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외면한 최전선에서 : 양육비 미지급 피해 아동을 위해 13년간 싸워온 노장(老將) 구본창

검토 완료

박수아(clappinga)등록 2024.05.20 09:15

'최전선(最前線) : 적과 맞서는 맨 앞의 전선.' 이곳엔 적군으로부터 몸을 숨길 방어진이 없다. 내가 곧 동료의 방어진, 내가 쓰러지면 다음 타깃은 등 뒤의 동료. 그렇기에 최전선에 선 이들은 더욱 사력을 다해 본인의 자리를 지킨다. 총탄이 오가고 적군의 것인지 나의 것인지 모를 피가 튀기는 이곳에 홀로 선 이가 있다. 수호와 상실 사이의 어딘가를 오가는 노장. '구본창(61)'이다. 그는 올해 환갑을 넘긴 사회 활동가다. 그의 전장은 아동의 생존권을 적극적으로 수호하지 않는 사회. 그는 아동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양육비 미지급 문제를 해결하고자 '양육비 해결하는 사람들(전 배드파더스)'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것일까
그는 원래 입시학원 학원장이었다. 대형 입시학원 스타강사에서 학원장까지. 성공 대로를 달리던 그에게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공휴일에도 쉼 없이, 하루에 14시간씩 일하며 아들, 가장의 도리를 다 하며 살아온 그는, 48세에 이른 은퇴 후 필리핀에 건너가게 된다. |"Are you Korean?" 그의 발걸음을 멈춰 세운 것은 필리핀 여성이었다. 그녀는 "아이의 아버지가 한국인인데, 연락은 두절되었지만 주소는 알아요. 혹시 여기가 어디인지 아세요?" 라 물으며 쪽지를 건냈다. '코피노맘이구나' 쪽지를 받아 들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닳고 닳은 종이, 그리고 한 문구.


"Guegul Minni 18 Korea"


그걸 믿니, 씨팔 코리아. 신호탄이었다. 아버지로서, 한국인으로서 수치스럽고, 분했다. 바로잡고 싶었다. 이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그는 한국인 아빠에게 버려져 양육비도 받지 못하고 빈민가에서 배 곪는 코피노 아이를 돕기 위해 나섰다. 그렇게 창단한 단체는 'WLK(We Love Kopino).' 그는 WLK활동을 통해 무책임하게 도망간 부모를 직접 찾아가 양육비를 받아냈다. 건당 600만 원이 드는 국제 소송도 아낌없이 지원했다. 이 과정에서 협박과 육탄전도 겪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옳은 일'이고,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도움을 청하는 코피노맘이 점점 많아져 사비 만으로는 돕기 어려워지자 인질 구출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필리핀의 민다나오섬에서 반군에게 납치된 사람들을 구조하며 자금을 모았다. 그렇게 손에 들린 총. 누구의 것인지 모를 총탄이 오가는 곳에서 매일같이 생사를 오갔다. 한국 정부도, 필리핀 정부도 그 누구도 돕지 않는 곳. 그곳은 말 그대로 최전선이었다.

|최전선(最前線)의 확장, 코피노에서 한국의 양육비 미지급 피해자에게로.
구본창 씨는 WLK를 통해 양육비 미지급 소송을 진행하며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한국은 다른 국가에 비해 양육비 미지급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한국에도 양육비 미지급 피해자가 사회 곳곳에 존재한다는 것.' 그렇게 그는 2018년, 한국의 양육비 피해자들을 돕는 시민단체 '배드파더스'에 합류했다. 최전선의 확장이었다.

​ 

구본창_jtbc캡쳐 구본창 활동가 jtbc 화면 캡쳐 ⓒ jtbc

 
그는 한국의 양육비 미지급 문제에 대한 낮은 인식을 높이고 보다 적극적인 정부의 대처를 촉구하는 목소리를 냈다. 한국에서의 새로운 전투에 그가 선택한 탄창은 양육비 미지급자 신상공개, 그리고 각종 방송 미디어에서의 인터뷰 참여, 시위였다. 양육비를 미지급한 부모의 신상을 '배드파더스' 홈페이지에 공개한 것이 사회적인 이슈가 되어 더욱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모을 수 있었고, 이는 '아동 양육비 미지급 문제'에 보다 더 많은 시민들의 관심을 이끌어냈다. 그렇게 그는 3년간 2000명 신상을 공개했고, 890건의 양육비 미지급 문제를 해결했다. 그리고, 정부가 움직였다. 양육비 이행법 시행령이 개정된 것이다.

|양육비 이행법 시행령 개정, 그 이후의 이야기.

