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 밖에서 사실을 좇은 BBC 기자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특종의 탄생>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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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다영(glowdy)등록 2024.05.31 18:02
배우 이선균의 죽음은 사회적 죽음이다. 그의 죽음에는 여러 사회 주체가 참여했다. 그 중 하나가 언론이다. 언론은 자신들이 세운 보도 준칙을 지키지 않고 '이선균 사건'을 계속 가십으로 다뤘다.
 
배우 이선균의 마약 수사 관련 기사는 돌연 '연예인 사생활폭로 기사'로 바뀌었다. KBS <뉴스 9>에서 단독으로 입수한 '유흥업소 직원과의 녹취록'(2023.11.24) 과 MBC <실화탐사대>의 '문자 메시지'(2023.11.23) 보도가 도화선이었다.
 
KBS 방송제작 가이드라인 중 '폭로·공개에 의한 인격권 침해'를 살펴보면 이선균 관련 보도가 자체 기준을 위배한 것처럼 보인다. 가이드라인의 프라이버시 부분에 "개인의 사생활이나 사적인 일과 관련해서 개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공개되거나 간섭받지 않을 자유가 있다"고 명시돼 있다.
 
한국기자협회에서 지정한 '마약류 사건 보도 권고 기준'에 따르면 "선정적‧자극적이거나 심각성을 희석하는 보도를 자제하고, 마약류 범죄 예방 및 문제 해결 중심 보도를 해야 하며, 당사자 및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 등을 신중히 고려하고 사건이 추측‧과장되지 않도록 해야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언론사가 자율적으로 세운 보도 기준이다. 언론은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질문하고 보도한다. 하지만 그 보도로 피해자가 생기는 일에 대해서는 무감했다.
 
언론은 어떤 뉴스 가치와 보도 기준으로 이선균의 사생활을 공개했을까? 여론을 몰아가며, 한 사람을 죽음으로 이끌었던 보도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 질문에 답변을 줄 만한 영화를 보게 되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특종의 탄생>이다. 영화 <호킹>(2004), <더 포저>(2014) 등을 연출한 필립 마틴 감독이 제작했으며, 원작은 샘 맥알리스터의 저서 <스쿱스>다.
 
샘 맥알리스터는 BBC에서 가장 충격적이지만 성공적이었던 앤드루 왕자 인터뷰를 이끈 이 영화의 실제 인물이다. 영화는 샘 맥알리스터의 저서 <스쿱스>에 담긴 '앤드루 왕자 인터뷰 비하인드 스토리' 를 기반으로 제작되었다.
   

영화 <특종의 탄생> ⓒ 넷플릭스


사진 한 장이 진실을 말할 수 있을까?
제프리 엡스타인은 빌 클린턴, 도널드 트럼프, 앤드루 왕자 등을 포함해 여러 유명인사와 알고 지낸 미국의 유명 펀드 매니저다. 현재는 사망한 '억만장자 성범죄자'다.

2008년 제프리 엡스타인은 미성년자 성매매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2010년 교도소에서 석방된 이후 제프리 엡스타인과 앤드루 왕자가 함께 대화하는 사진 한 장이 <뉴스오브더월드> 신문에 보도되었다. 당시 기사 제목은 '앤드루 왕자와 소아성애자'였고, 2019년 제프리 엡스타인이 죽기 전까지 앤드루 왕자에 대한 모든 보도에 이 사진이 따라다녔다. 앤드루 왕자가 젊은 기업을 돕거나 어려운 사람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해도, 2010년 사진이 소환되었다. 2019년 신문에 실린 기사의 제목은 '궁에서 젊은 기업가 지원 사업 시작한 앤드루 왕자, 궁지에 몰려'였다. 언론은 앤드루 왕자를 사진 한 장에 반복적으로 가두고 있었다.
  
카메라 앞, 뒤에서 질문하는 기자들
앤드루 왕자가 몰린 '궁지'는 성범죄자 프레임이다. '성범죄자와 가까이 지냈으니 앤드루 왕자도 미성년 성범죄에 가담했을 것이다'라는 가능성은 언론이 보도한 사진에서 시작됐다. 당시 여론은 앤드루 왕자의 성범죄를 기정사실로 하거나 의심했다. BBC <뉴스나이트> 인터뷰 프로듀서인 샘 맥알리스터는 이러한 여론 뒤에서 사실을 좇은 사람이다.
 
