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자 서훈 논의에 대한 견해

- 봉기자 서훈에 반대·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을 보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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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규(hanbong)등록 2024.05.27 13:32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자 서훈 논의에 대한 견해
- 봉기자 서훈에 반대·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을 보면서 -

 
송 정 수(전북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
 
 
근자에 여러 매체를 통해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자를 서훈 대상자로 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여러 논의와 주장에도 불구하고 서훈 대상자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으며, 여전히 서훈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만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다. 오래전부터 나름 동학에 관심을 가져온 필자로서는 지루하게 전개되는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면서 안타깝고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서훈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는 것일까?
궁금증을 풀기 위해 여러 자료를 찾아보게 되었고, 그러는 중에 '2023년 5월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심사 제1소위원회 심사자료'를 입수해 보게 되었다. 이 자료에는 '독립유공자 서훈에 관한 법률 개정을 위한 검토의견'과 아울러 몇 가지의 참고자료가 첨부되어 있다. 특히, 참고자료 가운데 '제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독립유공자 포상 검토 경과'에 담겨진 내용은 그간 지지부진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가늠케 해 준다. 여기에는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자 서훈에 대해 그간 국가보훈부에서 행한 추진 경과가 간략히 정리되어 있다. 이를 보건대 국가보훈부는 2차 봉기자 서훈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인 의견을 피력한 학계 전문가 및 학회(한국역사연구회) 차원의 학술회의 결과보다는 대체로 반대·신중 의견을 제시한 공적심사위원회의 의견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사실 지금까지 서훈 문제가 풀리지 않고 답보상태에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 자료에 정리되어 있는 공적심사위원들의 의견을 살핀 바, 수긍하기 어려운 여러 문제점이 발견된다. 방치하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서훈 문제가 하루라도 빨리 풀리기를 바라는 필자의 마음이 이를 허락치 않는다. 이에 필자는 대다수 공적심사위원들이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자 서훈에 대해 제기한 반대·신중 의견(참고자료에 수록된 역사교과서 집필자 자문의견까지 포함해서)에 나타난 문제점을 하나하나 지적하고 바로잡고자 하며, 서훈 문제를 풀기 위한 몇 가지 제언을 덧붙이고자 한다.
 
1. 서훈 대상자를 자의적으로 독립운동을 한 자에게만 국한시킴
 
2021년도 두 차례(6. 25.과 9.09.)에 걸친 공적심사위원회 논의에서 대다수의 공적심사위원들은 "독립운동은 식민상태 또는 준식민상태에서 국권의 수호 또는 회복하기 위한 활동으로, 항일운동이 곧 독립운동이 아님", "동학농민운동 2차봉기 시 항일투쟁에서 지키고자 했던 목표와 현재 포상하고 있는 독립유공자가 지키고자 했던 목표는 다르며"라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즉,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를 항일투쟁으로 인정은 하면서도 (준)식민상태에서 국권을 수호하고 회복하려는 독립운동과 다르기 때문에 서훈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이하에서는 독립유공자법으로 약칭함)을 심히 자의적으로 축소해서 적용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독립유공자법 4조 1항과 2항을 보면,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한 (사실이 있는 자, 항거하다가 순국한 자)"를 독립유공자 적용 대상자로 명시하고 있다. 즉, 독립운동을 위해 일제에 항거한 자뿐만 아니라 일제의 국권침탈에 반대해서 항거한 자 역시 동등하게 독립유공자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에 비추어 볼 때 공적심사위원들은 일제의 국권침탈에 반대해서 항일투쟁을 한 자는 배제한 채, 식민지배 하 독립운동을 한 자만을 적용 대상자로 보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이들의 주장대로 독립운동을 한 자만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는 법이라 한다면, 법 조문 중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라는 문장은 불필요하며, 간편하게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하거나 항거하다가 순국한 자'라고 하는 편이 훨씬 선명하다 할 것이다.
아무튼 공적심사위원들도 인정하듯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는 항일운동, 항일투쟁을 위해(일제의 국권침탈에 반대한 항거 여부는 후술) 일어났기 때문에 봉기에 참여한 자들 역시 독립유공자법률에 따라 당연히 독립유공자 서훈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할 것이다.
근자에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 참여자를 독립유공자 적용 대상에 확실하게 포함시키기 위해 법률을 개정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현행 법률 조문을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적용만 한다면, 법률 개정 없이도 2차 봉기 참여자는 당연히 서훈 적용 대상이 된다고 본다.
 

전봉준 장군이 일본영사관에서 심문을 받은 뒤에 찍은 마지막 모습 (1895년 2월 27일) ⓒ 양상현

 
2.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의 성격에 대한 몰이해
 
대다수의 공적심사위원들(자문에 응한 일부 역사교과서 집필자도 포함)은 "체제개혁을 위해 봉기한 동학은 충군·애국의 정신으로 일어난 의병과도 성격이 달라 독립운동으로 보기 어렵다"거나 "2차 봉기가 반일투쟁을 한 것은 맞지만 동시에 반봉건 투쟁도 병행했기에 반침략적 성격으로만 볼 수 없다"라고 하고 있으며, "현행 교과서에 동학농민운동은 제국열강의 침략에 대한 저항운동이면서 조선 내부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체제개혁 운동으로 기술"되어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따라서 동학농민운동 참가자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은 부적절하다고 하고 있다. 즉,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는 반일투쟁과 함께 반봉건 투쟁도 병행했기 때문에 독립운동으로 보기 어려워 서훈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공적심사위원들의 의견은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 2차 봉기의 성격을 구별하지 못하고, 통상적으로 회자되는 "동학은 반봉건 반제국의 기치 하에 일어난 운동"이라는 개념에 매몰되어 제기한 것으로 보인다.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와 2차 봉기의 성격은 엄연히 다르다. 1차 봉기는 일본을 배척하는 면이 없지 않으나 무엇보다도 '제폭구민', '보국안민'을 기치로 내세우고 있음에서 알 수 있듯 국가체제 모순에서 기인한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등 폐정개혁을 통한 국가체제를 바로 세우려는 성격이 강하였다. 이에 비해 2차 봉기는 1894년 6월(이하 음력으로 표기)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연이어 청일전쟁을 일으키며 노골화하는 일제의 침탈에 전적으로 항거하여 일으킨 것이다. 군주제하에서 국왕이 거처하고 있는 경복궁이 점령되고 국왕과 왕비가 구금되었을 뿐만 아니라 궁성 내외의 군대까지도 무장해제되었다는 것은 실로 국권의 침탈 정도를 넘어 일시적이나마 국권이 상실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할 것이다. 전봉준 공초나 판결문에 일본의 경복궁 점령 등 국권침탈 때문에 봉기를 했다거나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보낸 격문 및 조선 경군과 영병에 보낸 교시문에 골육상전을 하지 말고 힘을 합쳐 일본을 몰아내자고 제의하고 있음을 보면, 2차 봉기는 전적으로 일제 침탈에 항거하여 일으켰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렇다고 한다면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자는 현행 독립유공자법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기 위하여 일제에 항거한 자"에 지극히 부합되는 것이며, 마땅히 서훈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할 것이다.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자를 제외한 2차 봉기자만을 서훈 대상자로 신청한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덧붙이는 글 다른 매체에 송고한 바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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