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자 서훈 논의에 대한 견해

- 봉기자 서훈에 반대·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을 보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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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규(hanbong)등록 2024.05.27 13:32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자 서훈 논의에 대한 견해
- 봉기자 서훈에 반대·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을 보면서 -
송 정 수(전북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

3. 국권침탈 시기를 (준)식민지시대로만 국한시키고, 이 시기에 항일한 자만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겠다는 도그마
 
공적심사위원 대다수는 "국권침탈 시기를 1904년 러일전쟁과 1905년 을사조약 전후로 보고 있으며, 동학 2차 봉기의 포상은 정부가 국권침탈 시기를 10여 년이나 앞당기는 것을 공인하는 것"이라거나 "(2차 봉기자에 대한 포상은) 조선과 대한제국(1898년)이 준식민지 상태였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대한제국의 자주적 개혁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면서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자에 대한 서훈을 반대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이들의 의견처럼 일제의 국권침탈이 1904·5년 이전에는 없었던 것일까? 앞에서 언급한 1894년 6월에 일어난 경복궁점령사건, 그리고 1895년 8월 경복궁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한 이른바 을미사변을 국권침탈 말고 무어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준)식민지 상태에서 항거한 것만을 일제에 대한 항거라고 말한다면, 역시 경복궁점령사건을 계기로 척왜(斥倭)를 기치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와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일어난 을미의병은 일제에 대한 항거가 아니면 무어란 일컫는단 말인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다행스럽게도 을미사변에 항거하여 일어난 을미의병 참가자에 대해 서훈이 이루어졌던 것인데, 바로 일제의 국권침탈에 대한 항거로 인정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1868년 메이지유신을 단행한 일본은 서양 제국주의 열강에 편승하여 조선과 중국으로의 정치·경제적 침투를 통해 점차 제국주의를 형성해 나갔다. 이후 청일전쟁(1894년 6월~1895년 3월)을 계기로 제국주의적 침략 야욕을 노골화하였고, 이즈음에 진행된 경복궁을 점령하고 국왕을 포로로 한 갑오변란과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을 일으켜 조선의 국권을 심각하게 침탈하였다. 결국 1905년에 을사늑약 체결로 보호국으로 삼고, 급기야 1910년 한일합병으로 식민지화했지만 이를 위한 일제의 국권침탈은 이미 훨씬 이전인 1894년부터 이루어진 것이다.
일제의 국권침탈 시기를 러일전쟁과 을사조약 전후로 고정시키고, 또 (준)식민지 시대에만 항일운동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시각은 독립운동사라는 좁은 범주 안에 갇혀 바라보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대한제국의 자주적 개혁을 강조하기 위해 국권침탈 시기를 늦추려는 의도는 이해할 수 있겠으나 엄연히 존재한 국권침탈과 이에 항거한 역사적 사실을 도외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역사는 연속적인 선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보다 넓은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하겠다.
 