2020년 12월 양육비 이행법 개정안 국회 본회의 통과. 2021년 7월 더욱 강력한 개정 양육비 이행법이 시행되었다. 정부가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은 비양육 부모에게 운전면허 정지 및 출국금지 조치를 취하고, 감치 명령 후 1년이 지나면 형사 고소까지 가능하게 법이 강화되었으며. 여성가족부에서는 해당 양육자의 신상 공개를 진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부의 움직임 덕에, 배드파더스는 21년 10월, 아름다운 퇴장을 했다.

필리핀에서 한국까지. 총과 피켓을 들고 양육비 미지급 문제 해결을 위해 앞장서 양육비 이행법 시행령 개정까지 이끌어낸 일등공신 사회활동가 구본창. 그는 지금 어떻게 지낼까? 23년 4월, 한국잡지교육원을 찾은 그를 만나봤다.
 

구본창 구본창 사회활동가가 한국잡지교육원에 방문하여 양육비 미지급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다. ⓒ 박수아

 
Q. 양육비 이행법 시행령이 개정되었습니다.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법을 통해 명단 공개를 비롯해 및 출국 제재가 이루어진 것은 의미가 있으나, 여가부의 신상 공개 방침은 무의미해요. 미지급자의 얼굴 공개를 하지 않기 때문이죠. 동명이인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미지급자가 누구인지 직관적으로, 빠르게 특정 짓기 어렵게 되었어요. 이전보다 신상 공개에 대한 부담이 줄게 되자 양육비 미지급률이 다시 오르기 시작했어요. 사실상 신상 공개로부터 자유로워진 거라 할 수 있죠. 지급률은 다시 떨어졌습니다. 최고 형량이 징역 1년 벌금 1천만 원인 것도 문제예요. 오랜 세월 동안 양육비를 미지급한 자들은 그간 지급해야 할 양육비가 4천을 훨씬 넘기기도 하는데 징역 1년 다녀오면 퉁 칠 수 있는 거잖아요. 이건 말이 안 돼요. 법이 좀 더 강화되어야 해요. 형사처벌을 한다고는 하지만 법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어요. 대법원은 국민의 법 감정을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양육비 미지급 아동들이 제때 돌봄을 받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국가가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양육비 이행법 시행령 개정을 앞두고, 구본창 씨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3년 동안 너무 힘들었어요. 양육비를 미지급한 '나쁜 아빠'들로부터 살해 협박도 여러 번 받았죠. 그런데 양육비 책임을 저버린 나쁜 부모를 처벌하는 일을 정부에서 하게 된다니… 무거운 짐을 하나 덜어낸 것만으로도 행복해요."

정부가 개입했으나 실효성은 낮았다. 피의자는 또다시 피해자를 낳기 시작했다. 구본창 활동가는 양육비 해결하는 사람들로 활동을 재개했다. 노장, 그는 다시 최전선으로 내몰렸다.


|다시 홀로, 최전선으로 내몰리다
나쁜 일은 연달아 일어났다. 배드파더스 사이트를 통해 양육비 미지급자들의 신상을 공개한 행위가 '사실적시 명예훼손'에 해당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온 것이다. 구본창 씨는 항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구 씨에게 벌금 100만 원의 선고를 유예했다.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21년 12월 23일이었다.

Q. 요즘도 양육비 해결하는 사람들 활동이나 WLK 활동을 하고 있나요?
지금 WLK 활동이 중단된 상태입니다. 지원할 돈이 없거든요. 그래서 2월부터 용인 명지대학교 기숙사 사감을 하고 있습니다. 양육비 해결하는 사람들 활동은…작년 12월 이후로 상당히 회의감이 들어 적극적인 활동은 하지 않고 있어요.

