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에 분포하는 관측된 은하들의 위치를 기록하여 그린 3차원 지도를 보면, 은하들의 분포가 마치 거미줄과 비슷한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지도에는 은하들이 거의 없는 텅 비어있는 공간인 거시공동(Void)과 이것의 외곽을 따라 은하들이 길게 이어진 필라멘트(Filament) 구조가 존재하고, 이 필라멘트들이 교차하는 지점에는 은하가 밀집된 은하단 혹은 초은하단이 위치해 있다. 이 지도를 보면 대우주의 구조가 우리 인간의 뇌가 이루고 있는 시냅스 구조와 놀랄만큼 유사함을 발견하게 되고 이내 경탄을 내뱉게 된다. 그래서 우주를 거인의 뇌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 구조에 대해 조금 더 파고 들어가 보자. '은하단'은 수백 개에서 수천 개 이상의 은하들이 중력에 의해 서로 묶인 집단이다. 수십 개 정도로 구성된 은하의 집단은 '은하군'이라 불린다. 또한 이런 은하군이나 은하단이 여럿 모여 이루는 구조는 '초은하단'이라고 한다. 초은하단은 은하단보다 더 큰 규모의 구조이기는 하지만 은하단끼리의 미약한 중력에 의해 국소적으로 생겨난 고밀도 구역에 지나지 않는다. 초은하단이 모여 만들어진 장성(Great Wall)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보면 은하단은 물질이 중력적으로 속박된 구조 중 우주에서 가장 거대한 단위라고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바로 우리 은하가 속한 라니아케아 초은하단이 있다. 또한 은하단보다 작은 은하들의 모임으로 보통 수십~백여 개의 은하들이 모여 있는 그룹을 은하군이라 하며, 우리 은하가 속한 국부 은하군이 여기에 해당한다. 즉, 우주는 텅빈 거대공동 구역과 은하와 별들이 존재하는 필라멘트 구조로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 있으며, 그중 필라멘트 구조는 초은하단(Supercluster) > 은하단(Galaxy cluster) > 은하군(Group of galaxies) > 은하(Galaxy) > 항성계(Star system) 의 구조로 설명할 수 있다. 이를 우리 지구를 기준으로 대입하면 라니아케아 초은하단(Laniakea Supercluster) > 처녀자리 은하단(Virgo Cluster) > 국부 은하군(Local group) > 우리 은하(Milky Way Galaxy, Our Galaxy) > 태양계(Solar System), 그리고 태양의 3번째 행성으로서 위치한 우리의 터전을 볼 수 있다. 이토록 끝도 없이 광막한 대우주 속의 창백한 푸른 점 은하계, 그 은하계 안의 창백한 푸른 점인 태양계, 태양계 안의 창백한 푸른 점, 지구.. 칼 세이건은 1990년, 보이저 1호가 태양계 끝에서 지구를 찍은 사진을 보며 이 작은 행성에 대해 "창백한 푸른 점"이라는 표현을 남겼다. 그 이미지는 우리에게 우주의 광활함 속에서 지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강렬하게 상기시켜 주었다. 이 작은 점 속에 80억 명의 인류가 모여 살고 있으며, 수많은 역사가 이 지구에서 펼쳐져 왔다. 그러나 광대한 우주의 먼지 같은 이 지구라는 작은 행성에서조차 우리는 여전히 수많은 고통과 불평등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다. 지구를 하나의 우주로 치환해 본다면, 이 '창백한 푸른 점 - 지구' 속에서도 창백하게 질린 채 작은 '푸른 점'처럼 외면받고 고립되어 살아가는 지역들이 있다. 이들은 전 세계의 무관심과 외면 속에서 고통받고 있으며, 그들의 비참한 현실은 우리 모두가 더욱 겸손해지고 서로 협력해야만 함을 절실히 느끼게 만든다. 이 지구 속 창백한 푸른 점들 중에서 대표적으로 2곳만 살펴보자. 아이티 : 끝없는 고통의 연속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서 오랜 시간 고통을 받아온 아이티는 1804년, 흑인 노예들의 반란으로 세계 최초의 흑인 공화국을 세우며 독립했지만, 그들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프랑스는 보상을 해주기는 커녕 산업 인프라를 깔아주고 간다는 명목으로 1억 5천만 프랑이라는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요구했고, 아이티는 수십 년간 이를 갚기 위해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며 자립의 씨앗조차 제거 당했다. 프랑스의 뒤를 이은 미국 역시 자국의 이익만 챙기기 급급했고 이들을 학살하며 경제적 착취를 이어 나갔다. 이로 인해 아이티의 산업 발전은 정체되고, 국제적으로 고립된 채 헤어날 수 없는 빈곤의 굴레에 갇혔다. 스스로 독립을 쟁취한 아이티는 이후 유사한 독립 시도가 일어날 것을 우려한 서구의 제국주의 열강들에게 밉보여 그들이 지배하는 동안 그토록 열심히 수출하던 농산물을 세계 그 어느 곳에서도 받아주지 않도록 고립시켰고, 프랑스는 식민지배에 대해 사과하고 그 기간 동안의 피해를 보상해주진 못할 망정 그들의 독립을 인정해 주고 떠나는 대가로 우리가 사회 인프라를 다 깔아주었다며 독립보상금을 요구하는 파렴치를 보였다. 