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가 주는 멋은 무엇일까. 오늘의 기술로부터 미래를 내다보는 식견과 상상력, AI를 비롯해 온갖 기술적 진보를 상징하는 요소가 문학과 빚어내는 조화로움, 기술의 진보 속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인간다움, 그밖에도 여러 가지 재미가 있을 것이다. 이중에서도 작가가 기술을 바라보는 시선을 즐기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일 텐데, 바로 이 지점에서 작가만의 특색이 두드러지게 마련이다. <마션>과 <프로젝트 헤일메리> 등을 집필한 앤디 위어에게선 첨단의 기술 가운데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인간다움이 읽힌다. 그의 소설에선 위기에 봉착한 인간이 제 삶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며 투쟁하고, 다른 이를 위해 기꺼이 저 자신을 희생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블러드 차일드>와 <킨> 같은 명작을 낳은 옥타비아 버틀러는 어떤가. 그녀의 소설에선 외계 생명과의 조우로부터 우리 시대 인간의 폭력성과 비인간성을 마주하게 되지 않던가. ▲ 숨 책 표지 ⓒ 엘리 시간여행 가운데 드러나는 인간다움 이 시대 최고의 SF작가를 논할라 치면 빠지지 않는 작가가 바로 테드 창이다. SF장르 문학상 가운데 최고로 손꼽는 휴고상이며 네뷸러상을 수차례 휩쓴 유망한 작가이자, 역대 최연소 네뷸러상 수상자란 타이틀까지 가진 그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는 드니 빌뇌브가 연출한 영화로 만들어져 세계적 흥행까지 했다. <숨>은 그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표제작 '숨'을 포함해 모두 아홉 편의 단편이 실린 책은 그에게 명성을 안겨준 데뷔작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출간된 지 17년 만에 나와 큰 화제가 되었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같은 중편과 '우리가 해야 할 일' 같은 아주 짧은 단편이 섞여 있어 테드 창의 다채로운 면모를 즐길 수 있다. 첫 작품인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은 시간의 문을 건너 제 과거로 돌아가려는 한 상인의 이야기다. 서사는 단순하다. 서아시아의 한 상인이 어느 나라의 총독과 마주하여 제가 겪은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는 한 가게에서 주인장으로부터 세월의 문이라 불리는 특별한 존재에 대해 듣게 된다. 그 문을 통과하면 20년 전이나 20년 후의 같은 장소로 이동할 수가 있다. 신비한 문은 이곳만이 아닌 여러 곳에 있는데, 그 문이 존재한 지 아직 20년이 되지 않았다면 그 문으로는 미래로만 갈 수가 있다. 그 문이 20년이 되지 않았으므로 20년 전의 과거와 닿을 수 없는 것이다. 대신 20년 후로 갈 수 있다면 그와 통한 이 편의 문은 향후 20년 동안 무리 없이 존재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창작노트를 보면 <인터스텔라>와 <테넷>에서 과학자문을 한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손 킵(Kip S. Thorne) 교수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하는데, 하나의 시간선을 따라 문을 타고 오가는 이 같은 설정이 통상의 타임머신 이야기와는 달리 현대 물리학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해석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바꾸지 못하지만 모든 것이 바뀐다 무튼 상인은 주인장 노인으로부터 세월의 문을 먼저 이용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 이야기는 하나 같이 인간이 과거와 미래를 오갈 수만 있을 뿐, 과거의 일을 바꿔낼 수 없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문을 건넘으로써 과거와 미래를 더 잘 알 수만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인은 20년 전의 과거로 가겠다고 마음먹는다. 20년 전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사고로 잃었고 어쩌면 이를 바로잡을 수 있으리란 기대 또한 품는다. 그러나 이야기의 끝에서 상인은 세월의 문이 다른 이들에게도 가르쳐준 진실을 새삼 깨달을 뿐이다. 제 과거를 바꿀 수 없었고, 다만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해는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완전히 달리 옮겨놓는다. 