Q. 회의감이 드는 이유는 뭔가요?
"21년 법원 판결이죠. 사실 법원에서 그런 판결이 날 것이라는 것은 예상했습니다. 법원은 아직 상당히 보수적이니까. 그래도 막상 판결이 그렇게 나니 '그래도 대법원은 합리적인 판단을 하지 않을까?' 했던 희망이 깨져 소위 말하는 '현타'가 왔다고나 할까요."

Q. 가족은 뭐라고 하나요?
"지금은 이혼했습니다. 아이 엄마는 '나쁜 아빠들 사이트에 당신이 올라가야 한다'고 말하곤 했는데, 이렇게 되었네요.

Q. 그렇다면 이 싸움, 계속할 건가요?
"양육비 피해 아동을 위해 나선 지 13년이 지났네요. 그동안 수 없이 그만두려 했습니다. 계속할 것이냐 말 것이냐는 정하지 않았지만, 가급적이면 그만두고 싶습니다. 이젠, 그만하고 싶어요."

Q. 양육비를 제대로 지급하는 사회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양육비를 제대로 지급하는 사회가 되려면 사회의 인식이 변화해야 합니다. 인식이 변화하려면 제도가 먼저 바뀌어야 하고요. 양육비 미지급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것이 인식의 변화를 끌어 내는 실마리라고 생각합니다. 양육비 이행법 개정안이 강화되면 하루빨리 필리핀으로 돌아가 다시 코피노 지원 활동을 하고 싶습니다"
구본창 활동가. 그는 이젠 그만하고 싶다" 말하면서도 곧이어 다음 질문에 대한 응답에선 "언젠가 필리핀의 시골에서 자연인처럼 여유 있게 살며 코피노 아이들을 돕고 싶다." 답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My way: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길을 가련다.
한국은 OECD 국가 중에 유일하게 양육비 미지급을 아동학대로 처벌하지 않는다. 양육비 미지급은 단순 채무가 아닌, 아동의 생존권이 달린 일임을 생각해 보면 의아한 일이다. 양육비 미지급 문제에 미지근한 정부의 대처 속, 구본창 활동가는 양육자와 자녀의 생존권 보장하고 양육비 미지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전방에서 앞장서 왔다. 양육비 이행법 개정안 시행이란 성과도 얻어냈다. 하지만 의회와 사법부, 정부가 외면한 짐을 대신 짊어진 개인의 희생은 생각보다 너무 커다랐다. 그는 WLK 자금 모금을 위해 진행했던 인질 구출 사업 당시의 경험으로 지금까지 PTSD를 앓고 있다. 그리고 많은 '배드 파더스'로부터 수시로 협박을 받으며 지낸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가 부르는 노래가 있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다.
​ "I took the blows and did it my way. Yes, it was my way." ​
구본창 씨는 WLK 활동비를 마련하려 이슬람 반군에게 납치된 이들을 구하러 가기 전날 동료들과 술을 마시며 이 노래를 불렀다. 지금도 종종 이 노래를 부른다. "정의로운 사람을 못 되더라도 눈앞에 보이는 문제는 외면하지 말자고 다짐했습니다"라 말하며 나의 길을 가겠노라 노래하는 그를 누가 감히 판단할 수 있을까? 이웃을 위해, 약자를 위해 힘써온 노장은 최전방에서 묵묵히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이 노장의 행복은 누가 책임져야 할까? 국가는 답이 없다. 하지만 모를 일이다. 구본창 그가 해왔듯. 한 명의 개인들이 모여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쌓아 올린다면, 무엇이든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최전방에서 타인의 행복을 수호하며 살아온 이 노장이, 언젠가 은퇴하여 온전히 자신의 행복을 누리는 삶을 살도록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구본창 활동가 구본창 사회 활동가 ⓒ 박수아

 
"당장 변하지 않을 수 있죠.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기에 하는 겁니다. 할 수 있는 작은 일, 일단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는 일부터 하면 돼요."- 구본창 활동가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