샘 맥알리스터가 사실을 찾아간 과정은 입체적이다. 왕실 측근을 만나고, (앤드루 왕자와 제프리 엡스타인 사진을 찍은) 사진기자와 소통했다. 사진기자로부터 '제프리 엡스타인 집에 10대 소녀들이 오간다'는 정보를 듣고, 샘 맥알리스터는 "앤드루 왕자도 자주 들려요?", "사진 이외에 그걸 입증할 증거가 있어요?"라며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꼬리 물 듯 질문했다. 추가 취재 결과, 2001년 '길레인 맥스웰: 엡스타인의 애인, 앤드루 왕자와의 긴밀한 관계'라는 제목으로 <데일리메일> 신문에 보도된 사진을 발견했다. 사진 속 앤드루 왕자는 10대 소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있다. 샘 맥알리스터는 사실 확인을 멈추지 않고, 알게 된 정보들을 쉽게 보도하지도 않았다. BBC <뉴스나이트>는 입증되지 않은 증거를 특종으로 여기지 않았다. 되려 샘 맥알리스터의 동료들은 앤드루 왕자 이슈를 (다룰 가치가 없는) 가십거리라고 생각했다.
 
BBC <뉴스나이트>의 특종은 왜 앤드루 왕자 인터뷰였을까? 2019년 제프리 엡스타인이 또 성범죄 혐의로 체포되면서 언론의 시선은 앤드루 왕자를 향했다. 동시에 2015년 문건인 버지니아 로버츠의 진술이 공개되자 앤드루 왕자를 향한 시선은 더 좁혀졌다.
 
"당시 17세였던 버지니아 로버츠는 앤드루 왕자와 런던에서 두 차례, 엡스타인의 뉴욕 집에서 한 차례, 총 세 차례에 걸쳐 관계했다고 주장했습니다." - 버지니아 로버츠 진술 보도 내용

버지니아 로버츠는 앞서 샘 맥알리스터가 발견한 (앤드루 왕자가 10대 소녀의 허리에 팔을 두른) 사진 속 10대 소녀다. BBC <뉴스나이트>를 제외한 모든 언론은 버지니아 로버츠의 진술을 보도하며 앤드루 왕자 성매매 혐의를 제기했다. 앤드루 왕자가 '성범죄자의 친구'에서 '성범죄자'로 사실화되는 때, 엡스타인이 돌연 감옥에서 사망했다. 전 세계 언론이 엡스타인 사망 보도에 앤드루 왕자를 언급하고, 앤드루 왕자는 침묵했다. BBC <뉴스나이트>는 여론을 따라가지 않고, 앤드루 왕자의 말을 직접 들었다.
 

영화 <특종의 탄생> 장면 ⓒ ⓒ넷플릭스

  
영화에서는 인터뷰 현장과 보도국의 현장을 교차 장면으로 보여준다. 이들은 카메라 앞, 뒤에서 끊임없이 질문했다. 앤드루 왕자 범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확인되지 않았고, 정황만 확인할 수 있었다. BBC <뉴스나이트>는 의심에 그치는 정황을 모두 배제했다. 직접 인터뷰로 확인한 사실만을 보도했다.
 
결과적으로 이 인터뷰는 앤드루 왕자의 성의 없는 답변으로 많은 공분을 샀다. 버지니아 로버츠 진술 관련한 질문에 '사실이 아니다', '성적 접촉이 없었다' 라며 일관된 답변을 취했다. 그의 거짓말을 의심할 수는 있지만, 범죄를 단정할 만한 근거는 드러나지 않았다.
 
BBC <뉴스나이트> 기자들은 확인된 사실만을 내보냈고, 국민은 저마다 믿는 진실을 판단했다.
 

영화 <특종의 탄생> 장면 ⓒ ⓒ넷플릭스


영화 말미는 우리 사회를 보는 듯하다. 큰 전광판 화면 속 광고와 나란히 있는 앤드루 왕자 속보. 야유하며 사진 찍고, SNS로 빠르게 퍼지는 여론. 언론이 취사한 사실에 시선이 모이고, 그 시선은 여론을 만든다. 기자는 여론에서 멈추지 않고 사실을 계속 좇아야 하는 사람 아닐까?
 
"자유는 듣기 싫어하는 걸 말할 수 있는 권리다." - 조지오웰
 
배우 이선균의 죽음 이후에도 한 사람이 여론에 가둬지는 일은 여전하다. 영화 앞 장면에 나오는 BBC 앞 조지 오웰의 명언에서 '자유에 따르는 책임'을 떠올렸다. 언론의 자유가 적어도 죽음에 참여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한국기자협회 '신문윤리 실천요강' 제3조, 보도준칙 3항으로 "보도기사에 개인이나 단체를 비판하거나 비방하는 내용이 포함될 때는 상대방에게 해명의 기회를 주고 그 내용을 반영해야 한다"라는 내용이 있다.
 
배우 이선균의 사생활 보도가 쏟아질 때 누군가 BBC 샘 맥알리스턴처럼 사실 확인을 이어가 줬다면, 한 사람이라도 그의 목소리를 듣고 전했다면 작품 속 배우 이선균을 더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

오랜만에 다시 꺼내본 드라마 <나의 아저씨>가 유독 슬프다.
 

배우 이선균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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