무엇도 바뀌지 않았으나 모든 것이 바뀌는 경험, 테드 창이 이 작품으로 그려내려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저 아는 것만으로도 무언가는 달라지게 된다는 이야기 말이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도 여러 생각으로 이어지는 작품이다. 내가 사는 세상과 닮아 있는 수많은 평행우주가 존재한다는 가설로부터 출발해 프리즘이라는 도구로 그 프리즘 너머 세상과 교류할 수 있다는 설정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누구는 프리즘 너머의 인간을 이용하려 들고, 또 누구는 이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과제를 프리즘 너머의 지식을 통해 해소하려 한다. 같은 사람이 이 세계에서는 실패하고 저 세계에서는 성공하는 모습도 있고, 그런 성패에 실망하고 절망하는 이들의 모습도 그려진다. 현실 세계 가운데서도 나 아닌 남과 비교하는 이들이 프리즘을 통해 다른 세계의 자신과 스스로를 비교하며 좌절하는 모습이 그럴듯한 감상을 안긴다. 테드 창의 단편집은 현실세계에 잠재된 문제를 미래의 기술을 통해 꺼내어 고민하도록 한다. 비록 그 설정의 참신함에 비하여 이야기의 전개는 단조로운 경우가 많지만 SF소설 특유의 지적 재미만큼은 충실히 챙겨가며 진행된다. 마침내 다가올 과학과 그 윤리적 딜레마를 미리 고민하고자 하는 이라면 충분히 의미가 있는 독서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 작별인사 책 표지 ⓒ 복복서가 인기작가 김영하의 첫 장편 SF <작별인사>는 인기작가 김영하가 9년 만에 내놓은 SF 장편소설이다. 큰 성공을 거둔 <살인자의 기억법> 이후 수편의 에세이와 TV프로그램 출연으로 대중 앞에 제 존재를 각인시킨 그다. 그러나 본업인 소설에선 오랫동안 장편을 내놓지 못하여 팬들의 애를 태웠다. <작별인사>는 전자책서비스 '밀리의 서재' 회원에게만 선보인 글로써 출발했다. 작가의 첫 장편 SF소설로, 통일된 미래의 한국을 배경으로 한다. 그중에서도 부족한 기간시설로 신기술을 시범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적지로 꼽힌 평양이 주된 무대가 된다. 평양에 위치한 사설 연구소 휴먼매터스랩에서 일하는 최박사는 아들 철이를 혼자 기른다. 집 안에 갇혀 아버지와만 지내는 철이는 한번이라도 혼자 바깥에 나가보고 싶지만, 아버지는 나라가 내전으로 위험하다는 이유로 철이의 부탁을 거절한다. 그러던 어느 날. 철이가 아버지와 함께 외출을 나갔을 때 사달이 나고야 만다. 정부 소속 휴머노이드들이 철이를 데려간 것이다. 그들은 철이가 인간이 아닌 미등록 휴머노이드라고 말한다. 철이가 끌려간 교외 수용소에는 먼저 끌려온 또 다른 휴머노이드들이 수두룩하다. 개중엔 철이처럼 인간화된 휴머노이드도 있고, 전투용 휴머노이드, 복제된 클론까지도 섞여 있다. 서로가 서로를 착취하는 무질서한 수용소 안에서 철이는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숨죽여 노력한다. 현대 과학과 철학의 경계에서 소설은 인류의 그리 멀지 않은 미래, 인간이 자신들이 개발한 인공지능에게 밀려 설 자리를 잃어가는 모습을 그린다. 철이가 수용소에서 만난 다른 개체들과 탈출을 감행하고, 제가 인간이 아니란 걸 깨닫는 과정이 그 시작이다. 육체를 포기하고 클라우드에 올려져 영생을 얻는 인간들과 그를 고민하는 개체들의 모습도 흥미롭게 등장한다. 유한한 삶 가운데 필연적인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정신이 되겠다는 이들의 선택이 이어진다. 독자는 이 같은 선택지 앞에서 고민하는 인물들을 통해 독자 스스로가 나라면 어찌할지를 생각하도록 이끈다. 철이와 휴머노이드 민이, 클론 선이, 그들을 돕는 인공지능 달마, 인간 최박사, 그를 변호하는 변호사 등이 수시로 과학과 철학이 맞닿는 질문들을 서로에게 던진다. 그 과정에서 현대 과학의 윤리적 문제들과 존재론적 질문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낸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과학과 철학이 수없이 논의해온 더는 새롭지 않은 문제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를 깊이 고민해본 적 없는 독자에겐 충분히 흥미로운 이야기일 테다. 김영하 특유의 술술 읽히는 문장과 세련된 에피소드가 나름의 재미를 준다. 캐릭터가 선명하게 표현되지 않는다는 등의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꼭 그만큼 무해하여서 부담감 없이 읽을 수 있는 이야기라 하겠다. 일찍이 SF장르며, 현대 과학과 철학의 경계에 대한 논의를 접해보지 못한 아이에게 한 권 소설을 권해야 한다면 이 무해한 책을 떠올려봄직도 하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서평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숨 #테드창 #작별인사 #김영하 #김성호의독서만세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