없다. 나도 어버이날 언저리만 되면 부모에게 학대당한 기억이 물밀듯이 올라온다.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지만 감당할 수 없는 기억들 때문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만큼 고통스럽다. 가정폭력 피해자의 상황은 외면하면서 부모님께 감사하고 어르신을 공경하라고 외치는 어버이날에게 환멸을 느낀다. 

괴로운 사람은 가정폭력 피해자 말고도 더 있다. 부모를 일찍 잃은 사람에게는 상실을 떠올리게 만드는 날이다. 부모 없이 성장한 사람에게는 자신의 성장 배경이 '정상'에서 벗어났다고 억지로 상기시키는 날이다. 

성소수자의 가족구성권을 부정하는 어버이날
어버이날은 성소수자도 철저하게 무시한다. 우리나라에서 동성 부부가 공식적으로 누군가의 '어버이'로 인정받는 모습을 본 적 있는가? 어버이는커녕 법적인 가족으로도 인정받지 못한다.
정상가족을 벗어난 관계에 법적인 동반자 지위를 부여하자는 생활동반자법은 국회에 발의될 때마다 무산되었다. 성소수자들이 가족을 이룰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기반을 다질 차별금지법 역시 보수 단체, 종교단체의 압력 때문에 국회 문턱을 넘어본 적이 없다.
나는 어버이날이 정상가족 밖에 사는 사람들에게 휘두르는 폭력을 거부한다. 다음은 내가 제안하는  5월 8일의 모습이다. 

5월 8일이 삶을 다채롭게 만들어주는 모든 관계를 기념하는 날이 되기를 바란다. 가족도 되고 친구도 되고 동반자도 된다. 이름을 찾지 못한  관계도 환영이다.  만약 혼자라면 혼자인 시간을 긍정하는 날이면 좋겠다. 기존 어버이날이 외면한 가정폭력 피해자의 고통을 직시하고, 피해자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도와주는 날이 되기를 바란다. 기존 어버이날에 진행하는 가족 관련 행사나 정책이 남아있다면 원하지 않는 사람은 관련 정보를 접하지 않을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폭력적이지 않은 5월 8일을 만들고 싶다.

[1] 가정폭력이나 성폭력 피해 사실을 증명할 수 있으면 '등초본 교부제한 신청'을 통해 정보를 차단할 수 있지만, 개인정보를 보호할 당연한 권리를 얻기 위해 국가의 허락을 구해야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불합리한 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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