4. 법 적용의 일관성과 형평성, 서훈 문제 논의의 객관성 필요

독립유공자법에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한 자'를 독립유공자 적용 대상자로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일부 의병활동 참가자가 포함되어 있으나) 대부분 식민지시대 하에서 독립운동을 한 자들을 적용 대상자로 삼아왔고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자는 대상자에서 배제해 왔다. 이는 그동안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를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한 사실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2004년에 제정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보면,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1894년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2차로 봉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중심의 혁명 참여자"라 규정하고 있다. 즉,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 참여자를 '일제의 침략에 대항해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항일무장투쟁을 한 자'로 명시하고 있다. 이는 곧 독립유공자법에서 말하는 '일제의 국권침탈에 반대하기 위해 일제에 항거한 자'와 똑같은 조문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법에 입각하여 서훈 대상으로 삼아도 하등 문제 될 것이 없으며, 나라의 법 적용에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서훈 대상자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한편 독립운동을 한 자를 주로 서훈 적용 대상자로 삼고 있으면서 여타 의병 참여자와 함께 을미의병 참여자도 적용 대상자로 인정하고 있다. 이는 참으로 다행스럽다 할 것이다. 그런데 을미의병 참여자를 서훈 대상자로 삼았다면 형평성 차원에서 당연히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 참여자도 대상자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앞서 언급한 바이지만 을미의병의 계기가 된 왕비를 시해한 을미사변 못지않게 2차 봉기의 계기가 된 경복궁 점령과 왕과 왕비를 포로로 한갑오변란 역시 극심한 국권침탈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전봉준은 2차 봉기를 일으킨 까닭에 대해 "초야의 사족과 백성들이 충군애국(忠君愛國)의 마음으로 비분강개하여 의병을 규합하여 일본인과 전투하여 ..."(전봉준공초)라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나라가 외적의 침입으로 위급할 때 민중 스스로 싸우는 구국 민병'을 '의병'이라 지칭하고 있음을 보면, 2차 봉기 시 전봉준이 규합한 의병은 을미의병과 다르지 않으며, 모두 똑같이 충군애국에서 일으킨 의병인 것이다. 다만 을미의병은 유생이 주도하여 일으켰다는 점이 다르다고 하지만 실제 의병 참여자 대부분은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 참여자와 마찬가지로 농민 등 하층민이 주를 이루고 있다.
 

<전봉준공초>(1895) 전봉준 재판기록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끝으로 서훈 문제 논의에 있어 국가보훈부의 객관적인 입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참고자료의 추진 경과에서 보듯, 국가보훈부는 2차 봉기자 서훈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인 의견을 피력한 학계 전문가 및 학회 차원의 학술회의 결과보다는 반대·신중 의견을 제시한 공적심사위원들의 의견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물론 공적심사를 신청한 개개 사안에 대해서는 당연히 공적심사위원의 심사를 거쳐 가부를 정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자를 서훈 대상자로 삼을지의 여부는 이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짐작하건대 현재의 공적심사위원 중에는 학계 인사로 독립운동사 전공자들이 많은 것으로 보이거니와 차후 계속해서 현행대로 이 문제를 논의한다면 분명 지금과 같은 답보상태가 지속될 거라고 여겨진다. 진정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편파성을 벗어나 국가보훈부의 객관적인 입장이 필요하며, 논의의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적어도 독립운동사 전공자와 동학농민혁명 전공자가 균형있게 참여하는 별도의 논의체에서 논의해야 할 것이며, 학계의 여타 의견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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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송정수에 대한 소개 글을 박용규가 첨부합니다. 기자님들께서 소개하실 때 참조바랍니다.
송정수는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사학과에서 문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음. 전북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교수를 거쳐 현재 전북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임.
대표 논저로 <전봉준 장군과 그의 가족 이야기>(혜안, 2021), <베일에서 벗어나는 전봉준 장군>(혜안, 2018), <중국 정사 외국전이 그리는 '세계'들>(공저, 역사공간, 2016), <중국근세향촌사회사연구>(혜안, 1997), 「'삼립삼절(三立三絶)'을 통해서 본 명조의 하미(Hami) 지배의 변화상」(<명청사연구> 45, 2016), 「《天安全氏世譜丙戌譜》를 통해 본 全琫準의 家系와 出生地에 대한 再硏究」(<歷史學硏究> 38, 2010), 「청 중기 이후 '반청복명' 의식의 전승과 굴절」(<동양사학연구>108, 2009), 「전봉준의 가계와 출생지에 대한 연구」(<조선시대사학보>12집, 2000) 등이 있음. 명청사학회, 동양사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현재 명청사학회, 동양사학회, 역사학회 평의원임.

아래는 송 교수께서 보내주신 사진 몇 장입니다. 활용하시면 좋겠습니다.
 

송정수 송정수 교수 ⓒ 송정수

 
 

송정수 송정수 교수 ⓒ 송정수

 
 

송정수 송정수 교수 ⓒ 송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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