무역제제와 의도적인 고립에 시달리던 아이티는 울며 겨자먹기로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밖에 없었고, 1억 5천만 프랑의 보상금을 무려 170여년 동안 갚아 나가는 동안 그만큼 아이티는 자체 발전의 가능성을 가로막혔다. 심지어 돈이 모자랄 때는 프랑스 중앙은행이 고금리로 대출을 해주어 그 돈으로 갚게 했으니, 원금 상환에다 고리의 이자까자 이중으로 착취해 간 것이다. 교육받은 인력이 없고 변변한 산업도 키운 것이 없는 아이티는 초라한 경제와 불안정한 정치 현실에 반복되는 쿠데타와 갱들과 결탁한 정치인들의 부패 아래, 작년 대통령이 암살당하는 사건까지 일어났고, 대통령 측 배후에 있던 갱단이 복수를 다짐하면서 극단적인 혼란이 벌어졌고, 이제는 치안력은 무너져 갱들의 천국이 되어버린 현실이다. 이 지옥같은 아이티의 현실을 누가 만들었는가. 프랑스는 현재 EU의 리더이자, 전 세계가 우러러보는 문화강국이 되어 얼마전 파리 올림픽까지 치르면서 자신들의 우아함을 뽐내고 있다. 탄소를 줄인다며 에어컨을 제공하지 않고 센강에서 수영을 시키고 싶다고 억지로 몇조를 들여 수질을 개선한다. 벨 에포크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파리가 당당하게 그 우아함을 부릴 수 있는 토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생각해 보라. 더욱이 2010년과 2021년의 대지진은 가뜩이나 고통스러운 이 나라를 다시 무너뜨렸다. 정부 기능이 마비되고, 갱단들의 폭력 속에 무정부 상태로 빠지면서, 아이티는 오늘날까지도 경제적,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극심한 혼란과 함께 대다수 국민이 기아에 고통받고 있다. 팔레스타인 : 감옥 같은 현실 팔레스타인의 현실은 아이티에 비해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간략히 요악하자면, 팔레스타인은 수천 년간 그들의 땅에서 살아왔지만, 20세기 중반 영국의 무책임한 이중 플레이로 인해 분쟁의 씨앗이 뿌려진 채 이스라엘이 들어서면서,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특히 가자 지구의 사람들은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물자와 식수 공급이 통제된 채, 외부 세계와 단절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가자 지구는 일종의 "창살 없는 감옥"이 되어버렸고,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때리는 미사일로 죽음의 위협에 처한 채, 주민들은 최소한의 생존조차 늘 위협받고 있다. 이들은 단순히 전쟁의 희생자가 아니라, 국제적인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강대국들의 힘에 의해 강제적으로 고립된 사람들이다. 그들의 삶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평화와는 거리가 멀며, 그들에게는 자유롭고 존엄한 삶이 보장되지 않고 있다. 이 2곳 외에도 많은 지역들이 강대국들의 탐욕과 무관심 속에 고립된 채, 창백한 푸른 점처럼 존재하고 있다. 지구 속 '창백한 푸른 점' 같은 지역들, 즉 아이티와 팔레스타인 같이 고통받고 있는 수많은 곳들을 생각할 때, 우리는 역사적인 맥락에서 이들의 고통이 단순한 사고나 운명적인 결과가 아니라, 강대국들의 탐욕과 무책임에서 비롯된 인공적인 것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이들 지역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하며, 이들이 처한 처참한 현실은 더 이상 방치되어서는 안 된다. 이들이 처한 현실에 책임이 있는 서구 선진국들은 과거의 식민 지배와 착취에 대한 책임을 인식하고,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적절한 보상을 해야만 한다. 이들 국가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그들이 자립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인류 전체의 의무일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는 하나의 작은 점에 불과한 존재들이다. 이 작은 점 속에서조차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하지 못한다면 우리 인류가 기술을 더욱 발달시켜 우주로 진출한다고 한들, 먼저 진출한 쪽이 권력을 잡고 대립과 반목을 되풀이할 뿐,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겠는가. 우주와 지구의 평행이론? 우리의 터전인 지구는 이 우주 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을까? 우리는 칼 세이건이 말한 것처럼 이 광막한 우주 속에서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잘 알고 있다. 우리 지구는 태양계의 변방에 있는 작은 행성에 불과하다. 더 나아가, 태양계는 우리 은하의 변두리에 위치해 있고, 우리 은하조차도 처녀자리 은하단의 한 변방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처녀자리 은하단이 속한 라니아케아 초은하단.. 우리가 속해 있는 이 거대한 구조들도 결국 우주 전체를 놓고 보면 변방에 있는 한 점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속에서조차 우리는 여전히 분열되고, 서로를 억압하며, 자원을 쟁탈하는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 거대한 우주 속에서 우리는 고립된 채 떠도는 존재일지 모른다.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우주의 영역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줄어들고 있다. 우주는 팽창하고 있으며, 그 팽창 속도는 빛보다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결국, 우리가 지금 관측하고 있는 은하들조차 언젠가는 시야에서 사라질 것이다. 어쩌면 우리 은하는 광막한 우주의 변방에 외로이 떨어져 나가버린 우주 미아일지도 모른다. 혹시 우리가 관측하지 못하는 저 먼 우주의 중심부에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찬란한 문명을 이룩한 외계 종족들이 서로 교류하며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을까? 아니면 그들도 우리처럼 서로 갈등하고, 착취하고, 약탈하는 문명을 이루고 있을까? 우주의 중심부나 변방에서조차 서로 비슷한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면, 우주 전체가 결국 고통과 갈등 속에 잠겨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한 생각을 하면 이내 섬짓해 짐을 느낀다. 그러나 그들은 고도의 기술문명을 이룩한 채 탐욕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고, 서로를 이해하며 더 나은 삶을 위해 협력하면서 거대한 스페이스 오페라를 써내려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지구인들을 보라. 지구 중력의 탈출조차도 버거워하는 로켓기술을 가지고 이제 한번 쓰고 버리지 않고 재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들떠 있다. 이정도 알량한 기술 발전에 우쭐해하며 마치 곧 모든 것을 정복할 수 있을 것처럼 행동한다. 우리는 보잘것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깨닫지 못한 채 작은 우주선을 띄워 이 광대한 우주에 지구에서와 같이 쓰레기 더미만을 남기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대우주가 주는 교훈 : 겸손과 협력 우주 속에서 우리 지구가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지를 깨달을수록, 우리는 더욱 겸손해져야 한다. 지구 내에서 벌어지는 고통과 불평등을 해결하는 것은 단순히 도덕적인 의무일 뿐만 아니라, 우주 속에서 우리가 더 나은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칼 세이건은 "창백한 푸른 점"을 통해 인간이 자신의 위치를 성찰하고, 서로 협력하며 살아가기를 바랐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주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깨닫고, 그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돕는 것이다. 우리보다 발전한 고도의 외계 문명이 존재한다면, 그들은 이미 같은 교훈을 배웠을 것이다. 우주 속의 진정한 문명은 갈등과 파괴가 아니라, 이해와 평화에 기반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우주와 관계를 맺는 방식도 그러해야 한다. 우리의 작은 행성이 우주의 거대한 무대 위에서는 한 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지구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통을 해결하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이는 단순히 지구적인 과제가 아니라, 우리 인류가 짊어진 우주적인 의무일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제 개인 SNS,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창백한푸른점 #대우주 #소통과협력 #이해와공감 #지구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